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6. 반야의 정체는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20:08
26. 반야의 정체는 무엇인가 ?


태말충(太末蟲)이란 벌레는 어느 곳에나 달라붙지만
불꽃 위에는 달라붙지 못하며,
중생의 마음은 곳곳에 반연할 수 있지만 반야 위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불길에야 원래 붙지 못하겠지만
반야는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유독 반연하지 못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가령 반야에 반연이 불가능하다면
중생이 성불(成佛)한다는 이치도 옳지 않으리라.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중생은 허망에 미혹하여 생사에 타락하여 세간에 오염되어 떠돌고 있다.
알음알이가 불길처럼 솟아오르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 모두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비록 좀 아는게 있다 해도 희론을 이룰 뿐이다.
멀리는 많은 겁을 보냈고 가까이는 금생에 이르기까지
계속 미혹하여 한 번도 쉬어보질 못했다.

반야는 언어로도 알 수 없으며, 문자로도 알 수 없으며,
심식(心識)으로도 알 수 없으며, 사유로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견문각지의 변계소집성으로 분별하는
갖가지 분별지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그것마저도 모두 멀리 버려야 한다.
바로 이렇게 되어야지만 반야의 자체를 마주보며 성취할 수 있다.

이른바 반연할 수 없다는 것은 진(眞)과 망(妄)이 각각 성립되어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명(明)과 암(暗)의 두 자체가 서로 합치하여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신통변화가 있다 해도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법에는 다른 모양이 없어서 사념을 요동했다 하면 그릇되며,
이치는 모든 길이 끊겨서 마음을 움직였다 하면
벌써 막힌다는 것은 자못 알지 못했다고 하겠다.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이 반야 그 자체이며,
온 대지가 광명의 깃발이다.
한 티끌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원만청정하지만,
가느다란 티끌 정도라도 알음알이가 남아 있으면
억만 세월이 지나도 밝히기 어렵다.

분명하게 깨치려면 반드시 지혜의 작용에 의지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한 생각이 싹트기 이전에 주관·객관의 대립을 뽑아버리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을 때 인(人)·아(我)의 견해를 비워버리고,
생각생각에 무명을 타파하고,
망상을 떠나며 반연을 끊고 견문각지를 없애버려야 한다.
이 뜻을 분연히 일으켜
마치 금강왕보검을 높은 누각에서 허리에 비껴차고 있다가
물건을 만나는대로 바로 베어버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종일토록 치연하게 끊임없이 하여
그렇게 하길 오래오래 하면 마음과 바깥 경계가 공적하고,
인(人)·법(法)이 뵈고, 의식이 소멸하고 기량이 다하여
손 안의 칼자루까지도 일시에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는 반야도 없는데 지혜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며
반야를 떠나서는 중생의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반연을 하겠는가.
즉 중생심은 반야가 아니나, 푸른 색이 쪽빛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며,
반야는 중생심이 아니나 얼음이 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바로 중생심이고 바로 반야이어서 확연하게 원명(圓明)하며,
한편 반야도 아니고 중생심도 아니어서 전혀 의탁할 곳도 없다.
그런 뒤에는 한 티끌만 움직여도 만법이 나타나며
한 사념을 움직여도 만법이 나타나며 한 사념을 거두면
십허(十虛)가 무너져 권서(卷舒)와 여탈(與尊)을 마음대로 종횡으로 하며,
생사거래의 법에서도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비록 일이 이와 같더라도 조사의 문하와 본분납승의 면전에서는
어떠한 말도 남겨둘 수 없으리라,
기이하다.
이 도는 왜 옛 사람만 홀로 소유하고 나에게만 유독 없겠는가?
총림이 날로 쇠잔해지고 세월은 자꾸 흐르니
노력하여 부지런히 참구하라. 결코 서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