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칙 법안과 혜초〔法眼答慧超〕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7:33
 

 

 

제7칙 법안과 혜초〔法眼答慧超〕



垂示云,聲前一句,千聖不傳.未曾親覲,如隔大千.設使向聲前辨得,截斷天下人舌頭,亦未是性懆漢.所以道,天不能蓋,地不能載.虛空不能容,日月不能照.無佛處獨稱尊,始較些子.其或未然,於一毫頭上透得,放大光明,七縱八橫,於法自在自由,信手拈來,無有不是.且道,得箇什麽,如此奇特.復云,大衆會麽.從前汗馬無人識,只要重論蓋代功.卽今事且致,雪竇公案,又作麽生.看取下文.



(수시)

언어 이전의 한 구절은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몸소(親히) 만나(깨닫지)보지 못하면 마치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막힌 것과 같다. 설령 언어 이전을 분별하여 천하 사람의 혀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해도 아직 영리한 놈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도 덮지 못하고 땅도 싣지 못하며, 허공도 덮어씌우지 못하고 일월도 비추지 못한다”고 하였다. 부처 없는 곳에서 홀로 존귀하다고 하더라도 겨우 조금 나은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한 터럭 끝에서 확철히 깨달아 큰 광명을 놓으며 종횡무진으로 법에 자유자재하여야만 손닿는 대로 집어들어도 옳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말해보라, 어떻게 해야 이처럼 기특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노니, 대중이여, 알겠느냐? 지난날 (조사들의) 공적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다만 일대(一代)를 뒤덮는 공로를 거듭 의론해야할 것이다. 오늘날의 일(깨닫는 일)은 그만두더라도 설두스님의 공안은 또 어떠한가? 아래 문장을 보아라.

(본칙  :本則 )

혜초(慧超)스님이 법안(885~958)스님에게 여쭈었다. (擧. 僧問法眼.)

-무슨 말을 하는고? 형틀을 짊어지고 진술서를 내미는군. (道什麽.擔枷過狀.)


“제가 스님께 여쭈오니 무엇이 부처입니까?”(慧超咨和尙,如何是佛.)

-무슨 말인고? 눈알이 튀어나온다. (道什麽.眼晴突出.)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혜초니라.” ( (法眼云, 汝是慧超.)

-똑 닮았네, 이빨도 안 들어간다. 몸을 홀딱 빼앗겼구나! (依模脫出.鐵餕餡.就身打劫.)


(평창)

법안스님에게는 줄탁동시(唻啄同時)의 대기(大機)가 있었고, 줄탁동시의 대용(大用)을 갖추었기에 비로소 이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이는 이른바 소리와 빛을 초월하고 큰 자유자재를 얻어, 주거나 빼앗음을 때에 알맞게 하고 죽이고 살리는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니, 참으로 기특하다.

그러나 이 공안을 여러 총림에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자도 적지 않다. 이는, 옛사람은 일언반구(一言半句)를 설법하더라도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아서 곧바로 바른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후인들은 오로지 언구(言句)만을 따져 “혜초가 바로 부처이므로 법안스님이 이처럼 답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꼭 닮았다”하고, 어떤 사람은 “질문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나 무슨 관계가 있으랴? 만일 이같이 이해하면 자기를 저버릴 뿐아니라 또한 옛사람을 크게 욕되게 하는 일이다.

만일 법안스님의 솜씨의 전모를 보려 한다면 한 방 쳐도 머리조차도 돌리지 않는 놈이, 이빨은 칼 숲과 입 속은 시뻘겋고 말 밖에서 귀결처를 알았다 해도 겨우 조금 상응할 수 있다. 만일 하나하나 알음알이를 지으면 온 누리에 부처의 종족을 멸망시킬 놈이다. 다만 혜초(慧超) 선객이 여기에서 깨달았던 것은 그가 평소에 항상 참구 하였기에, 한 마디 말에 마치 통 밑바닥이 빠져버린 것처럼 통한 것이다.

그런데 감원 소임을 보던 현칙(玄則)스님은 법안스님의 회중(會中)에 있으면서도 입실(入室)하여 법문을 청했던 적이 없었다. 하루는 법안스님께서 그에게 물었다.

“측감원아, 어찌하여 입실하지 않느냐?”

“스님은 왜 모르십니까? 저는 청림(靑林)스님의 처소에서 이미 한 소식했습니다.”

“네가 그때에 했던 말을 한 번 나에게 말해 보아라.”

