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칙 마곡의 주장자를 떨치고(麻谷振鍚)
(수시)
움직이면 그림자가 나타나고, 깨달으면(본래 맑은 물이지만) 얼음이 생겨난다.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는다면 여우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철하게 사무치고, 꽉 믿어서 실오라기 만한 가리움마저 없다면, 용이 물을 얻은 듯, 범이 산을 의지한 듯하여, 놓아버려도 기와 부스러기에서 광명이 나오고, 잡아들여도 황금이 빛을 잃게 되어, 옛사람의 공안도 (직선 코스가 아닌) 빙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말해보아라. 거량해보련다.
(본칙)
마곡스님이 석장(鍚杖)을 지니고 장경(章敬)스님에게 이르러, 선상(禪床) 주위를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조계의 모습을 쏙 빼닮았네. 끝내는 하늘도 놀라고 땅도 감동했다.
장경스님이 말하였다.
“옳지, 옳지!”
-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한 배 탄 사람들을 모두 속였다. 이 무슨 말이냐? 사람을 잡아매는 말뚝이다.
설두스님이 착어하였다.
“틀렸다.”
-용서해줘서는 안되지. 그래도 한 수 헤아렸군.
마곡스님이 또다시 남전스님에게 이르러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여전히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 전에 했던 짓을 거듭하는군, 새우가 뛰어봐야 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아니다, 아니야.”
-왜 인정하지 않는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구나. 이 무슨 이야기인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틀렸다!”
-용서해줘서는 안되지.
당시 마곡스님이 말하였다.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는데, 스님은 무엇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하십니까?”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 이놈이 원래 남의 말을 가로채는 녀석이었군. 들통났구나.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장경스님은 옳았지만 틀린 것은 바로 자네야!”
-사람을 죽이려면 반드시 피를 보아야만 하고, 사람을 위하려면 반드시 사무쳐야 한다. 많은 사람을 속였겠구나.
이는 바람의 힘〔風力 :번뇌〕에서 굴러나온 바이니 결국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었군, 자기는 어떡하려구?
(평창)
옛사람은 행각을 할 적에 두루 총림을 편력하면서 ‘이 일’만을 생각하고, 선상(禪床) 위에 앉아 있는 큰스님들의 안목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하고자 했다. 옛사람들은 한 마디에 서로 통하면 머물렀지만 그렇지 못하면 곧 떠나버렸다.
마곡스님이 정경스님에게 이르러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장경스님이 “옳지, 옳다” 고 말한 것을 보아라.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과 살리는 칼〔活人劍〕은 본분작가여야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양쪽으로 이해한다면 설두스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우뚝 서 있었는데, 말해보라. 그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설두스님은 “틀렸다!”고말하였는데, 어느 점이 틀렸다는 것일까?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옳다는 것일까? 설두스님은 앉아서 판결문을 읽는 것과 같다.
마곡스님은 “옳다”는 이 한마디를 가지고 바로 남전스님을 찾아가 여전히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남전스님은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였는데, 살인도와 활인검은 모름지기 본분종사여야 쓸 수 있다. 설두스님은 “틀렸다!”고 하였으며, 장경스님은 “옳지, 옳지”라 하였고, 남전스님은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였으니, 이는 똑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앞에서는 “옳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틀렸다!”고 말했으며, 뒤에서는 “아니다”라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틀렸다!”고 하였을까?
만일 장경스님의 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하겠지만, 남전의 말에서 알아차린다면 불조와 함께 스승이 될 것이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납승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알아야 한다. 절대로 남의 말을 가지고서 분별해서는 안된다. 그가 물은 것은 매한가지였는데 왜 한 사람은 “옳다”하고, 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을까? 통달자재한 작가〔通方作家〕로서 완전한 해탈을 얻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또 다른 생애가 있겠지만, 기틀〔機〕과 경계〔境〕를 잊지 못한다면 결코 양쪽에 막힐 것이다.
그러므로 고금을 분명히 판별하고 천하인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하려면 반드시 두 차례 “틀렸다 !”라고 한 말을 또렷이 알아야한다. 뒤에 설두의 송은 오직 이 두 차례의 “틀렸다!”는 말을 노래했을 뿐이다. 설두스님은 활발발(活鱍鱍)하게 드러내고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만일 몸 속에 피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언구에서 이해하지 않고, 속박하는 말뚝 위에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은 마곡을 대신하여 두 차례 ‘틀렸다!’고 말하였다”고 하지만 이와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사람의 착어는 중요한 관문을 꽉 막아버린다는 사실을 모른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옳으나 결국은 두 쪽 모두 아니다.
