동어서화(東語西話)

21. 별전인 선은 교와 다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8:18
21. 별전인 선은 교와 다른가 ?


1년이라는 세월의 단위가 없었더라면 긴 시간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고,
마음이 아니면 갖가지의 현상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1년은 춘·하·추·동의 4계절로 분명히 구별되지만,
1년이라는 세월과 별개로 4계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돈(頓)·점(漸)·편(偏)·원(圓)이 이치상으로 보면 분명히 구별되지만
한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 한 해[歲]는 제 스스로가 춘·하·추·동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나
4계절의 질서는 한 해를 이룬다.
이처럼 마음은 돈·점·편·원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4교(四敎)는 그 마음을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차별을 떠나서 달리 동일함이 있지 않으며,
동일함을 떠나서 달리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별에 상즉(相卽)한 동일함이므으로 넷이 하나를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고,
동일함에 상즉한 차별이므로 하나가 넷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에 동일한 측면만 있다면 교화의 방편을 철저하게 하지 못할 것이고,
다만 차별적인 측면만 있다면 그 근본자리에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함과 차별은 개별적으로 볼 때는 서로 양립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근본자리와 그 방편을 나누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달마의 선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여래가 본래부터 품고 있었던 내용을
그대로 모두 드러낸 것이다.
선사들이 비록 교외별전이라고 하지만, 어찌 교(敎) 밖에
과연 다 전하지 못한 법이 따로 있어서 달리 전했을리가 있겠는가?
만일 따로 전할 그 무엇이 있었다면 외도(外道)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따로 전할 것이 없었다면
허망한 소리를 지껄이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한마음과 4교(四敎)의 관계로써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달마의 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몇마디 하겠다.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시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일곱 걸음을 걸으셨습니다.
 이 행위는 어떤 교의(敎義)에 속하는가?
 바로 이것이 별전(別傳)을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신 것입니다.
 어찌 최후에 꽃 한 송이를 가섭에게 보이시고 난 뒤
 비로소 별전을 전했겠습니까?
 중간 49년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그대로 방편을 버리게 한 일 등은 모두가 별전의 종지(宗旨)입니다.
 그러니 어찌 사바에 출현하시자마자 일곱 걸음 걸으신 것과,
 입멸하실 때 꽃 한 송이 든 것만이 별전이겠습니까?
 이른바 별전이란 교(敎)에 따로 존재하는 선(禪)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 밖에 따로 있는 법도 아니고,
 언어와 문자를 떠난 밖에 따로 언어로써 허용하지 못할
 비밀스런 삼매(三昧)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치 밖에 따로 이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괜히 할 일 없이 고의로 이 말을 지어낸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만을 보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을 의지하여 가르친 것은 한 법일 뿐입니다.
 어떻게 이른바 따로[別]라는 것이 있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의 본체는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경험적인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내지는 일체의 모든 형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록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언어가 아니면 가르침 자체를 세울 수가 없으며,
 경험적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경험적 지식이 아니면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없으며,
 논리적 사유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사유가 아니면 그 가르침에 도달할 수 없으며,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문자가 아니면 그 가르침을 체계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 등이 바로 가르침[敎]이며,
 그것을 떠난 것이 교외별전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교(敎)는 마음을 언어와 문자로 밝힌 것이며,
 교외별전은 언어와 문자를 뛰어넘어
 마음 그 자체에 오묘하게 계합하는 것입니다.
 가령 언어와 문자 밖에 따로 다른 뜻이 있다면 경전에서
 `모든 법이 고요히 멸한 모습은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는 알 수 없다' 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나 문자 등으로는 정말 여래의 마음에 계합할 수 없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런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설법을 시작하여
 입멸하신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러니 일대장교(一大藏敎)를 어찌 언어나 문자 등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여래의 본 뜻을 통철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언어나 문자에 집착한다면 진정한 교(敎)가 아니며,
 그렇다고 문자가 쓸모없다고 고집한다면 그것도 참된 선(禪)이 아닙니다.
 걸핏하면 유(有)·무(無)의 사이에서 집착하는 것은
 교(敎)와 선(禪)에서도 모두 배척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교외별전이라는 것은 바로 선(禪)을 두고 하는 말인데,
 선이란 한 마음의 다른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人)·천(天)의 2승(二乘)들이 수행하는
 4선 8정(四禪八定)의 선에서는, 반드시 육신을 마른 고목처럼 하고
 마음을 죽여 알음알이를 없애고 식(識)을 끊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달마스님의
 곧바로 가리킨 선[直指之禪]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의 본체는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과도 같습니다.
 상근기로서 숙세의 업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어
 방편을 쓰기 전에 미리 알며, 말 밖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경험과 사유 등을 가지고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로 알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배 위에서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 그 위치를 뱃전에 표시하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칼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멀리 달마스님으로부터 계속 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문자나 형상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지극한 이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별전이라는 말은 실로 의미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종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선(禪)은 문자를 떠난 교(敎)이며,
 교는 문자가 있는 선입니다.
 선과 교에 한 털끝만큼이라도 공통점을 찾으려 해도 결코 찾지 못하는데,
 더구나 무슨 구별이 있을 수조차 있겠읍니까?
 다만 구별되는 점은 교화의 방편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단단한 얼음과 한 여름날의 뙤약볕이 하루한날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