“제가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청림스님은 ’병정동자(丙丁童子)가 불을 구하는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말이다만 네가 잘못 알았을까 염려스럽구나, 다시 한번 설명해 보아라.”

“병정(丙丁)은 불〔火〕에 해당하니 불로써 불을 구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제가 부처인데도 다시 부처를 찾은 것과 같습니다.”

“감원아, 과연 잘못 알았구나.”

측감원은 그 말에 불복하고는 곧장 일어나 홀로 강을 건너가 버렸다. 이에 법안 스님께서   “이 사람이 만일 되돌아온다면 구제할 수 있지만, 오지 않는다면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측감원이 중도에서 스스로 곰곰이 헤아려보니, ‘그 분은 오 백 인을 거느리는 선지식이신데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고 뉘우치고 마침내 되돌아와 다시 참방하자,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나에게 물어라. 내 너를 위해 답하리라.”

측감원이 곧장 “무엇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법안스님은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측감원은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완전히 깨쳤다.

요즈음 어떤 사람은 다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알음알이로 알려고 하니 이는 이른바  “원래 종기가 나지 않았으니 괜히 상처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공안을 오랫동안 참구한 자라면 한 번 말해도 곧바로 요점을 알 것이다. 법안스님의 회하(會下)에서는 이것을 ‘화살과 화살이 서로 맞부딪치는 것처럼 절묘한 공안이다.’라고 한다.

결코 (조종동의) 오위군신(五位君臣)과 (임제종의) 사료간(四料簡)을 쓰지 않고 바로 화살과 화살이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치는 것 같은 절묘한 공안만을 문제시한다. 그의 가풍이 이와 같아서 한 구절을  바로 보면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닫지만, 말에서 찾으며 생각하면 끝내 찾을 수 없다.

법안스님이 (청량사의) 주지가 됨에 오 백 대중을 거느렸으니 이 때에 불법이 크게 흥성하였다. 당시 덕소국사(德韶國師 : 891~972)는 오랜동안 소산(疏山)스님에게 귀의하여 스스로 종지를 얻었다고 생각하여, 이에 소산스님이 하신 평소 의 글과 초상화를 수겁하고 대중을 거느리고 행각하였다. 법안스님의 처소에 갔으나 그 또한 입실하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시켜 대중을 따라서 입실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하루는 법안스님이 법좌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계의 근원되는 한 방울 물입니까?” (如何是曹源一滴水.)

“이것이 조계의 근원되는 한 방울의 물이니라.” 그 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나자, 천태덕소( 天台德韶 : 891--972)스님은 대중 속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서 대뜸 완전히 깨쳤다. 그후 (천태산의) 주지가 되어 법안스님의 법을 잇고는 송(頌)을 지어 바쳤다.


통현봉의 정상은, (通玄峰頂.)

속세가 아니로다. (不是人間.)

마음 밖에 법 없으니, (心外無法.)

보이는 것은 청산뿐이다. (滿目靑山.)


법안스님께서 이를 인가하고서 말씀하셨다.

“이 게송 하나만으로도 나의 종풍을 계승할 만하다. 그대는 훗날 제왕의 존경을 받으리니 나는 그대만 못하다.”

옛사람이 이처럼 깨달았던 것을 살펴보건대 이는 무슨 도리인가? 산승(원오스님 자신)에게 이를 말하도록 하지 말고 모름지기 스스로가 항상 정신을 가다듬어라. 이와 같이 덕소스님을 이해하면 언젠가 저잣거리〔十字街頭〕에서 사람을 지도하는 일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이 법안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물으니, 법안스님은 “네가 혜초”라고 하였다. 이 어찌 서로를 저버린 곳이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운문스님이 “말해줘도 스스로 살펴보지 못하면 곧 잘못되어 버린다. 머뭇거리며 생각하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한 말씀을.

설두스님이 뒤이어 송하여 참으로 뚜렷이 나타냈으니, 거량해 보리라.


(송 : 頌)

강남의 나라에 봄바람 불지 않는데, (江國春風吹不起.)

-온 누리에 어느 곳에서 이런 소식을 얻었는가? 모양이 벌써 드러났구나! (盡大地那裏得這消息. 文彩已彰.)


두견새는 꽃 속 깊은 곳에서 지저귄다. ( 鷓鴣啼在深花裏.)

-지저귄들 무엇하랴. 또 바람에 흩날려 곡조가 바뀌었구나.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喃喃何用.又被風吹別調中.豈有恁麽事.)

세 단계의 거친 폭포를 거슬러 올라 물고기는 용으로 변했건만, ( 三級浪高魚化龍.)

