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7칙 가을바람 때문에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다〔體露金風〕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48
 

 

 

제27칙 가을바람 때문에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다〔體露金風〕


(수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하고, 하나를 말하면 셋을 알아차리며. 토끼를 보고 매를 날리고, 바람을 타고 불을 놓는다. 남을 위해 설법을 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호랑이 굴 속에 들어갔을 때는 어떻게 할까?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자.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

-이는 무슨 상황일까? 집안이 망하자 사람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람이 뿔뿔이 흩어지니 집안이 망하는구나.


“가을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

-하늘과 땅을 떠받들고 버티며, 못을 끊고 무쇠를 자른다. 말끔히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맑기만 하다. 한 번에 창공을 올라가는구나.


(평창)

만일 여기에서 알면 비로소 운문스님이 수행인을 지도하는 뜻을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여전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과 같이 눈멀고 귀 먹을 뿐이다. 어느 누가 이러한 경계에 이르렀을까? 말해보라, 운문스님이 그 스님에게 대답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화답하여 노래한 것일까? 만일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이라 한다면 저울 눈금을 잘못 읽은 것이요, 그에게 화답하여 노래하였다 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지 않다면 결국 어떻게 될까? 그대가 투철하게 알았다면 납승의 코를 살짝이라도 비틀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여전히 귀신의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대저 으뜸가는 진리를 펴려면, 그것을 온몸에 짊어지고 눈썹이 빠지는 것을 아끼지 말고, 호랑이 아가리 속에 몸을 누이고 그가 하는 대로 맡겨두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못 한다면 어떻게 남을 지도할 수 있겠는가? 이 스님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건대 참으로 고준한 경지라 하겠다. 만일 일상적인 일로 보자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스님처럼 보이겠지만, 납승의 문하에 의거하여 급소를 본다면 오묘한 경지가 있다.

말해보라.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지는 것은 어느 사람의 경계일까? 이는 열 여덟 가지 물음〔十八問〕가운데, 주인을 분별하는 물음〔辨主問〕, 또는 상황에 견주어 묻는 물음〔借事問〕이라고 한다. 운문스님이 한 실오라기 만큼도 꼼짝하지 않고 그에게 “가을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고 한 대답은 매우 오묘하며, 또한 그 물음을 저버리지도 않았다. 생각컨대, 그 스님의 질문에도 안목이 있었고, 그에 대한 대답 또한 명확하였다.

옛사람은 “간절히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물음을 가지고 묻지를 말라”고 말하였다. 만일 서로 통하는 사람이라면 말하자마자 바로 귀착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운문스님의 말에 매여서 찾는다면 벌써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운문스님의 말은 자칫하면 사람의 알음알이를 일으키기 쉽게 한다. 만일 이를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우리 선종의 자손을 잃게 된다.

운문스님은 이처럼 도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도적을 뒤쫓기를 좋아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은 말은.

“어떤 것이 사량(思量)할 수 없는 곳입니까?”

“식정(識情)으로 헤아리기는 어렵느니라.”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

“가을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

이 구절은 참으로 핵심 되는 길목을 꽉 쥐어서 범부도 성인도 통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를 들어 셋을 밝히고, 셋을 들어 하나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그대가 세 구절〔三句〕속에서 이를 찾으면 뒤통수의 급소에 박힌 화살을 뽑을 수 있다. 그 한 구절 속에 반드시 세 구절, 즉 천지를 덮은 구절〔函蓋乾坤句〕과 파도와 물결을 따르는 구절〔隨波逐浪句〕, 많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구절〔裁斷衆流句〕을 갖춰야만이 훌륭한 것이다. 말해보라, 운문스님이 삼구(三句) 가운데 어느 구절로 사람을 지도했는가? 이를 맞혀보아라.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물음 속에 종지가 있고

-상대를 잘 알아서, 화살을 헛되이 쏘진 않았군.


대답 역시 그렇다.

-어찌 서로 다르랴. 치는 대로 종소리가 울려나오는 것과 같다. 헛되이 굴지 말라.


한 화살이 삼구(三句)를 분별하고

-상․중․하로다. 지금은 몇째 구에 해당할까? 모름지기 삼구(三句) 밖에서 알아야 한다.


저 멀리 허공을 난다.

-맞혔다. 지나갔다. 척척 들어맞는군. 화살이 신라를 지나가 버렸다.


