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1칙 지문의 연꽃〔智門蓮花〕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39
 

 

 

제21칙 지문의 연꽃〔智門蓮花〕

(수시)

법당(法幢)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일으키니 비단 위에 꽃을 더함이요, 속박을 벗고 짐을 내려놓으니 태평시절이로다. 혹틀 밖의 구절〔格外句〕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하나만을 말하여도 나머지 셋을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여전히 엎드려 판결 처분을 받도록 하라.


(본칙)

어떤 스님이 지문(智門 : 설두스님의 스승)스님에게 물었다.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의심할 필요도 없는데 더듬고 있네. (쓸데없이)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 어디에서 이런 것을 끄집어냈는가?


“연꽃이니라.”

-(꽃잎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이군. 온 천하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군.


“물 위에 나온 뒤에는 어떠합니까?”

-귀신의 굴속에서 살림살이하지 말라. 또 그 짓거리냐?

“연잎마저 나왔군!”

-유주(幽州 : 북쪽 지방)는 그래도 괜찮은데 가장 괴로운 것은 강남이다. 이러쿵저러쿵하는 (갈피를 못 잡네) 온 천하 사람을 웃기는군.


(평창)

만일 지문스님이 기연에 따라 사람을 제접하느라고 그랬다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지만, 뭇 지견을 끊어버린 경지와는 천리 만리 동떨어진 일이다. 말해보라, 이 연꽃이 물에서 나왔을 때와 나오지 않았을 때가 같은가 다른가를. 만일 이렇게 알아차린다면 그대에게 깨달은 곳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를 같다고 말한다면 불성(佛性)을 애매하게 하고 진여(眞如)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를 다르다고 말한다면 마음과 경계〔心境〕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로 치달리는 길 위에 떨어진다면 언제 쉴〔休歇〕 기약이 있겠는가? 말해보라, 옛사람의 뜻은 어떠했는가를.

그들은 실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들이 없었다. 그래서 투자(投子)스님은 “그대들은 이름〔名〕, 말〔言〕, 법수〔數〕, 글귀〔句〕에 집착하지 말라. 모든 일을 깨친다면 자연히 집착하지 않게 되어 곧 수행상의 잡다한 단계와 순서가 없어진다. 그대가 모든 법을 주무를지언정 모든 법이 그대를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 본래 얻고 잃음과 꿈과 허깨비 같은 많은 명목(名目)들이 없어, 그 명자(名字)를 억지로 세울 수 없는데,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묻기에 말이 생기는 것이니 그대들이 묻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이란 모두 그대들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사람(백장스님)은 “불성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상황 속에서 일어났던 인연을 살펴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왜 듣지도 못하였는가? 운문스님은 거량하기를 “어떤 스님이 영운(靈雲)스님에게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묻자, 영운스님은 불자(拂子)를 곧추세웠다. 그 스님이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뒤에는 어떠하냐’고 하자, 영운스님은 또다시 불자를 곧추세웠다”라고 하였다.

운문스님은 여기에 대하여 착어하며 말하였다.

“처음에 한 것은 적절했지만 그 다음에 한 행동은 적절치 못하다.”

또다시 말하였다.

“(연꽃이) ‘나왔다’ 또는 ‘안 나왔다’라는 말을 안 했더라면, 그대가 질문을 할 짬인들 있었겠느냐?”

옛사람의 일문일답은 기연과 상황에 딱 들어맞아서 잡다한게 없었다. 그대가 언구(言句)에서 찾는다면 끝내 관계가 없다. 그대가 말에서 말을 깨치고, 뜻에서 뜻을 깨치며, 기연에서 기연을 깨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가롭게 된다면 지문이 대답한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우두(牛頭)스님이 사조(四祖)스님을 뵙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반석(斑石)에 혼돈(混沌)이 나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부모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운문스님은 이에 대해 말하였다.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는 한가지 일일뿐이다. 옳고 그름도 없고, 잘잘못도 없으며,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도 없다.”

