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9칙 조주의 사문〔趙州四門〕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7:36
 

제9칙 조주의 사문〔趙州四門〕


(수시)

밝은 거울이 대(臺) 위에 있으니 예쁘고 미운 모습이 저절로 분별되고, 막야(鏌鎁) 보검이 손아귀에 있으니 죽이고 살림을 때에 알맞게 한다. 중국인이 떠나면 오랑캐가 오고, 오랑캐가 오면 중국인이 떠나며, 죽음 곳에서 삶을 얻고 삶 가운데 죽음을 얻는다. 말해보라, 이렇게 되면 어떠한가?

만일 관문(關門)을 꿰뚫는 눈과 몸을 돌릴 곳이 없다면, 여기에 이르러선 분명 어찌할 수 없으리라. 말해보라, 무엇이 관문을 꿰뚫는 눈이며 몸을 돌리는 곳인가?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모습입니까?”

-하북(河北)이라 해도, 하남(河南)이라 해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 있지 않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서문․남문․북문이다.”

-열렸구나.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 침 뱉으려면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까지 퍼다줄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로다. 알겠는가?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평창)

무릇 참선하며 도를 묻는 것은 자기를 밝히려는 것이니, 절대로 언구를 간택해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듣지 못하였는가? 조주스님이 말하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 했다. 또한 듣지 못했는가!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요즈음 선객들이 너댓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입을 떠벌리면서 ‘이것은 재능이 뛰어난 자가 한 말이며 저것은 몸에서 우러나온 말이다’고들 한다”하였다. 이는 옛사람이 방편문에서, 처음 배우는 후학들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므로 부득이 방편으로 언구를 사용하게 되었음을 모른 것이라 하겠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심인(心印)을 딱 전하여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셨는데, 어느 곳에 이같은 언어문자가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언어를 끊어버리고 격식의 바깥〔格外〕에서 참다운 이치〔眞諦〕를 알아차려, 투철하게 벗어날 수 있어야만이 용이 물을 얻고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

오래 참구한 선덕(先德)이 이해는 했지만 꿰뚫지 못했거나, 꿰뚫었어도 분명하지 못하므로 법을 묻는〔請益〕것이다. 만약 투철하게 이해하고 나서 법을 묻는다면 요컨대 언어문자 위에서 뒹굴더라도 막힘이 없어야 한다. 오랜동안 참구한 이가 법을 묻는 것은 도적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격이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언구상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은 “이 일이 만일 언구상에 있다면 삼승(三乘)의 십이분교(十二分敎)인들 어찌 언구가 아니겠는가? 왜 굳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꼭 왔어야만 했을까?”라고 하였다. 분양(汾陽)스님을 열 여덟 가지 물음〔十八問〕가운데 이 물음은 상대방을 시험하는 물음〔驗主門〕또는 탐색하는 물음〔探拔問〕이라 한다.

이 스님이 이런 물음을 한 것도 참으로 기특하며 만일 조주스님이 아니었다면 또한 그에게 대답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은 본분(本分) 있는 선지식이므로 곧 “동문․서문․남문․북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저는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은 본분(本分) 있는 선지식이므로 곧 “동문․서문․남문․북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저는 이러한 조주를 묻지 않았다”고 하니, 조주스님은 “그대는 어떤 조주를 물었느냐?”고 되물었다. 후인들은 이를 “할 일 없는 선〔無事禪〕이 사람을 적잖이 속인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그가 조주스님을 물었는데 조주스님은 “동문․서문․남문․북문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저 조주성(趙州城)을 설명해주었을 뿐이다. 그대가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세 집밖에 안 사는 작은 마을에 사는 촌놈이라도 불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불법을 파멸할 뿐이다. 마치 물고기의 눈알을 구슬에 비하는 것처럼, 닮기는 닮았겠지만 같지는 않다.

산승은 “하남(河南)에 있지 않고 바로 하북(河北)에 있다”고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이는 ‘할 일 있는 선’이냐 ‘할 일 없는 선’이냐? 모름지기 신중히 하여야 된다. 원록공(遠錄公)이 말하였다. “마지막 한 구절(즉 河北에 있다는 말)로 (깨달음의) 관문에 도착했다”하니, 참된 진리는 언어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열흘에 바람 한 번 불고, 닷새에 한 차례 비가 내리며, 나라는 평화롭고 생업을 즐기면서 배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을 태평시절이라 하며, 일삼을 게 없다〔無事〕고 한다. 이는 눈멀어서 “일 없다〔無事〕”고 말한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문빗장을 뚫고 가시나무 숲을 벗어나, 훌훌 벗어버리고 해맑기 그지없어야 참으로 평상한 사람〔平常人〕이 되리라. 그런 사람은 일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며, 종횡무진하여 결코 없다고 집착하거나 있다고 단정지어 버리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본래 일 삼을 것이 조금도 없으니 차가 있으면 차를 마시고 밥이 있으면 밥을 먹는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허망한 말이다. 마치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었다 하고, 깨치지 못했으면서도 깨쳤다”고 한 것과 같다. 원래 투철하게 참구하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이 심(心)․성(性)을 말하고 현묘(玄妙)를 말하는 것을 보고서는 ‘이는 미치광이 말이다. 본래 할 일 없거늘〔無事〕이것이야말로 한 봉사가 여러 봉사를 이끌고 가는 격이라 하겠다’라고 한다. 실로 달마조사가 이 땅에 오지 않았을 때는 뭐 하늘을 땅이라 하고, 산을 물이라 불렀었던가? 무엇 때문에 달마조사가 마침내 서쪽에서 오셨겠는가? 여러 총림에서 법당에 올라가고 방장실에 들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윗줄에서 어떤 사람이 한 말) 모두가 알음알이로 헤아림이다. 만일 알음알이와 헤아리는 정(情)이 없어지면 비로소 투철히 알아차리게 되리라. 만일 알아차려 투철해지면 여전히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옛사람이 “마음은 육근(六根)이요, 법은 육진(六塵)이니 이 두 가지는 거울 위의 흠집과 같다”하였으니, 이러한 지위에 이르면 자연히 훌훌 벗어버리고 해맑기 그지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지극한 법으로 말해보면, 이 또한 흔들림이 없는 확실한 경지는 아니다.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흔히 잘못 이해하고, 할 일 없는 경계에 있으면서 부처님께도 예배하지 않고, 향도 사르지 않으니, 이는 비슷하기는 비슷하지만 완벽하게 틀리는 걸 어찌하랴. 질문해오는 걸 보면 지극한 경지인 듯하지만 한번 내질러버리면 여러 갈래로 산산조각이 난다. 텅 빈 뱃속에 뽐내는 마음으로 섣달 그믐(죽음)에 이르러서는 손을 번갈아가며 가슴을 치지만 때는 늦었다.