경장구(慶藏主)는 “석장을 짚고 선상을 맴돌며, 옳으니 옳지 않느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고 하였는데. 실은 이것도 아니다.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는가? 영가(永嘉)스님이 조계(曹溪)에 이르러 육조(六祖)스님을 친견할 적에 선상에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 번 치며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육조는 “사문(沙門)이란 3천 가지의 큰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의 구체적인 규율〔八萬細行〕까지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스님은 어디서 왔기에 그처럼 거만을 부리는가?”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에 육조는 그에게 거만을 부린다고 말하였을까? 그때는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옳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옳으니 옳지 않느니 하는 것은 모두 속박하는 말뚝이다. 오로지 설두스님만이 두 차례 “틀렸다!”고 하였으니,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마곡스님은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였는데 스님은 왜 옳지 않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늙은이가 눈썹을 아끼지 않고(상대를 일깨워주느라) 적지 않은 허물을 범하였다. 남전스님이 말하기를 “장경스님은 옳지만 바로 너는 틀렸다”라고 하였으니, 남전스님이야말로 토끼를 보고서 사냥하려고 매를 놓아보냈다고 말할 만하다.
경장주가 말하였다. “남전스님이 너무도 매몰차지 못해 마지못해. 다시 허물을 들추어 말하기를 ‘이는 바람의 힘〔風力〕에서 굴러나온 바이므로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나의 이 몸은 사대(四大)로 화합된 것이니, 이른바 털ㆍ손톱ㆍ이빨ㆍ가죽ㆍ살ㆍ힘줄ㆍ뼈ㆍ골수ㆍ뇌 등 더러운 물질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침ㆍ눈물ㆍ고름ㆍ피는 모두 물로 돌라가며,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가나니 사대(四大)가 각각 떠나면 오늘의 이 허망한 몸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저 마곡스님이 석장을 지니고 선상을 돌았던 것은 이미 바람힘〔風力〕에서 굴러나온 바이므로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말해보아라! 결국 마음의 종지〔心宗〕를 밝히는 일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무쇠로 주조한 놈이어야만이 할 수 있다.
왜! 듣지 못하였느냐? 장졸(張拙)이라는 한 진사(進士)가 서당장(西堂藏)선사를 참방하여 물었다.
“산하대지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느니라.”
“틀렸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누구를 참방하였소?”
“경산(徑山)스님을 참방하였습니다. 내가 묻기만 하면 경산스님은 모두 ‘없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권속이 몇이나 있소?”
“아내 한 사람과 두 자식이 있습니다.”
“경산스님에겐 권속이 몇 명이 있었소?”
“경산스님은 옛 부처〔古佛〕이시다. 스님은 그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경산스님처럼 되거든 꼭 ‘없다’고 말하소.”
그러자 장졸은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모름지기 작가종사라면 끈끈한 속박을 벗겨주며 (속박하는) 못과 쐐기를 뽑아주어야 한다. 한 곳만을 국집하지 말고, 종횡무진 자재(自在)하여야 한다.
앙산스님이 중읍(中邑)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사계(謝戒 : 계를 받고 은사께 드리는 의식)한 행동을 살펴보라.
중읍스님이 앙산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선상 위에서 손뼉을 치면서 “큰스님(和尙)1)! ”하자, 앙산스님은 곧 동편에 섰다가 다시 서쪽에 서고, 또다시 한복판에 섰다. 그런 뒤에 사계를 하고 곧 뒤로 물러서자 중읍스님이 말하였다.
“어디에서 이런 삼매를 얻었느냐?”
“조계(曹溪)의 도장〔印章〕을 고스란히 찍어왔지요.”
“말해보라. 조계스님은 이 삼매로 어떤 사람을 제접하였느냐?”
“일숙각(一宿覺)을 제접했습니다.”
이어 앙산스님이 도리어 중읍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삼매를 얻으셨습니까?”
“마조(馬祖)의 처소에서 이 삼매를 얻었노라.”
이와 같은 대화를 한다면, 이는 하나만 들어도 셋을 밝히고 근본을 보고서 지말을 아는 놈이 아니겠는가!
용아(龍牙)스님은 대중법문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조사와 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 신풍(新豊 : 동산 양개, 용아스님의 은사)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불조의 말씀과 가르침을 숙생(宿生)의 원수처럼 보아야 비로소 참선할 자격이 있다. 만일 뛰어넘지 못한다면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게 된다’라고 했다.“
그때 어느 스님이 (용아스님에게) 물었다.
“불조께서도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그대는 말해보라. 강과 호수가 사람을 막아 세우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또 용아스님은 말했다.
