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3. 교화의 성쇠는 무엇에 달렸는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8:36
23. 교화의 성쇠는 무엇에 달렸는가 ?


선한 행동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행동을 하면 재앙을 입으며,
올바르게 행동하면 도에 합치하고 삿된 행동을 하면 업(業)을 짓는다.
이 이치는 너무도 분명하여
마치 흑색과 백색을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진여의 청정한 경계에는 애초에 선·악·사·정(善惡邪正)이 없었는데,
모두가 한 생각이 홀연히 일어날 때에
관조(觀照)를 잃었기 때문에 부득불 있게 된 것이다.
선·악·사·정이 있기 때문에 3계(三界)의 번뇌가
생각생각에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성(成)·주(住)·괴(壞)·공(空)이 순환하여 그치질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을 내어 교화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하다가
끝내는 선도 잊어버리고 도에 합치되게 했으며,
또한 삿됨을 버리고 올바름에 돌아가게 하다가
끝내는 그 올바름마저도 잊어버리고 마음에 회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고 3계가 텅 비며,
한 티끌도 요동하지 않고 번뇌가 다 없어져
다시 본제(本際)로 되돌아가 근원을 투철하게 깨우치면,
교화의 방편마저도 저절로 없어져 버린다.

악을 버리면 육친의 은혜와 사랑을 끊고 이익과 명예를 멀리하여
번뇌를 벗어나 탐욕이 사라진다.
삿됨을 버리면 물(物)·아(我)가 평등해지고 시비가 끊어져
경험적 지식이 사라지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어지며,
선을 따르면 계율을 지키고 선나(禪那)를 닦아서 공적한 깨달음에 나아간다.
올바름으로 돌아가면 법의 근원을 분명히 깨달아
진제(眞諦)를 통철하게 밝혀 불심(佛心)에 계합하여 성도(聖道)를 이룬다.
나아가 사(邪)·정(正)·선(善·악(惡)이 모여 일념(一念)으로 되돌아 가면,
항상 상대의 근기를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어서 뭇 중생을 두루 제도한다.
그러면 그저 손 가는대로 하더라도 하는 일마다 오묘한 작용 아닌 것이 없다.
중생의 서원을 따르고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며,
손과 눈 등의 몸 전체에 이르기까지 한 기연도 드러내지 않고
왕성하게 작용하나 조금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며,
손끝하나 까닭하지 않고 오가는 모든 행동에 구속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교화하시는 근본 뜻이다.
뭇 종파와 각기 다른 가르침이 각각 다른 가풍을 세웠다 하더라도
모두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부처님께서 건립하시고 그 뒤로 조사들께서 서로 불법을 계승하면서부터
크고 작은 가람들이 곳곳에 분포하게 되었다.
한 지방의 어른노릇 하는 자로써 혹 선악이 뒤바뀔 경우
화·복의 기미는 생각을 따라 메아리처럼 호응한다.
안으로 자기의 덕을 갈무리하고 밖으로 널리 교화를 펴려면
이 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된다.

알음알이는 뛰는 말처럼 쉽게 일어나고
정(情)은 원숭이처럼 움직이길 좋아하여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현이 예법을 제정하고 법도를 만들어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매우 미세한 번뇌를 미리 방지하여
그것이 점차적으로 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령 작은 번뇌를 막을 줄 모른다면 그 많은 집착을 어떻게 구제하겠으며,
점차적으로 커지는 번뇌를 막을 줄 모른다면
담박에 생기는 번뇌를 수습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은 마치 물과 불이 미세하고 점차로 커지려고 하는 시초에 방지한다면,
결코 물이나 불 때문에 산이 무너지고 들판이
모두 불타버리는 지경에까지는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승(萬乘)의 권세를 버리고
필부가 주는 갖은 욕을 달게 받았으며,
속세의 엄청난 부귀를 모두 버리고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서 옷과 음식을 구걸하였다.
궁실의 화려함을 잊어버리고 한 몸뚱이를 그저 초목 아래에서 굴렸으며,
부모와 처자와의 관계가 매우 귀중하지만
그것을 모두 끊고 갖은 고생을 몸소 겪으셨다.
이렇게 행동하신 이유는 가없는 중생들이
한량없는 욕심덩어리가 알음알이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단번에 제압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애통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고쳐주려고 세간에 화현(化現)하신 것이다.
실로 작은 상태일적에 방지하고
점차로 커지려는 길목을 막는 대지(大旨)라 하겠다.

교화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과 욕심의 사이에서 결정된다.
가령 도덕을 잘 지키면 교화가 잘 되기를 억지로 바라지 않아도 잘 되고,
반대로 욕심을 부리면 교화가 안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잘 안된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불조(佛祖)께서 성대하게 교화를 펴신 뒤로부터
세월이 차츰 흘러 점점 중생들의 근기가 쇠퇴하게 되자
마침내는 도덕마저도 점점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흘러 세상사가 변화하는 동안에
탐욕과 망령된 행위들은 나날이 더해가 욕심은 더더욱 많아졌다.

도덕과 욕심과의 관계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즉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고,
물과 불이 같은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수도하는 도량에서 단정하게 거처하면서도
작은 욕심들을 막을 줄 모르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서로서로 욕심을 부리고
이익으로써 서로서로를 유혹해서야 되겠는가?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여긴다면,
바싹 마른 불쏘시개에 횃불을 던진 것과 다름없다.
경계(境界)의 바람이 매일매일 부채질하여 재앙이 갑자기 일어나는데도
도리어 근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교화가 저절로 되기를 기다리는 자는
마치 그물 속에 바람을 채우려는 것처럼 어리석을 뿐이다.
참으로 불쌍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