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칙 구지의 한 손가락〔俱胝一指〕
(수시)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 그런데 한 티끌도 일어나지 않고, 꽃 한 송이도 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므로 “한 타래의 실을 자를 때 단 한 번 끊으면 모두가 끊어지고, 한 타래의 실을 물들임에 단 한 번 물들이면 모두 물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제 언어문자를 끊어버리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보배를 드러낸다면 이리저리 두루 응하고, 앞과 뒤에 차별이 없어 각각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아래 문장을 보아라.
(본칙)
구지(俱胝)스님은 묻기만 하면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 둔한 스님아!
오로지 하나의 손가락만을 세웠다.
-이 늙은이도 천하 사람들의 혀를 꼼짝 못 하게 하는군. 날씨가 뜨거우면 온 천지가 모드 뜨겁고 차가우면 온 천지가 모두 차가웁다. 천하 사람들의 혀를 바꾸어 놓았구나.
(평창)
만일 손가락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한다면 구지(俱胝)스님을 저버린 것이며, 손가락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지 않는다면 무쇠로 주조한 것과 같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리라. 알아도 이와 같고 몰라도 이와 같으며, 높아도 이와 같고, 낮아도 이와 같으며, 옳아도 이와 같고, 낮아도 이와 같으며, 옳아도 이와 같고 그르다 하여도 이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티끌이 일자마자 대지는 전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온 세계가 열리고, 사자의 한 털끝에 백억개의 사자가 나타난다”라고 했다.
원명(原明)스님은 말하기를, “차가우면 온 천지가 모두 차가웁고, 뜨거우면 온 천지가 모두 뜨겁다”고 하였다. 산하대지는 아래로는 황천(黃泉)에 통하고, 삼라만상은 위로는 하늘에 통한다. 말해보라, 어떠한 물건이 이처럼 기괴(奇怪)한가를. 이를 안다면 조금도 힘들일 필요가 없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을 질식시킬 것이다.
구지스님은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이다. 처음 암자에 주석하고 있을 때, 실제(實際)라는 한 비구니가 구지스님의 암자에 이르러 곧바로 들어오더니, 삿갓도 벗지 않고 지팡이를 든 채로 선상(禪牀)을 세 바퀴 돌면서 말하였다.
“말할 수 있다면 삿갓을 벗겠오.”
이처럼 세 차례 질문하였으나 구지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에 비구니가 떠나가려 하자 구지스님은 말하였다.
“날씨가 어두워지니 하룻밤 머물도록 하라.”
“말할 수 있다면 하룻밤 쉬어가지요.”
구지스님이 또다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비구가 바로 떠나버리니, 구지스님은 탄식하였다.
“나는 장부의 모습을 가지고서도 장부의 기상이 없구나.”
마침내 분발하여 ‘이 일’을 밝히고자 암자를 버리고 여러 총림의 선지식을 참방하여 법문을 청하려고 (신변을) 정리하여 행각을 하리라고 다짐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그에게 고하였다.
“이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내일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와서 스님을 위하여 설법하실 것이니, 부디 떠나지 마시오.”
과연 청룡(靑龍)스님이 그 이튿날 암자에 이르렀다. 구지스님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하였다. 천룡스님이 한 손가락을 세워 그에게 보여주자, 구지스님은 갑자기 완전히 깨쳤다. 이는 당시 그가 정중하고 한결같이 참구〔專注〕하였기 때문에 통의 밑바닥이 쉽게 빠진 것이다. 그후로는 묻기만 하면 오직 손가락을 세워 보일 뿐이었다.
