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8칙1)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외물도 아니어서〔不是心不是佛不是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51
 

 

 

제28칙1)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외물도 아니어서〔不是心不是佛不是物〕


(본칙)

남전(南泉 : 748~834)스님이 백장산(百丈山)의 열반(涅槃)스님을 참방하자, 백장 열반스님이 물었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었느냐?”

-화상은 알 것이여. 만 길 벼랑처럼 우뚝하구나. 그러나 이빨이 빠진 것을 알기나 하는지?


“있습니다.”

-형편없이 되었군. 멍청한 놈. 무슨 짓을 하느냐? 결국 이런 짓을 하고 말았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인가?”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라.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 꼴을 보아라. 잘못을 가지고 더더욱 잘못을 저지르네. 자, 물어보아라.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외물(外物)도 아닙니다.”

-과연 당했군. 허물이 작지 않다.


“말해버렸군.”

-그에게 말해주지 말라. 비록 일평생을 그르치더라도, 그에게 이처럼 말해주는 것은 마땅치 않다.


“저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떠합니까?”

-다행히도 몸을 피할 곳이 있었기 망정이지……. 긴 것과 함께 하면 길게되고 짧은 것과 함께 하면 짧게 된다. 옳은 쪽을 따라야 하고말고.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니다. (남에게) 할 말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알리요?”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 꼴을 보아라.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는 노출되었다. 거의 다 죽었구먼.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그 정도 가지고 나늘 속일 수 있을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이게 낫지, 다행히도 몰랐군, 알았다면 그대 머리가 박살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놈은 이렇게 대답했구나.


“내가 너에게 너무 말해버렸구나.”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무얼 하려는가?


(평창)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卽心〕이니, 마음이 아니니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이 아니라느니, 마음이 아님이 아니라느니 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털끝만큼의 (사량분별이) 없어야만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마음이니, 마음이 아니니하는 것은 연수(延壽 : 904~975)선사가 말한 표전(表詮)․차전(遮詮)의 논법이다.

여기에 나오는 열반스님은 유정(惟政)2)선사이다. 지난날 백장산에서 서당(西堂 : 다른 절의 주지가 은퇴하여 머무는 집)을 지냈는데, 심전(心田)을 열고 대의를 설법한 분이다. 이때 남전스님은 마조(馬祖)스님을 참방한 뒤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의심을 해결하였다. 백장 열반스님의 이 물음은 대답하기가 몹시 어려웠었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산승이 그 경우였다면 귀를 막고 뛰쳐나와 이 늙은이기 한바탕 부끄러워하는 꼴을 보았을 것이다. 남전스님이 작가 선지식이었다면 이처럼 묻는 말을 듣고서 곧 그를 간파했어야 했는데, 남전스님은 자기의 소견에 따라서 “있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라 하겠다. 그런데 백장 열반스님은 곧 잘못을 가지고 더더욱 잘못을 저질러 “어떤 것이 남에게 설명하지 않은 법이냐?”고 하자, 남전스님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외물(外物)도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애석한 일이다. 그에게 자세히 말해주다니……. 그때 등줄기를 냅다 내리쳐 아픔을 맛보도록 했어야 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대는 말해보라, 무엇을 말했다는 것인가? 남전의 견처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외물(外物)도 아니며, 일찍이 말한 것도 아니다. 그대에게 묻노라. 무엇 때문에 “말해버렸다”고 했을까? 그의 말에는 전혀 자취마저도 없다. 만일 그가 설하지 않았다면 백장 열반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말했을까?

남전스님은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할 줄 아은 사람이어서, 바로 뒤이어 대뜸 내질러 묻기를, “저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떠하십니까?”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를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장 열반스님은 작가였으니 어찌하리요, 대답 또한 기특하였다. 그는 대뜸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니다. (남에게) 할 말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알리요”라고 했다. 남전스님은 바로 “저도 모르겠습니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과연 알면서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일까 아니면 참으로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것일까?

백장 열반스님은 “내가 그대에게 너무나 말해버렸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무엇을 말했는가? 만일 진흙덩이나 가지고 노는 놈이었다면 둘 다 애매모호하게 했을 것이고, 만일 둘 다 작가였다면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는 듯하였을 것이다. 실로 앞에서는 둘 다 작가였으며, 뒤에서는 둘 다 한 수 물러났던 것이다. 안목을 갖춘 자라면 이를 분명히 증험할 것이다. 말해보라, 어떻게 증험할 수 있는가를. 설두의 송을 살펴보라.


