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2. 방편은 깨달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8:34
22. 방편은 깨달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가 ?


약을 먹었다고 해서 모든 병이 반드시 치료되는 것도 아니고,
병이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약을 쓰느냐 마느냐 혹은 목숨을 구하는가 못 구하는가는
의사의 잘잘못에 달려있을 뿐이다.
실로 건강의 요체를 체득하여 추위로써 추위를 물리치고
더위로써 더위를 물리친다면, 건강을 더욱 실하게 해서
그 허(虛)한 것을 더더욱 허하게 하는 오류는 없을 것이다.
그 요체를 체득하지 못하여 혹 털끝만큼이라도 약을 잘못 투여한다면,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도리어 약 때문에 죽게 된다.

이 세상에 노의(盧醫)와 편작(扁鵲)처럼 훌륭한 의사가 없었더라면
수만금의 가치가 있는 신약(神藥)이라 해도
오히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약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이로움과 해로움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부처님을 3단계의 대의왕(大醫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오로지 최고의 신령한 약으로써 법신(法身)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증세에 따라 방편을 쓸 경우에 순(順)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역(逆)으로 시술하기도 하면서 자유자재하게 치료해주신다.
세간에서 말하는 어떠한 신성공교(神聖工巧)라도

부처님에게는 비교될 수 없다.

나는 그 뒤로 「원각경」을 열람했었다.
문수보살이 처음 부처님께서 수행했던 인지(因地)에 대하여 질문하자,
"영원히 무명을 끊어야만 불도(拂道)를 이룰 수 있으리라" 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보현보살이 "몸과 마음이 모두 허깨비인데 어떻게
이 허깨비인 몸으로써 허깨비인 무명을 없앨 수 있을까" 에 대해 질문하자,
"응당히 허망한 경계를 모두 없애야 하나니,
 아주 없애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간직했기 때문에
 마음이 허깨비같다는 생각조차도 없어져야 되며,
 `허깨비를 아주 없애버린다'는 생각마저도
 또한 `멀리 여의었다'는 그 생각까지도 또한 없애서,
 더 이상 없앨 것이 없게 되면, 허깨비도 없어지게 되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자 보안보살이 수행의 차례를 질문하자, 부처님께서는
"먼저 여래의 사마타행(奢摩他行)에 의지하여 계율을 잘 지키고,
 여러 대중과 함께 수행하며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서
 4대(四大)와 6근(六根)·6진(六塵)이
 허망하게 화합하여 이 몸이 되었다고 두루 관찰하여야 한다.
 마음·육근·육진과 허깨비가 함께 소멸하면 모든 곳이 다 청정하리라" 하셨다.
그러자 또 미륵보살이 불보리(佛菩提)를 닦는 차별이
몇 종류나 되는가에 대해 묻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생사를 해탈하여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탐욕을 끊고 애욕을 제거해야 한다" 고 하셨다.

또 청정혜보살이 범부와 성인이 증오하고 체득하는데에
어떤 순서〔漸次〕와 차별이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자,
"모든 장애가 바로 구경각(究境覺)이며, 바른 생각을 얻거나,
 잃거나 해탈 아님이 없다" 고 하시며,
"또한 항상 어느 때에라도 허망한 생각을 하지 않고,
 허망을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고 답변하셨다.
또 위덕자재보살이 모든 방편과 수행하는 사람의 종류를 질문하자,
"세 종류의 청정한 관(觀)을 닦아야 한다.
 말하자면 적정사마타(寂靜奢摩他)와 여환삼마발제(如幻三摩鉢提)와
 적멸선나(寂滅禪那) 등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또 변음보살이 원각법문(圓覺法門)을 몇 가지로 수행해서
닦아야 하는가에 대해 묻자,
"25종 청정묘륜(二十五種淸淨妙輪)으로써
 앞에서 말한 3관(三觀)을 홑으로 또는 겹으로 닦아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정제업장보살이 본성은 청정한데
어찌하여 중생들이 더러움에 물들었는가에 대하여 질문하자,
"4상(四相)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고 대답하시고
또 "오로지 정근하여 번뇌를 항복받고, 대용맹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은 얻게 하고 끊지 못한 것은 끊게 해야 한다" 고 답변하셨다.
원각보살이 어떻게 안거하며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수행해야 되는가에 대해 질문하자,
"세 기간을 세워서 간절하게 참회를 하고,
 다시 3종정관(三種淨觀)으로 낱낱의 일을 모두 배워야 한다" 고 답변하셨다.

이상은 모두가 대비(大悲)하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들에게 널리 고하신 것으로
깨달음의 본체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선견(善見)이며 묘약이다.