장경(長慶) : 859~932)스님은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소용없다”하였으며, 현사(玄沙 : 835~908)스님은 “내 그 당시에 그 꼴을 보았더라면 손가락을 꺾어버렸을 것이다”하였으며, 현각(玄覺)스님은 “현사스님이 이같이 말한 뜻은 무엇인가?”하였으며, 운거 석(雲居錫)스님은 “현사스님이 이처럼 말했던 것은 그를 긍정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를 긍정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의 손가락을 꺾어버렸으리라고 말했으며, 그렇지 않다면 구지스님의 허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하였으며, 선조산(先曹山 : 840~901)스님은 “구지스님이 알아차린 것은 거칠다. 그것은 한 기틀, 한 경계만을 알았을 뿐, 하나같이 손뼉을 친 것이다. 저 서원(西園)1)스님은 “기괴하군”하였으며, 현각스님은 또다시 말하였다. “말해보라, 구지스님은 깨달았을까? 깨쳤다면 무슨 까닭에 그가 안 것이라곤 거칠다고 했으며, 깨치지 못했다면 왜 또한 평생토록 한 손가락으로 선(禪)을 써도 다 쓰지 못했다고 말했을까? 말해보라, 조산스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당시에 구지스님은 실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그가 깨친 뒤엔 묻기만 하면 한 손가락을 세웠다. 무엇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묶으려 해도 묶지 못하며, 그를 쳐부수려 해도 깨뜨리지 못했을까? 그대들이 만일 손가락 그 자체를 가지고 알려고 한다면 결코 옛사람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선(禪)은 참구하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렵다. 요즈음 사람들은 묻기만 하면 손가락을 세우고 주먹을 불끈 드는데, 이는 망상분별일뿐, 모름지기 뼛속에 사무친 투철한 견해가 있어야만 한다.
구지스님의 암자에 한 동자가 있었는데 바깥에서 어느 사람에게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지도하시느냐?”라는 질문을 받자, 손가락을 일으켜 세웠다. 동자가 되돌아와 자기가 한 행동을 스님께 말씀드렸다. 구지스님은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니,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스님이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이에 구지스님이 문득 손가락을 곧추세우니 동자는 훤히 깨치게 되었다. 말해보라, 동자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를.
구지스님은 입적하는 즈음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룡스님의 한 손가락의 선(禪)을 깨치고서 평생토록 사용했으나 다 쓰지 못하였다. 알겠느냐?”하고, 손가락을 곧추세운 후 탈연히 입적하셨다.
후에 애꾸는 명초 용(明超龍)이 국태 심(國泰深) 사숙(師叔)에게 “옛사람이 이르기를 ‘구지스님은 단지 세 줄〔三行〕밖에 주문을 못 외웠는데도 그의 명성은 많은 사람들보다도 뛰어났다’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그가 외운 세 줄의 주문〔三行呪〕입니까?”라고 묻자, 심사숙(深師叔) 또한 한 손가락을 세우자 명초스님은 말하였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먼 타국에서 온 과주객(瓜州客)을 알 수 있었겠는가?” 말해보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비마(秘魔 : 817~888)스님은 일생 동안 나무집게 하나만 사용하였고 타지(打地)스님은 묻기만 하면 한 차례 땅을 내리쳤을 뿐이다. 그후 다른 사람이 그의 몸뚱이를 숨겨버리고 “무엇이 부처이냐?”고 묻자, 그는 입을 쩍 벌렸는데, 이 역시 일생토록 실컷 쓰더라도 모두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무업(無業 : 759~820)스님은 말하였다.
“조사께서 이 땅에 대승이 근기(根器)가 있음을 보시고 오로지 홑으로 심인(心印)을 전하여 미혹한 길을 열러주셨다. 이를 체득하는 데에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범부와 성인과는 관계없다. 모름지기 속 비고 많은 것은, 적으나마 알찬 것만 못하다. 대장부 녀석이 지금 이제 대뜸 쉬고서〔休歇〕바깥의 모든 인연을 단박에 끊어버리면, 생사의 흐름을 초월하여 상것의 모습〔常格〕을 완전히 벗어나, 비록 따르는 무리가 많기를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리라.”
