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41칙 조주의 크나큰 죽음〔趙州大死〕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53
 

 

제41칙 조주의 크나큰 죽음〔趙州大死〕


(수시)

시비가 서로 얽힌 곳은 성인도 알 수 없고, 역순(逆順)이 교차 할 때는 부처 또한 분별하지 못한다. 뛰어난 절세(絶世)의  인물이어야만, 무리 가운데 빼어난 보살의 능력을 발휘하여, 얼음 위에서 걷기도 하며 칼날 위를 달린다. 이는 마치 기린의 뿔과 같으며 불 속에 피어난 연꽃과 같다. 시방을 벗어났다는 것을 뚜렷이 봐야만 비로소 같은 길을 걷는 자임을 알 것이다. 누가 이처럼 솜씨 좋은 사람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조주스님이 투자(投子)스님에게 물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이러한 일이 있었구나. 도적도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타관살이에 익숙해야만 길손을 가련히   여길 줄 안다.


투자스님은 말하였다.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으면 가거라.”

-적의 망루(望樓)를 보고 망루를 공격한다. 도적이 도적을 아는군.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다면 이   불 밑이 뚫렸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평창)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완전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거든 가거라.”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시절인가를. 구멍 없는 피리에서 나는 소리가 방음판에 부딪치는 것과 같다. 이는 ‘주인을 시험하는 물음〔驗主問〕’이라고도 하며, ‘수작을 거는 물음〔心行問〕’이라고도 한다. 투자스님과 조주스님은 총림에서는 뛰어난 변재라고 찬미하였다. 두 노장들의 법사(法嗣)는 다르지만 그들의 기봉은 한가지였다.

하루는 투자스님이 조주스님을 위하여 찻자리를 마련하여 마주하게 되었다. 손수 떡을 조주스님에게 건네주었으나 조주스님은 조금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투자스님이 행자를 시켜 조주스님에게 떡을 주도록 하자, 조주스님은 행자를 향하여 세 차례 절을 하였다. 말해보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그를 살펴보면 모두가 근본 자리에서 본분의 일을 들어 사람을 지도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도이니라.”

“무엇이 부처입니까?”

“부처니라.”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열려 있다.”

“천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 〔金鷄未鳴時〕는 어떠합니까?”

“그런 소리는 없다.”

“천지가 생긴 뒤에는 어떠합니까?”

“저마다 시간을 알겠지.”

투자스님의 평소의 문답이 다 이와 같았다.

조주스님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고 묻자,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거든 가거라”라고 대답했다. 이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으니 향상인(向上人)이어야 이처럼 할 수 있다. 완전히 죽은 사람에게는 불법이라 할 것도, 현묘이니 아니니 할 것도, 시비․장단도 전혀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저 쉴 뿐이다.

옛사람(운문스님)은 이를 “아무것도 아닌 데서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가시덤불을 지날 수 있어야만이 좋은 솜씨이다”라고 했다. 모름지기 ‘저곳’을 뚫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사람은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는 뚫고 가기 어렵다. 만일 의지하거나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를 위산 철(潙山喆)스님은 “견해가 말쑥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고, 은사이신 오조(五祖)스님께서는 “명근(命根)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모름지기 완전히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절중(浙中)의 영광(永光)1)스님은 말했다. “언어의 기봉이 조금만 어긋나도 고향가는 길은 천리 만리 멀어진다. 모름지기 깎아지른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만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다.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도리 그대를 속일 수 없고, 뛰어난 종지 뉘라서 숨길〔廋〕2)수 있겠는가?”

조주스님의 물음도 이와 같았으며, 투자스님은 작가로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정식(情識)과 자취를 끊어버린 것이니 참으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그저 눈앞에 조금만 내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간절하게 얻으려 한다면 묻지말라. 물음은 답에 있고, 답은 물음에 있다”라고 했던 것이다.

투자스님이 아니었다면 조주스님의 질문을 받고, 응수하기 매우 난처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에 듣자마자 귀착점을 알았던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도리어 죽은 것과 같고

-둘이 서로 모른다. 엎치락뒤치락 하는구나. 만일 마음이 넓지 못하다면 어떻게 흰지 검은지를    분별하겠는가?


함께 먹어서는 안 될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鑑別)하려 하느냐?

-시험해보지 않았다면 분명한 것을 어떻게 가려냈겠느냐? 시험삼아 감별해 보는 것이 나쁠 게    있느냐.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옛 부처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짝이 있었기 망정이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했고, 산승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

-지금도 적지 않다. 눈을 떠도 집착, 감아도 집착이다. 스님이 이처럼 거량하였는데 귀착점이 어   디에 있을까?


(평창)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죽은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이것’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감히 이처럼 노래했던 것이다. 옛사람(덕산 연밀스님)이 말하기를 “그는 활구(活句)를 참구했지.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않았다”하였고 설두스님은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도리어 죽은 듯하다. 어찌 죽었겠는가? 죽은 가운데 안목을 갖춘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옛사람(운문스님)은 “죽이려면 깡그리 사람을 죽여야 산 사람을 보게 되고, 살리려면 사람을 깡그리 죽여야 죽은 사람을 본다”고 하였다.

조주스님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에, 죽은 물음으로 투자스님을 시험했던 것이다. 약을 복용할 때에 함께 먹어서는 안되는 약을 가지고, 고의로 시험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함께 먹어서는 안되는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이는 조주스님의 질문을 노래한 것이며, 뒤이어 “옛 부처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데”라는 것은 투자스님을 노래한 것이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경지는 옛 부처도 일찍이 이르지 못하였고, 천하의 큰스님들도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이는 비록 석가 노인이나 파란 눈 달마라도 거듭 참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오랑캐가 알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깨쳤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어느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라고 하였는데,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장경(長慶)스님에게 “무엇이 선지식의 안목입니까?”라 하자, 장경스님은 “모래를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고, 보복(保福)스님은 “결코 뿌려서는 안되느니라”고 하였다. 천하의 노스님들이 선상(禪床)에 앉아 방(棒)과 할(喝)을 행하며 불자를 세우고 선상을 쳐서, 신통을 나타내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우는 것은 모두가 모래를 뿌리는 일이다. 말해보라, 어떻게 해야 이를 면할 수 있는가를.

1)삼성본에는 ‘영안(永安)’으로 되어 있으나, 당본(唐本)과 「오등회원」등을 참조하여 ‘영광(永光)’으로 고쳤다.

 

2)廋 : 所자와 留자의 반절. 뜻은 숨기다〔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