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0칙 진주에서 나는 큰 무〔鎭州蘿蔔〕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55
 

 

 

제30칙 진주에서 나는 큰 무〔鎭州蘿蔔〕


(본칙)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 778~897)스님에게 물었다.

“듣자오니 스님께서는 남전(南泉)스님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천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콱 내질러라! 눈썹이 여덟 팔(八)자로 갈라진 걸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군.


“진주(鎭州)에 큰 무가 나느니라.”

-하늘을 버티고 땅을 고였다. 못과 무쇠를 끊어버렸다. 화살이 신라를 지나가 버렸다. 뒤통수에서 뺨이 보이는 놈과는 사귀지 말라.


(평창)

이 스님은 오랜동안 참구한 선객으로서 물음 가운데 안목이 있긴 하나, 조주스님은 작가 선지식인 걸 어찌하랴. 그에게 “진주에 큰 무가 나느니라”고 대답하여, 맛없는 말로써 사람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 늙은이(조주스님)은 너무나 날강도와 닮아서 입을 벌리기만 하면 상대의 눈알을 뒤바꿔버린다. 유별나게 뛰어난 놈이라면 곧바로 전광석화 속에서 듣기만 하여도 눈썹을 치켜세우고 바로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물쭈물 사량분별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강서(江西) 지방의 늑담 영징(泐潭靈澄)스님은 격을 뛰어넘은 성인인데, 그는 이를 “동문서답이다”고 판정하고서, “(조주스님은)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그의 올가미에 걸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서야 되겠는가?

원록공(遠錄公 : 浮山法遠, 991~1067)은 “이는 곁에서 슬쩍해본 말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구대집(九帶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이해한다면 꿈속에서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조주스님에게도 누를 끼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진주에는 원래부터 큰 무가 많이 생산되어온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며, 조주스님이 원래 남전스님을 참견했다는 것도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이므로, 스님이 다시 ‘스님께서 남전스님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조주스님은 ‘진주에 큰 무가 난다’고 말한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절대로 이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면 결국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게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 있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구봉(九峰)스님에게 물은 말을.

“듣자오니, 스님께서는 연수(延壽)스님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앞산에 보리가 익었느냐?”

이는 조주스님이 스님에게 대답한 말과 같으며 두 개의 구멍 없는 철추가 너무나 같다고 하겠다. 조주스님은 할 일 없는 사람이다. 그대들이 가벼이 물었다 하면 곧바로 눈알을 바꿔버린다. 그 말에 무엇인가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잘 씹어서 삼키겠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추를 통째로 삼키는 것과 같으리라.


(송)

진주에서 큰 무우가 생산된다.

-천하 사람이 모두 알고 있다. 절대 말조심하여라. 거량하면 할수록 더더욱 새롭구나.


천하의 납승들이 극칙(極則)으로 여기고 있네.

-어찌 하리요! 그렇지 않다. 누가 이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있느냐?


예나제나 이런 줄 만을 알 뿐,

-절반을 열리고 절반은 닫혔군. 삼대처럼 좁쌀처럼 많기도 하다. 예전에도 이렇지 않았고 이제도 그렇지 않다.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까?

-온 기틀이 통째로 싹 사라졌다.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이다. 이를 아는 것은 귀하지만 그렇다고 분별할 필요는 없다.


도적아! 도적아!

-쯧쯧! 별일도 아니네. 스스로 형틀을 짊어지고 자백서를 내민다.


납승의 콧구멍을 꿰었구나.

-꿰뚫렸구나! 쥐어틀어라!


(평창)

“진주에 큰 무가 나오느니라”라는 말을 법칙으로 삼는다면 벌써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옛사람이 손을 잡고 인도하여 높은 산에 올려 보내주는 것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 사람들은 극칙의 말씀이라고 말할 줄은 알지만, 결국 극칙이 되는 까닭은 몰랐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천하의 납승들이 극칙으로 여기고 있네. 다만 예나제나 그렇게 알 뿐,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어찌 분별할 수 있으랴”고 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의 사람도 이처럼 답변하고 옛사람도 이처럼 답변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떻게 검고 흰 것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또한 “모름지기 전광석화 속에서 순식간에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공안은 이 이상 더 송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모두 결판났다.

그러나 설두스님은 스스로 자기의 뜻을 드러내어 생생하게 다시 그를 향하여 “도적아, 도적아! 납승의 콧구멍을 벌써 꿰었구나”고 말하였다. 삼계의 모든 부처님도 도적이고, 역대의 조사도 도적이다. 그러나 훌륭한 도적으로서 사람의 눈동자를 뒤바꾸면서도 솜씨를 노출시키지 않았던 사람은 오로지 조주스님 뿐이었다. 말해보라. 조주스님이 훌륭히 도적질을 한 점은 무엇일까?

“진주에는 큰 무우가 생산된다.”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