무업스님은 일생 동안 혹 누가 묻기만 하면 “망상을 피우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르기를 “한 곳을 꿰뚫으면 천 곳 만 곳을 일시에 뚫고, 한 기연을 밝히면 천 기연 만 기연이 일시에 밝혀진다”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이 못하고 그저 멋대로 알음알이를 지을 뿐, 저 옛사람들이 깨쳤던 요긴한 곳을 알지 못한다.
이 원인이란 기관(機關)을 전환(轉換)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무엇 때문에 한 손가락만을 사용했겠는가?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은 구지스님이 여기에 이르러 심오하고 은밀하게 학인을 제접한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힘쓰는 것은 그만두고 싶은가? 그렇다면 저 원명스님이 말했던 “날씨가 차가우면 온 천지가 차가웁고, 날씨가 뜨거우면 온 천지가 뜨겁다”고 했던 말에 견주어보아라!
산하대지는 위로 통하여 고고하게 높으며, 삼라만상은 아래고 사무쳐 준험(峻險)하다. 어느 곳에서 한 손가락의 선(禪)을 얻을까?
(송)
구지스님이 하신 응대를 나는 좋아하네.
-끼리끼리 노는구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어야 알 것이다. 이는 한 기틀 한 경계에 매이는 꼴을 면치 못했다.
텅 빈 우주에 (구지스님 말고) 또한 누가 있으랴.
-한 명 두 명, 또 다시 한 명이 있다. 쳐죽여야 한다.
일찍이 푸른 바다에 나무를 띄어
-모두가 ‘이것’이다. 옳긴 옳지만 지나치게 높다. 떨어진 짚신짝인데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파도치는 밤에 눈먼 거북을 제접하노라.
-하늘을 휘젓고 땅을 더듬는들 언제 끝날 기약이 있으랴. 제접해서 무엇에 쓸려고? 법령을 따라 처벌하라. 부처 없는 세계(지옥)로 달려가 (설두)스님을 제접하리. 눈먼 놈이구나.
(평창)
설두스님은 사육변려문(四六骿儷文)에 능하여 막힘없이 구사하였다. 까다롭거나 기특한 공안이 있으면 지나칠 정도로 송(頌)하기를 좋아하였다. “구지스님이 하신 응대를 나는 좋아하네. 텅 빈 우주에 또한 누가 있으랴”하였다. 요즈음의 학인들은 옛사람을 비평할 때에 때로는 손님〔賓〕으로 때로는 주인〔主〕으로 일문일답하여 정면에서 드러내어 학인을 지도하였다. 그리고는 “구지스님의 대응은 참 훌륭하다”고 한다. 말해보라, 설두스님이 그를 사랑한 것이 어느 점인가? 천지가 개벽한 이후 또한 누가 있었겠는가? 오로지 구지 늙은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만일 다를 사람이었다면 뒤죽박죽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구지 늙은이만이 한 손가락을 사용하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삿되게 이해하고서 “산하대지도 비고, 사람도 비고, 법도 비어서, 설령 우주가 일시에 텅 빈다 하여도 오직 구지 늙은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고 말들 하지만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일찍이 푸른 바다에 나무를 띄어”라는 말은 요즈음 말하는 “생사의 바다”이다. 중생들은 업보의 바다〔業海〕를 오락가락하면서 자신을 밝히지 못하여 이를 벗어날 기약이 없다.
구지 늙은이가 자비로써 중생을 제접하여 생사의 바다 가운데에서 한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제접하였다. 이는 마치 나무를 띄워 눈먼 거북을 제접하는 것처럼 중생으로 하여금 피안(彼岸)에 이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파도치는 밤에 눈먼 거북을 제접했다”는 것은「법화경(法華經)」의 “마치 외눈박이 거북이 떠내려오는 나무 구멍을 만나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하겠다.
큰 선지식(善知識)은 용이나 범 같은 놈을 제접하여, 그로 하여금 부처님이 계신 세계에서는 빈(賓)과 주(主)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부처님 없는 세계에서는 배를 대는 나루터마저도 싹 끊어버린다. 눈먼 거북을 제접해서 무엇에 쓰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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