옛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방편으로써) 한 가닥 가는 길을 마련하여 사람들을 들이기도 하고 내기도 하였으나, 깨치지 못한자들은 울타리나 벽을 더듬어서 앞길을 가기도 하고, 풀이나 나무에 빙의(憑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혹 그것이 싹없어지면 아득하고 황량한 곳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도를 깨친 사람은 하루종일 한 물건도 의지하지 않는다. 비록 한 물건도 의지하지 않지만 만일 한 기연과 한 경계를 드러내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 스님이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묻자, 지문스님은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묻자, 지문스님은 “연꽃”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는 물음을 막아버린 답으로서 참으로 기특하다 하겠다. 총림에서는 모두가 이를 “잘못된 말”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느냐? 암두(巖頭)스님이 말하기를 “입을 열기 이전을 항상 귀하게 여겨야만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고 하였다. 옛사람이 기연을 드러낸 그곳은 벌써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요즈음 학자들은 옛사람이 기연을 드러낸 그곳은 벌써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요즈음 학자들은 옛사람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연꽃이 물에서 나왔느냐 나오지 않았느냐’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이와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지문스님에게 “어떤 것이 반야(般若)의 본체냐”고 하자, 지문스님은 “조개가 밝은 달빛을 받아 진주를 만든다”고 대답하였으며, “어떤 것이 반야의 작용이냐”고 묻자 지문은 “토끼가 달빛을 받아 새끼를 배었다”고 하였다. 그의 이같은 대답을 살펴보면 천하 사람들이 그의 말의 맥락을 찾으려 해도 찾질 못한다.

어떤 사람이 협산(夾山 : 원오스님 자신)에게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법당 앞에 서 있는 기둥〔露柱〕과 등불〔燈籠〕이니라”고 대답하리라. 말해보라, 이는 “연꽃”이라 대답한 것과 같은가 다른가를. “연꽃이 물에서 나온 뒤에는 어떠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지팡이 끝엔 일월(日月)을 둘러메고 있으나 발은 깊은 진흙 속에 빠져있구나!”라고 말하리라. 그대들은 말해보라, 옳은가 그른가를. 언어문자로 사량분별하지 말라. 설두스님이 각별한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의 알음알이를 타파하고 송을 하였다.

(송)

(지문스님이) 연꽃 연잎을 그대에게 알려주었지만,

-노파심이 간절하군. 고스란히 드러난 공안이군. 모양이 이미 드러났다.

물위로 나올 때는 나오지 않을 때와 (비교해서) 어떠냐?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 (나올 때와 나오지 않을 때를) 나누는 게 좋다. 흐리멍텅해서는 안 된다.

강북․강남의 선지식들에게 묻고 물어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선지식에게 물어서 무엇 하려고……. 괜히 네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지.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하는구나.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원래부터 그대가 의심하고서는 의심을 쉬지 못하는구나.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알았느냐?”


(평창)

지문스님은 본디 절강(浙江)사람이다. 멀리 사천(四川) 땅으로 가서 향림(香林)스님을 참방했다. 도를 깨친 후 돌아와 수주(隋州)의 지문(智門)에 주석하였다. 설두스님은 그의 적자(嫡子)이다. 현묘의 극치를 잘 보았기에 곧바로 “(지문스님이) 연꽃 연잎을 그대에게 알려주었구나. 물위로 나올 때는 나오지 않을 때와 (비교해서) 어떠냐?”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대뜸 알아야 할 것이다.

산승에게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물으면 “노주와 등롱이다”고 대답하겠으며, “물위에 나왔을 때는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지팡이 끝엔 일월을 둘러메었으나 발은 깊은 진흙 속에 빠졌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대는 언어문자로 사량분별하여 착각하지 말라. 요새 사람들처럼 언구나 되씹는 자들은 언제 깨칠 기한이 있겠는가? 그대는 말해보라. 연꽃이 물위에 나왔을 때는 어떤 상황이며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상황인가? 여기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대가 직접 지문(의본뜻)을 알았다고 인정하리라.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그대가 알아차리질 못했다면 강남․강북의 선지식들에게 묻고 물어”라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말한 뜻은 너희가 강북이나 강남을 찾아가 큰스님들에게 물에서 나왔을 때와 나오지 않았을 때를 물어, 강남에서 (남의 말을 들어) 두 구절을 더하고 강북에서 (남의 말을 들어) 두 구절을 더하여 한겹한겹 거듭한다면 더더욱 의심만 늘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말해보라, 어느 때에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이는 마치 의심 많은 여우가 빙판 위를 가면서 물소리를 들어본 후 물소리가 울리지 않아야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참학(參學)하는 사람이 여우처럼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야 어느 시절에 뚜렷한 경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