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31. 요즘은 불법이 왜 옛날처럼 흥성하지 않는가?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20:15
31. 요즘은 불법이 왜 옛날처럼 흥성하지 않는가?


도의 본체는 본래 모두 갖추고 있지만, 지혜와 복은 수행해서 완성된다.
지혜가 이루어지면 본래 타고난 도가 더더욱 밝아지고,
복이 모이면 본래 타고난 도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지혜와 복을 둘다 모두 잃으면 본래 타고난 도라도 숨겨져 버린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옛 사람은 천진하고 순수해서 교화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회가 곳곳에서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얄팍하기 때문에 교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곳곳마다 법회가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이 알음알이가 한 번 뚫렸다 하면 자꾸 깊어져서
 시시비비가 나타 납니다.
 2천여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증애가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요즈음 사람이 그대로 옛 사람이니
 옛 사람의 증애가 그대로 요새 사람들의 증애입니다.
 끝내 털끝만큼 줄지도 늘지도 않았습니다.

 옛날에 법석(法席)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어도 실패한 일이 없었던 까닭은
 법을 주재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인연이 맞았기 때문이며,
 게다가 여기에 감응한 대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당시의 대중들이 천진하고도 순수하여서 교화가 쉬웠던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걸핏하면 마구니의 재앙을 만나
 쇠미한 채 힘을 떨치지 못한 까닭은
 법을 주재하는 자가 복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중생의 성품이 교화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슨 증거로 그런 줄을 알겠습니까?
 금일과 같은 쇠잔은 옛날에도 있었고
 옛날과 같은 번성은 지금에도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인정이 변하고 바뀌어서 그렇게 됐겠습니까!
 실로 복과 인연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내 나름대로 생각했던 바를 말해보겠습니다.
 교화가 잘 되는 까닭은 총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교화가 잘 안되는 것은 우매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총명은 스스로 총명한 것이 아니고
 복이 많아서 그 총명을 북돋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스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복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총명함 때문에 교화가 잘 되는 줄만 알 뿐
 총명의 바탕이 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어리석음 때문에 혼란해진다는 것만 알 뿐,
 그 혼란하게 하는 바탕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복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교화 잘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합니다.
 복이야말로 한결같이 전생의 업에 따라 정해져 있으니,
 금일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의 도가 동쪽으로 온 이후에 도가 높고 덕이 많았던 인재들이
 여러 책 속에 모두 실려 있어 여기저기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몸에 기이한 질병에 걸린 자도 있었고,
 쓸쓸한 산 속으로 은퇴한 자도 있었으며,
 세상에 전혀 종적을 감춘 자도 있었으며,
 세상에 나와 교화를 펴려다가 그만 여러 일에 휘말려
 그 도를 펴지 못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엄하게 방장실(方丈室)에 거처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에워싸기를
 마치 우담화(優曇華)가 출현하듯 하여,
 빛나는 광명이 고금을 두루 비추었던 인재는
 천만 사람 가운데 한 두 사람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체득한 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고,
 다만 복에 차등이 있어서 성쇠의 자취가 동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불렀던 까닭은
 모두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은 과거의 업(業)에 얽매여 그 과보가 다하면 다시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이라면 이 복 많은 것을 뽐내지 않습니다.

 옛날에 전오(冶午)가 `행책(行策)스님은
 복이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고 걱정을 했읍니다.
 그러자 행책스님은 말하기를,
 `참선하는 자는 그저 자기 자신의 안목이 밝지 못할까만을 걱정해야 합니다.
 안목만 밝아진다면, 성승(聖僧)을 홀로 마주하고
 밥을 먹은들(따르는 대중이 없어서) 무엇을 걱정하겠읍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오(冶午)가 그 뜻을 알아듣고는 턱을 끄덕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애석하도다!
 보연(報緣)을 오묘하게 살피고 도의 안목이 홀로 빼어났던 분은
 행책스님 그 어른 뿐이었습니다.
 성쇠의 자취가 어찌 도의 안목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