무엇 때문에 유독 보각보살의 질문에 답변한 보각장(普覺章)에서
네 가지 병통〔四病〕을 지적하였겠는가?
즉 작(作)·지(缺)·임(任)·멸(滅)을 병통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 선견신약(善見神藥)도
결국은 모두 이 네 가지 병통〔四病〕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허깨비를 멀리 떠나버려야 한다' 는 데서부터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3기(三期)를 건립해야 한다' 는 등까지의
부처님 말씀이 어찌 작(作)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선적으로 탐욕을 끊고 애욕을 제거해야 한다' 는 부분부터
`고요한 방에 단정히 앉아 사마타행을 닦아야 한다' 는 등까지는
어찌 지(缺)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일체의 장애가 바로 구경각(究竟覺)이다' 에서부터
`모든 허망한 마음도 쉬거나 소멸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등등의 말씀이
어찌 임(任)이 아니겠는가?
또 `무명(無明)을 영원히 단절하고'에서부터
`4대(四大)·6근(六根)이 허망하게 화합했다가 허깨비와 함께 소멸한다'는
등까지가, 어찌 멸(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법신(法身)이 5도(五道)에 유전하여
중생이 된 까닭은 안으로 3독(三毒)에 훈습되고,
밖으로는 4전도(四倒)에 미혹했기 때문에
끝없는 생사의 바다 속으로 굴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래께서는 3독·4전도를 지적하여 병통이라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작·지·임·멸(作·缺·任·滅)을 병통으로 한 까닭은 무엇인가?
또 작·지·임·멸이 원래 원각(圓覺)의 문턱에 나아가는데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역시 성도(聖道)를 깨닫는 순서이기는 하다.
3독과 4전도에 비교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치가 비록 성인의 말씀이지만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 의심을 여기에서 풀어보여 주겠다.

이런 소리 듣지 못했는가?
`한 때에 부처님께서 신통대광명장(神通大光明藏)에 들어가사
삼매(三昧)를 그대로 받고 있으셨으며,
그 때에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동일하였고
아래로는 중생과 10법계(十法界) 가운데
유정(有情)·무정(無情)들과 동시에 함께 들어갔나니라' 하는 얘기를.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앉은 자리에서 잠시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바로 거기에는 주인[主]도 짝[伴]도 없고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구별도 없고,
몸과 마음이 혼융하여 하나가 되며 성(性)과 상(相)이 평등하다.
그러나 스무 명의 대사(大君)는 경(境)과 지(智)를
모두 없애버리지 못하고 질문을 하여 시시비비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대원각(大圓覺)에 의거하여 그들의 질문에 따라서
어떻게 수행하고 깨달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말씀하시니
곧, 작·지·임·멸을 두루두루 가르쳐서 약으로 삼았다.
그러나 보각장(普覺章)에 와서는 앞에서 말한 내용을 수습하고
현묘하게 창도하려고 작·지·임·멸을
모두 배척하여 `병통' 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병통' 이란 한 말로 취사(取捨)를 모두 부정해버렸다.

긍정할 줄만 알고 부정할 줄은 모른다면
문답을 서로 주고받느라고 원각을 혼동할 것이고,
부정만 알지 긍정할 줄을 모른다면 그저 부정만 하느라고
원각을 잃어버릴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긍정 또한 약이며,
부정 또한 약이라는 사실이다.
긍정해주는 것이 약이 된다 함은 3독·4전도의 정병(正病)을 치료한 것이고,
부정(不定)하는 것이 약이 된다 함은
작·지·임·멸의 조병(助病)을 다스린 것이다.

세상에서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였느냐?
일반적으로 처음 정병(正病)에 감염된 때에는 처방을 내려 치료하다가,
급기야는 투여했던 약을 지나치게 고집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이로 인해 처음 감염된 정병(正病)은 병으로 여기지 않게 되고
도리어 약 자체가 병통이 되어,
끝내 어떻게 치료해 볼 도리가 없게 된다.
약이 도리어 병이 된 것은 어지간한 의원은 치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을 분명히 알야야 한다.
작·지·임·멸이란 약 때문에 생긴 병의 근원을
여래께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셨다면,
그 누구라서 그 병통을 지적해낼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알아라. 각(覺)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허망을 깨닫는 각(覺)은 일체의 구염(垢染)과
세간·출세간의 갖가지 견문진습(見聞塵習)을 치료하는 것이며,
각(覺)의 본체는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구별을 떠났고,
자취로는 자(自)·타(他)가 없어져 색(色)과 공(空)을 모두 녹여 없애고
능(能)과 소(所)를 둘 다 잊었다.
고금에 이르기까지 두루 밝고 고요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그 사이에 한 티끌도 없으며 마주 보는 자체는 원만 청정하다.
보리·열반·진여·반야라 해도 이 경계에 오게 되면
모두 병통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어찌 작·지·임·멸이 병통이 아닐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