너른 들녘엔 쌀쌀한 회오리 바람 을씨년스럽고

-하늘에 가득, 땅에 가득하여라. 소름이 끼쳐 털이 바짝바짝 서는 것을 알겠느냐? 용서해주었다.


높은 하늘에선 가랑비 부슬부슬 내린다.

바람은 끝이 없고 물은 질펀하다. 머리 위엔 바람이 끝이 없고 발 아래엔 물이 질펀하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소림에 오래 앉아 돌아가지 않는 길손이

-반드시 어줍잖은 녀석이 있다. 남들에게 누를 끼쳤다. 황하수에다 던져버려라.


웅이산(熊耳山) 한 모퉁이 숲에 고요히 기대어 있는 것을.

-눈을 떠도 집착이며 눈을 감아도 집착이다. 귀신의 굴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구나. 눈멀고 귀 먹었으니, 누가 이 경계에 이르렀을까? 그대의 앞니가 부서질지 모르니 조심하게.


(평창)

옛사람의 말에 “말을 들으면 모름지기 종지를 알아야 하며 멋대로 원칙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있다. 옛사람은 말을 헛되이 하지 않은 까닭에, 이르기를 “이것(본분사)을 물을 경우에는 이 질문의 좋고 나쁜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높은 행위인지, 낮은 행위인지를 모르며 청정과 더러움을 모른 채, 멋대로 입을 벌려 정신없이 지껄인다면 어떻게 중생을 돕고 제도할 수 있겠는가? 말은 반드시 무쇠를 단련하는 집게와 같아야 하며, 낚시와 자물쇠처럼 끊기지 않고 한결같아야 할 것이다.

이 스님이 물은 곳에는 종지가 있고, 운문스님이 대답한 곳 또한 마찬가지이다. 운문스님은 평소에 삼구(三句)로써 사람을 제접하였는데, 이것이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이 공안에 대한 설두스님의 송은 대룡(大龍)스님의 공안(제82칙)에 대한 송과 같은 것이다. “한 화살이 삼구를 분별하고”라는 구절은 한 구절 속에 삼구가 갖춰져 있는데, 이를 확실히 알아차리면 삼구 밖으로 뚫고 나가리라. “한 화살〔鏃〕이 삼구를 분별하고, 저 멀리 허공으로 난다”에서 촉(鏃)이란 화살촉을 말한다. 저 멀리 쏘았으니, 재빨리 보아야 한다. 이를 또렷이 볼 수 있다면 한 구절에 대천사계(大千沙界)가 널려 있으리라.

이렇게 송을 하고서도 설두스님에겐 남은 재간이 있어 송을 계속했다. “너른 들녘엔 쌀쌀한 회오리 바람 을씨년스럽고, 높은 하늘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린다.” 말해보라. 이는 마음〔心〕일까, 경계〔境〕일까? 보이지 않음〔玄〕일까, 오묘함〔妙〕일까?

옛사람의 말에 “모든 법이란 숨어 있지 않고 고금에 항상 드러나 있다”라는 것이 있다. 스님이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때면 어떠하냐”고 묻자, 운문스님은 “가을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의 뜻은 이 하나의 경계를 말했을 뿐이다. ‘지금 눈앞에 바람이 쌩쌩거리니, 동남풍이 아니라면 서북풍일 것이다’라고 단박에 척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다시 선도(禪道)가 어떻다는 둥 알음알이를 지으면 전혀 관계가 없다.

“그대가 보지 못하였는가? 소림에 오래 앉아 돌아가지 않은 길손이 있어”라 하였는데, 달마가 서천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때에 9년간 면벽(面壁)하였으니 고요하고 쓸쓸한 경지였다.

말해보라. 이것이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가을 바람에 완전히 드러난 것일까?

만일 여기에서 고금의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다 없애고 건곤대지(乾坤大地)를 한 덩어리로 만든다면 운문․설두스님이 분명하게 사람을 지도했던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웅이산 한 모퉁이 숲에 고요히 기대어 있다”고 하였는데, 웅이산이란 곧 서경(西京)의 숭산 소림사이다. 앞 산에도 천떨기 만떨기 우거지고 뒷산에도 천떨기 만떨기 우거져 있다. 그대들은 어느 곳에서 그를 찾겠는가? 이 또한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끌고 가는 것처럼 자취를 남기는 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