“강과 호수는 사람을 막아 세우려는 마음이야 없었지만 사람 스스로 지나가지 못하여, 강과 호수가 도리어 사람을 막는 격이 되었다. 그러니 강과 호수가 사람을 가로막는다고 말할 수 없다. 조사와 부처가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야 없었지만, 사람 스스로가 뛰어넘지 못하기에 부처와 조사는 사람을 속이는 격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처와 조사가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불조의 가르침을 뛰어넘으면 이 사람은 곧 불조를 뛰어넘은 것이다. 불조의 뜻을 체득해야지만 비로소 향상(向上)의 옛사람과 같을 것이며, 뛰어넘지 못한다면 부처를 배우고 조사를 배운다 해도 만겁(萬劫)토록 깨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깨쳐야 하느니라.”
‘이 자리’는 반드시 이래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도하려면 철저해야 하고, 살인을 하려면 피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남전스님과 설두스님은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이래도 ‘틀렸다’, 저래도 ‘틀렸다.’
-눈썹을 아껴라. 법령에 따라서 시행하였구나.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로다.
절대 말하지〔拈〕 말라.
-두 개의 구멍 없는 철추로다. 서령 천수대비〔千手大悲〕 관음이라 해도 거론하지 못하리라. 혹 말한다면 스님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사해(四海)에 물결이 잔잔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한다. 동서남북이 모두 똑같은 가풍이로구나. 요즈음엔 비가 많이 내리는군.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
-적나라하여 말끔하구나. 자신도 편안하고 바다와 강물까지도 평온하다.
고책(古策 : 지팡이)의 가풍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은데
-어찌 이 같으랴. 주장자에는 눈이 없다. 절대로 주장자 위에 살림살이를 하지 말라.
문마다 (장안에 이르는) 길 있건만, 텅 비어 쓸쓸하네.
-한 물건도 없구나. 그대들의 평상심〔平生〕을 속였다. 곁눈질했다 하면 장님이 되리라.
쓸쓸하지 않음이여!
-그러면 그렇지! 몸을 돌릴 곳이 있었기 망정이지. 벌써 장님이 되었군.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선지식은 병 없는 약을 잘 사용하느니라.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하루종일 무엇 때문에 졸고 있는가? 하늘을 휘젓고 땅을 더듬어 무엇 하려고?
(평창)
이 송은 덕산스님이 위산스님을 친견했을 때의 공안과 같다. 먼저 공안을 가지고 두 전어(轉語)에 착어하여 하나로 꿰어놓은 뒤에 송을 한 것이다. “이래도 ‘틀렸다‘, 저래도 ’틀렸다‘, 절대로 말하지〔拈〕 말라” 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말한 뜻은 이곳에서도 한 번 틀렸고, 저곳에서도 한 번 틀렸으니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면 틀린다. 모름지기 이처럼 두 번의 ‘틀렸다’는 말을 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해의 물결은 잔잔하며,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는 것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경지라 하겠다. 그대가 만일 이 두 번의 “틀렸다”라는 데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눈꼽만큼도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며,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이다. 닷새 만에 바람 한 번 불고 열흘 만에 비 한 번 내리는 태평성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해의 물결이 잔잔하고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뒤이어 마곡스님이 석장을 지녔던 것을 노래하여 “고책의 가풍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다”하였는데, 옛사람은 (말을 때리는) 채찍을 책(策)이라 하지만 납승가에서는 주장자를 책(策)이라 한다. (「祖庭事苑」에서는 古策을 鍚杖이라 하였다). 서왕모(西王母) 선녀의 요지(瑤池) 위에는 열두 개의 붉은 문이 있다고 한다. 고책(古策)이란 곧 주장자인데, 주장자로 인해 일어난 맑은 바람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다는 것이다. 천자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거처하는 곳에도 각각 열두 개의 붉은 대문이 있다고 한다. 두 번의 “틀렸다”는 말을 알 수 있다면 주장자의 끝에서 빛이 발생하여 고책 또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옛사람(분양 선소스님)의 말에 “주장자를 알면 일생에 참구했던 일〔參學事〕을 끝마친다”하였고, 또 (영가스님은) “이는 모양을 내느라 괜히 갖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여래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다”고 하니, 이와 같은 유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일곱 번 자빠지고 여덟 번 넘어지더라도 언제나 완전한 자재(自在)를 얻을 것이다.
“문마다 길 있건만, 텅 비어 쓸쓸하네” 라고 한 것은, 길이 있기는 하나 쓸쓸히 텅 비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이 여기에 이르러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 다시 그대들에게 이를 다 파해주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쓸쓸하지만은 않은 곳이 있다. 만일 작가 선지식이라면, 병이 없을 때 먼저 약을 써야 하는 법이다.
1)삼성본(三省本)에는 ‘화상(和尙)’으로 되어 있는데, 「전등록」에는 ‘화화(和和)’로, 「오등회원」에는 ‘화화성(和和聲)’으로 되어 있다. ‘화화(和和)’는 어린애들이 말 배울 때 내는 소리로, 번역하면 ‘옹알옹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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