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8. 견해의 병통[見病]은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20:11
28. 견해의 병통[見病]은 무엇인가 ?


객승이 질문하였다.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의 산과 대지 · 4대5음(四大五陰) ·
 명암색공(明暗色空) 등은 중생의 시작없이 흘러온
 견해의 병통[見病] 때문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말하는 견해의 병통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풀이를 바랍니다."

나는 손에 쥐었던 부채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 겉모습을 가리켜 부채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두 가지 모두가 바로 견해의 병통입니다."

그리고는 거위가 우는 양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그대는 이 소리를 귀로 듣고 거위의 울음소리라고 말하겠습니까,
 거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견해의 병통임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의 코 · 혀 · 몸 · 의식으로 마주하는 6진(六塵)의 경계까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모두 견해의 병통입니다.
 왜냐하면 옳다고 긍정할 경우 그것은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고,
 아니라 부정하면 단견(斷見)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상견에 떨어지면 세상 산하와 대지가 실제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단견에 빠지면 세상 산하와 대지가 본래부터 없는 것이 됩니다.
 유(有) · 무(無) · 단(斷) · 상(常) · 3세(三世) · 5음(五陰)을 종합하면
 모두 62 종류가 되는데,
 이 62가지가 모두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른바 견(見)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도 견해라 합니다.
 「수능엄경」에 말하기를,
 `6진(六塵)으로 말미암아 지(知)가 발현하고,
 6근(六根)으로 인해서 상(相)이 있게 된다.
 모양[相]과 견해[見]는 본성이 없어 마치 교로(交蘆)와 같다' 고 하였습니다.
 「능엄경」에서는 견(見)이라는 말 대신 지(知)라고 하였읍니다.
 말하자면 6근과 6진에 상대되는 것이 견해입니다.
 이것을 병통이라고 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두 견해가 신령한 근원을 옹색하게 하고,
 법성(法性)을 가로막아 허망을 일으키고,
 생사에 결박되어 결국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범부와 2승(二乘)의 견병(見病)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조사의 문하에서는 산하 · 대지 등이
 자기 묘명진심(妙明眞心) 속의 물건이라고 깨달았던 것조차도 떨쳐버리고,
 유(有) · 무(無)의 2변(二邊)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4구(四句)를 떠나고 100비(百非)를 끊어
 법진(法塵)마저 청정하게 다스리고, 성인의 말씀마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혹 얻은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잊지 못하고 있다면
 이 또한 견해의 병통이라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어찌 산하·대지 등만이겠습니까?
 가령 백천 화장해(華藏海)의 해탈보리장(解脫菩提場)과,
 법계 ·허공 · 성문 · 보살 · 부처의 오묘한 의미와,
 신기(神機)의 삼매와, 어묵동정 등도

 한마디로 말해 모두 견해의 병통입니다."

객승이 말하였다.

"세속에 이 병통을 치료할 자가 있습니까?"

나는 말했다.

"없다고 하면 불법이 영험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의 병통만 더하겠습니다."

객승이 망연해 하므로, 몇 가지 적어 본다.

이치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참뜻은 무엇인가 ?

천하의 이치를 가만히 엿보았더니,
참된 이치는 모두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그럴듯한 말만이 참된 이치를 둘로 보고 동일하게 보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는 본래 모든 알음알이가 쉬어서 한가한 자도 있고
게을러서 한가한 자도 있다.
두 사람은 한가하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알음알이를 쉰 것과 게으른 면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바쁜 것도 똑같다.
도의(道義)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도 있고,
이욕(利欲)을 쫓느라고 바쁜 자도 있다.
바쁜 것은 똑같지만, 도와 이욕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럴듯한 잘못에 깊이 빠져 되돌아올 줄 모르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이 미(迷) · 오(悟) 두 갈래에 빠져
스스로 미혹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몹시 미워하기까지도 한다.
마치 게으른 사람이 죄악의 더러운 수렁에
자기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도의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자신의 사리사욕을 쫓느라 바쁜 자가 자신이 미치고
전도된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모르고,
도리어 마음과 뜻을 쉬어 한가한 사람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이 도의(道義)에 공정하여
백천의 방편으로써 허망하고 잘못된 정(情)을 바로잡고,
한가한 사람 · 바쁜 자들을 그 이치에 계합시켰다.

