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칙 대수의 겁이 다해 타오른 불길〔大隋劫火〕
(수시)
물고기가 헤엄치면 흙탕물이 일어나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또렷이 주(主)․빈(賓)을 분별하고, 환하게 흑백을 구분한다. 이는 곧 밝은 거울이 대에 걸려 있는 듯하고, 밝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는 듯하다. 한나라 사람이 고을 앞에 서면 한나라 사람이 비치고, 오랑캐가 서면 오랑캐가 비친다. 소리도 나타나고 모습도 비친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이런가?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대수(大隋 : 834~919)스님에게 물었다.
“겁화(劫火)가 훨훨 타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모두 무너지는데 ‘이것’도 따라서 무너집니까?”
-이것은 무슨 물건일까? 이 한 구절의 의미는 천하의 납승들도 찾지 못한다. 미리 긁어놓고 가렵기를 기다리는구나.
“무너지느니라.”
-구멍 없는 철추를 정면으로 던졌구나. 콧구멍(자신의 존재 기반)을 빼앗겼다. 입을 열기 이전에 속셈을 꿰뚫어보았다.
“그렇다면 그를 따라가겠습니다.”
-도량 큰 어르신네지만 말에 휘말리고 말았네. 과연 잘못 알았구나.
“그를 따라가거라!”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이나 뒤에 쏜 화살이 깊이 박혔다. 이를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한다. 강물이 깊으니 큰배가 뜰 수 있고 진흙이 많으니 부처가 크구나. 따라간다 하면 어느 곳에 있겠으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또 어떠할까? (원오스님이) 후려쳤다.
(평창)
대수 법진(大隋法眞)스님은 대안(大安 : 793~883)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동천(東川)의 염정(鹽亭) 사람으로 60여 명의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왕년에 위산스님의 회하에 있으면서 화두(火頭)의 소임을 보았었는데, 하루는 위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여기에 여러 해 있었는데도 전혀 물어보지 않는구나.”
“제가 무엇을 물어야 될까요?”
“모르겠다면 무엇이 부처인가를 묻도록 하라.”
대수스님이 손으로 위산스님의 입을 막아버리자 위산스님이 말하였다.
“그대 이후로도 (그대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린 사람을 과연 내가 만날 수 있을까?”
그뒤에 동천으로 되돌아가 먼저 붕구산(堋口山)으로 가는 길목에서 차를 달여 오가는 길손을 3년 동안 대접하였으며 그뒤에야 세간에 나아가 개산(開山)하고 대수산(大隋山)에 주석하였다.
어떤 스님이 “겁화가 훨훨 타서 삼천대천세계가 모조리 무너지는데 이것도 무너지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교학의 뜻으로 물었을 뿐이다. 교학에서는 “우주는 이뤄지고〔成〕, 머물고〔住〕, 부서지고〔懷〕, 비었으며〔空〕, 삼재(三災 : 水火風) 의 겁화가 일어나 삼선천(三禪天)까지 무너진다”고 하였다. 그 스님은 원래 이 말의 귀착점을 몰랐었다. 말해보라. 이것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말하기를 “이것이란 중생의 본성”이라고 한다.
대수스님이 “무너진다”고 말하자, 스님은 “그렇다면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대수스님은 다시 “따라가거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음알이로 이해하여 찾으려하나 찾을 수 없다. 만일 “그것을 따라간다”고 한다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또 어떠할까? 듣지 못하였느냐. “간절하게 그리고 몸소 얻고자 한다면 물음을 가지고 묻지 말라”는 말을.
훗날 어떤 스님이 소수산주(紹修山主)에게 물었다.
“겁화가 훨훨 타서 대천세계가 모조리 무너지는데 이것도 무너집니까?”
“무너지지 않는다.”
“왜 무너지지 않습니까?”
“대천세계와 같기 때문이지.”
무너진다고 말해도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고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에게 장애가 된다.
이 스님은 대수스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일을 골똘히 생각하여 이 물음을 가지고서 곧바로 서주(舒州)의 투자산(投子山)을 찾아가자, 투자스님이 물었다.
“요즈음 어디 있다 왔느냐?”
“서촉 대수산에서 왔습니다.”
“대수스님은 무슨 소리를 하던가?”
스님 앞에서 주고받은 말들을 이야기하자 투자스님은 향을 올리고 절을 올리면서 이르기를 “서촉 땅에 고불(古佛)이 출세하였구나. 그대는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다. 이 스님이 다시 대수산에 이르렀을 때는 대수스님은 벌써 돌아가신 뒤였다. 이 스님은 한바탕 수치를 겪었던 것이다.
그후 당나라에 경준(景遵)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대수스님에 대해 시를 지었다.
전혀 따로이 법이 있는데
어느 누가 남종(南宗) 혜능(慧能)을 인가하였다 하는가?
한 구절 ‘그를 따라가거라!’라는 말이여!
일천산사에 납승들을 치달리게 하는구나.
귀뚜라미는 섬돌의 풀잎에서 울고
귀신은 한밤에 감실 등불에 절을 올린다.
읊조리는 소리는 외로운 창밖에 끊기고
서성이는 발길엔 한스러운 마음이길 수 없을래라.
그리하여 설두스님은 다음에 이 두 구절을 인용하여 송을 한다. 지금도 ‘무너진다’고 알아서도 안 되며, ‘무너지지 않는다’고 알아서도 안 된다. 결국 어떻게 알아야 할까? 어서 눈을 들어보아라.
(송)
겁화의 불빛 속에 질문을 던지니
-무슨 말을 하느냐? 벌써 잘못 돼버렸다.
납승이 오히려 두 겹 관문에 막혀버렸구나.
-이 사람을 꼼짝달싹 못 하게 했군.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백겹 천겹이구나. 그렇지만 아직도 이리저리 돌아다닐 발이 있구나.
가엾다. ‘그를 따라가리라!’라는 한 구절이여!
-천하의 납승들이 이처럼 계교를 하는군. 천 구절 만 구절할 필요가 없다. 그의 다리를 끊어버리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만 리 밖에 홀로 애써 왔다갔다하는군.
-업식(業識)이 꽉 차 있구먼. 마주 지나쳤는데도 모르는구나. 이는 괜스레 짚신만 떨어뜨리는 짓이지.
(평창)
설두스님이 상황에 딱 들어맞게 송을 하니, 구절 속에서 몸을 벗어날 곳이 있었다. “겁화의 불빛 속에 질문을 던지니, 납승이 오히려 두 겹 관문에 막혀버렸다”고 하였는데, 스님의 질문에는 먼저 ‘부서지는가’, ‘부서지지 않는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것이 ‘두 겹 관문’이다. 깨친 사람이라면 ‘부서진다’ 말해도 몸을 벗어날 곳이 있으며, ‘부서지지 않는다’ 말해도 몸을 벗어날 곳이 있을 것이다.
“가엾다. ‘그를 따라가거라!’라는 한 구절이여! 만 리 밖에 홀로 애써 왔다갔다하는군”이라고 한 것은, 그 스님이 이를 가지고 투자스님에게 묻고 또다시 대수스님에게 되돌아왔던 것을 송한 것이다. 이는 “만 리 밖에 애써 왔다갔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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