(송)

불조는 예부터 남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각기 자기가 깨우친 영역을 지킨다. 법조문이 있으면 법조문을 따르게 마련이지. 조금이라도 문자를 기억하여 마음에 간직한다면 쏜살처럼 지옥으로 들어가리라.


고금에 납승들이 다투어 언어문자를 쫓네.

-행각하느라 짚신이 다 떨어졌군. 주장자를 꺾어버리고 바랑을 높이 걸고 더 이상 돌아다니지 마라.


밝은 거울이 대 위에 있어 비친 모습 다르지만

-떨어졌다. 깨졌구나. 거울이 깨지면 그대를 만나리라.


모두가 남쪽을 향하여 북두성을 바라본다.

-내가 법당에 걸터앉고 산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느냐? 신라에서는 벌써 상당 법문을 하고 있는데 당나라에서는 아직 북도 치지 않는구나.


북두칠성(국자의 자루) 기울어졌건만,

-귀결점도 모르는군. 어느 곳에 있을까?


(북극성을 찾으나) 찾을 수 없어라.

-눈멀었다. 애석하다. 주발이 떨어지고 접시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콧구멍(급소)은 방어했지만 입을 잃었다.

-어디에서 이런 비결을 얻었는가? 그럼 그렇지! (원오스님이) 쳤다.


(평창)

석가모니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49년간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처음 광요토(光耀土)에서 설법을 시작해 마지막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일찍이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말해보라. 이는 말한 것일까? 말을 하지 않은 것일까? 지금도 바다 속의 용궁에 경전이 가득 차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했을까?

왜 듣지 못하였는가? 소수산주(紹修山主)의 말을.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고 49년을 설하셨으며,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지 않았는데도 소림에는 오묘한 비결이 있었다” 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은 일찍이 세간에 나오시지 않았으며, 한 법도 남에게 말하지 않으셨다. 다만 중생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근기에 따라서 병에 따라서, 약과 처방을 주듯이 마침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불조는 예부터 지금까지 남에게 설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을 자세히 참구해야 좋을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했었다.

“한 구절을 말해주어 그것이 꿀처럼 달콤하더라도 이를 잘 살펴보면 그것은 독약이다.”

말하자마자 등줄기에 몽둥이질을 하고 곧 주둥이를 틀어막아 밀쳐 내버려야만이 비로소 간절하게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금에 납승들이 다투어 언어문자를 쫓고 있네”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옳아도 묻고, 옳지 않아도 물으며, 부처를 묻고 조사를 물으며, 향상(向上)을 묻고 향하(向下)을 묻는다.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조금도 옳다 할 수 없다.

“밝은 거울이 대 위에 걸려 있어 비친 모습 다르지만”이라고 했는데, 겨우 한 구절로 명백하게 잘잘못을 가려냈다. 옛사람의 말에 “삼라만상은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한 “삼라만상이 모두 여기에 원만하다”라는 말도 있다. 신수(神秀)스님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이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만(大滿)스님은 “그는 문 바깥에 있다”하였다. 설두스님은 이처럼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문 안에 있을까, 밖에 있을까?

그대들은 제각기 하나의 옛 거울〔古鏡〕을 가지고 있으니 삼라만상의 길고 짧음과 모나고 둥금이 낱낱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그대들이 장단점을 보려 해서는 끝내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대들이 장단점을 보려 해서는 끝내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설두스님은 “밝은 거울이 대 위에 있어 비친 모습 다르지만, 모두가 남쪽을 향하여 북두성을 바라본다”고 말하였다. 이미 남쪽을 향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북두성을 바라보는 것일까? 만일 이를 이해한다면 백장 열반스님과 남전스님이 서로 통했던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백장 열반스님이 한 번 내지른 것을 송한 것이다.

백장 열반스님도 “나는 큰 선지식도 아니다. 말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알리요”라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이에 이르러 썩은 물〔死水〕속에 들어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할까 염려하여 이 송을 하고 다시 말하였다.

“바로 눈앞에 북두칠성이 기울어져 있는데, 그대들은 어느 곳에서 북극성을 찾는가? 그대가 콧구멍을 방어하면 입을 잃고 입을 방어하면 콧구멍을 잃을 것이다.”

1)제28칙에는 〔수시〕가 없다.

2)‘유정(惟政)’대신 ‘법정(法正)’으로 된 대본도 있다. 법정(法政)은 백장 유정(百丈惟政)의 휘(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