그 스님이 이처럼 묻고, 조주스님은 이처럼 답하였다. 말해보라,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이렇게도 안되고 저렇게도 안되니 결국 어떻게 할까? 이것들이 난처한 점이다. 그 때문에 설두스님은 이를 들어 정면으로 내보여줬던 것이다.

하루는 조주스님이 앉아 있는데 시자가 “대왕이 온다”고 아뢰자, 조주스님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면서 “대왕마마! 만수무강하소서”하였다. 시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화상이시어”라고 하니, “왔다고 또 말하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렇게까지 참구하고 이렇게 알아차리면 참으로 기특하다.

혜남선사(慧南禪師)가 염(拈)하였다. “시자는 손님이 왔다고 아뢸 줄만 알았지, 자신이 제왕의 경지에 있다는 것을 몰랐으며, 조주스님은 (번뇌의) 풀 속에 들어가 사람을 찾느라고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줄을 몰랐다.”

진실한 곳을 여러분들은 아는가?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아라.


(송)

어구 속에 기연(機緣)을 드러내어 그대로 치고 들어오니

-메아리 친다. 물고기가 헤엄치면 흙탕물이 일어난다. 조주스님을 비방하지 말라!


삭가라(爍迦羅)의 눈엔 가는 티끌도 없구나.

-모래와 흙을 뿌렸구나. 조주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 하늘을 휘젓고 땅을 더듬어 무엇을 찾느냐?


동․서․남․북 문이 마주 보고 있는데

-열렸다. 뭐 그리 문이 많겠는가? 조주성을 등지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마주 철퇴를 휘둘러 쳐부셔도 열리지 않네.

-그대는 철퇴를 휘두를 줄 모른다. 열렸다.

(평창)

조주스님이 상황에 알맞게 대처함이 마치 금강왕 보검 같아서 머뭇거리면 당장에 그대의 머리를 잘라버리기도 한다. 언제나 대뜸 그 자리에서 그의 눈알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이 스님이 감히 호랑이 수염을 만지며 물음을 던지니, 이는 마치 괜스레 없는 일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허나 구절 속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을 어찌하랴. 그가 이미 문제의 핵심을 드러냈으므로 조주스님도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솜씨를 드러내어 답한 것이지, 그가 괜히 일부러 이처럼 한 것은 아니다. 확철히 깨친 사람이었으므로 자연히 딱 맞추니, 마치 (일부러) 안배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듣지 못했느냐? 어느 외도(外道)가 손아귀에 참새를 감추고서 세존께 “말씀해 보십시오. 제 손에 있는 참새는 죽었겠습니까? 살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세존께서 드디어 문지방에 올라서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말해보라, 내가 나가겠느냐, 들어오겠느냐?” (어떤 책에는 세존께서 주먹을 불끈 쥐어 들고서 손을 펴겠느냐 쥐겠느냐고 하였다고 씌어 있다) 외도는 말을 못하고 예배를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곧 이 공안과 같다.

옛사람은 원래 혈맥이 막히지 않아서 “물음은 답에 있으며  답은 물음에 있다”고 했다. 설두스님은 이처럼 투철히 알아차려 대뜸 이르기를 “어구 속에 기연을 드러내어 그대로 치고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어구 속에 기연을 드러냈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잇는 듯하다. 즉 사람〔人〕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경계〔境〕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조주스님은 한 실오라기만큼도 까딱하지 않고 곧 그에게 “동에는 동문, 서에는 서문,  남에는 남문, 북에는 북문”이라 하였다.

“삭가라의 눈에는 가는 티끌도 없다”는 송은, 조주스님이 사람〔人〕과 경계〔境〕를 한꺼번에 빼앗아버리고 어구 속에서 기연을 드러내어 그에게 답한 것이다. 이를 두고 “기연도 있고, 경계도 있다”고 한다. 꿈쩍하기만 해도 곧 그의 속셈을 비춰 보았지만, 이와 같지 못한다면 그의 질문을 막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삭가라(爍迦羅)의 눈”이란 범어(梵語)이며, 여기 말로는 견고한 눈, 또는 금강안(金剛眼)이라 하기도 한다. 걸림이 없이 비춰보기 때문에 천리밖에 있는 가는 깃털 끝을 또한 삿됨과 올바름을 딱 구별짓고, 득실을 분별하고, 기연의 마땅함을 구별하며, 길흉울 식별하기도 한다.

설두스님은 “동․서․남․북 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마구 철퇴를 휘둘러 부셔도 열리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한없이 철퇴를 휘둘렀는데 무슨 까닭에 활짝 열리지 않았을까? 이는 설두스님의 견처가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어떻게 하면 이 문을 열 수 있을까? 바라건대 자세히 참구하여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