-길 하나를 뚫어 놓았다. 대중을 속이지 말아라! 용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通這一路.莫謾大衆好.踏着龍頭.)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도 밤새워 바가지로 연못 물을 퍼내는구나. (痴人猶戽夜塘水.)

-울타리와 벽을 더듬는구나(바깥 경계에 의지하는 것을 비유). 문턱에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네. 납승에게 (이런 짓들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말뚝을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는 꼴이네.

( 扶籬摸壁.挨門傍戶. 衲僧 有什麽用處.守株待兎.)

(평창)

설두스님은 작가(作家)이다. 씹기 어렵고 투철히 알아차리기 어려운 마디마디 뒤얽힌 옛사람의 말씀을 송(頌)하여 사람들에게 이를 알아차리도록 해주었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설두스님은 법안스님의 요점〔關棙子 : 문빗장〕을 알았으며, 혜초(慧超)스님의 핵심을 알았다. 그는 또한 후인이 법안스님의 말을 잘못 알까 염려하였기에 송을 한 것이다.

이 스님은 이렇게 묻고, 법안스님도 이처럼 대답한 것을 송한 것이 바로 “강남의 나라에 봄바람 불지 않는데 두견새는 꽃 속 깊은 곳에서 지저귄다”이다. 이 두 구절은 같은 이야기이다. 말해보아라, 설두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강서․강남 지방에서 흔히들 이를 두 가지로 이해하여, “강남의 나라에는 봄바람 불지 않는다”는 구절은 “네가 혜초”라는 말에 대한 송으로서, 이 소식은 가령 강남의 나라에는 봄바람마저도 불지 않는다는 뜻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두견새는 꽃 속 깊은 곳에서 지저귄다”는 구절을 놓고는 여러 총림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이 끝없이 많아, 마치 두견새가 꽃 속 깊은 곳에서 지저귀는 것을 송한 것처럼 생각하나, 이와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는 설두스님의 두 구절이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모른 것이다.

참으로 꿰맨 흔적이나 틈이 없이 분명히 그대에게 이르노니, 한마디 한마디 모두 도의 실마리이어서 하늘과 땅을 덮는다. 그가 “무엇이 부처입니까?”하고 묻자, 법안스님은 “네가 혜초”라 하였으며, 설두스님은 “강남의 나라에 봄바람 불지 않는데 두견새는 꽃 속 깊은 곳에서 지저귄다”고 하였다. 이를 깨치면 높은 하늘 위에서 홀로 걷겠지만, 만일 그대가 알음알이를 짓는다면 삼생(三生)내지 육십겁(六十劫)을 허비하게 된다.

설두스님의 셋째․넷째 구절은 너무나 자비스러워 사람을 위해 혜초스님이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친 것을 일시에 설파한 것이다. “세 단계의 거친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 고기가 용으로 변했건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도 밤새워 연못물을 퍼내는구나”라고 했는데, 우문(禹門)의 세 단계 폭포수는 맹진(孟津), 즉 용문(龍門)이다. 우임금이 이를 파서 세 단계로 만들었다. 요즈음도 3월 3일 복사꽃이 필 때면 천지의 기운에 감응하여 용문폭포를 뚫고 올라가는 물고기가 있는데, 머리에 뿔이 솟고 지느러미가 높다랗게 돋아 구름을 치면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반면 이 폭포를 뛰어넘지 못한 물고기는 이마에 푸른 점만 찍혀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언어문자만을 되씹으니, 이는 마치 밤새워 연못물을 퍼내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흡사하다. 물고기는 이미 용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고 하겠다.

나(원오스님)의 은사의 은사이신 백운 수단(白雲守端 :1025--1072 ) 스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송이 있다.

  대광전(大光錢) 한 푼으로 ,(一文大光錢.)

인절미 하나 사들고, (買得箇油자.)

우물우물 뱃속에 넣어두니,( 喫向肚裏了.)

배고픔을 당장에 잊는구나. (當下不聞飢.)


이 송은 지극히 좋기는 하지만 너무나 졸작(拙作)이다. 설두의 송은 지극히 정교한 솜씨로 칼날에 손을 다치지 않았다. 지난날 경장주(慶藏主)는 사람들에게 “세 단계의 거친 폭포를 거슬러 올라 물고기가 용으로 변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즐겨 물었다. 내 또한 반드시 그렇게 묻지는 않지만, 그대에게 묻노니, 용으로 변하여 떠나가 버렸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