아아! 사람들의 정(情)이 미망(迷妄)에 빠지고 말았구나.
성인이 `옳다' 고 한 것은 사람들도 `옳다' 고 한다.
그러나 말뿐이고 정작 생각은 고치지 않는다.
또한 성인이 `잘못이다' 고 한 것은 사람들도 또한 `잘못이다' 고 한다.
비록 입으로는 `잘못이다' 고 하지만,
정작 그 정(情)은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겉으로 보아서는 그럴듯 하지만,
진실과 견주어 보면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난다.
이 세상의,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잘못에 관해서는
우선은 덮어두고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가령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 한 말은 깨달은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 사람도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겉보기에는 비슷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 고 하는 말을 두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말은
밝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면서도 흠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의 말은
마치 다섯 가지 색깔로 어떤 물건을 그리는데, 붓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하면 군더더기가 많아지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도 배우는 사람들은 어찌 겉보기만 그럴듯한 이치를 구분하질 않는가?

세상의 모든 그릇은 제각기 용량이 있기 마련이다.
술잔은 술잔으로서의 크기가 있고,
항아리는 항아리로서의 크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릇의 종류를 굳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릇은 용량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바로 몸의 그릇이다.
그러므로 어찌 그것에 크기가 없겠는가?
성인과 범부의 마음은 서로 같고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그 마음이 서로 달라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술잔도 그릇이고 항아리도 그릇이다.
그릇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둘 다 다를 것이 없지만,
크기는 소견의 밝음과 어둠을 따라서 대소가 구별된다.
이것은 마치 개미는 눈을 부릅떠도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사람 역시 아무리 애써도 몇 리 이상은 볼 수 없지만,
신통을 갖춘 성인은 대천세계를
손바닥 안의 아마륵 열매를 보듯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4대해(四大海)같은 눈으로
미진찰토(微塵刹土)를 뚜렷하게 관찰하여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부처님 마음의 크기는 항사세계(恒沙世界)에 두루한다'는
찬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옛날 장무거사(張無居君)는
`사람이 경솔하게 노하고, 쉽게 기뻐하는 것은 도량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량이 크지 못하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는 말이 온화하지 못하고,
말이 온화하지 못하면 분노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다.
심지어는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부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저와 같은 잘못이 불같이 일어나면
화환(禍患)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자가 없다' 고 하였다.

소견의 밝음과 어두움은 학문이 제대로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학문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소견이 어두워 도량이 좁아지고,
학문이 차츰 이루어지는 사람은 소견도 깊어지고 확연해진다.
나아가 학문이 순일(純一)해지면 소견도 넓어져 굉활하게 되며,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면 견해는 분명하고 원만해진다.
성인(聖人)은 학문이 크게 이루어진 자이며,
지인(至人)은 학문이 순일하게 이루어진 자이며,
현인(賢人)은 학문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사람이며,
일반 사람들은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자들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도량은 자연 작아질 뿐이다.

도량이 한번 좁은 데에 빠지면, 넓어지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터럭만큼이라도 이해(利害)를 쫓지 않게 늘 함양(涵養)해야 된다.
그러나 마음의 소견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함양의 도는 힘써 실천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양이란, 첫째 믿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성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소견도 자연 어둡다.
마음의 견문이 소멸되지 못하면 걸핏하면 성인의 말씀을 믿지 않고
천리(天理)를 어기는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3계에는 별다른 법이 없다. 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 고 하신 것이다.
3계는 본래 일삼을 것이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흔들렸을 뿐이다.
실로 이 사실을 믿는다면

대상세계에 시비증애(是非憎肯)를 두지 말아야 한다.
혹 이런 견해를 간직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자기 마음으로 분별한 것이라 한다.
자기의 마음으로 분별했다면 내 마음의 도량도 비좁고 옹색할 뿐이다.
시비를 분별할수록 마음 그릇의 도량은 더욱 좁아진다.
티끌 수처럼 두루한 법계를 우러러 관찰해 보았더니,
하루와 영겁의 세월의 차이가 고작 배가 되는데 그쳤겠는가?
그러나 믿은 후에야 배울 수 있고, 이른 후에야 밝힐 수 있고,
밝힌 후에야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뚜렷하게 밝히고 영원하게 살필 수 있다면,
마음의 도량은 머지않아 허공과 같이 너그러워질 것이다.
비록 삼라만상이라 해도 이것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이같은 도량을 갖추었건만,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학문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시비증애를 달게 여기고 번뇌습기의 세계에 갇혀 있게 되었다.
도인이 어찌 이렇게 마음을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