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43칙 동산의 더위와 추위〔洞山寒署〕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58
 

 

 

제43칙 동산의 더위와 추위〔洞山寒署〕


(수시)

하늘과 땅을 구별하는 듯한 말들은 만세토록 모두 받들겠지만, 범과 외뿔소를 사로잡는 기틀은 많은 성인들도 알아차릴 수 없다. 당장에 실오라기만큼의 가리움이 없으면 완전한 기틀이 도처에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향상(向上)의 겸추(鉗鎚)를 밝히고저 한다면 작가의 용광로이어야 한다. 말해보라, 예로부터 이러한 기풍이 있었는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피하시렵니까?”

-(나 원오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다. 온통 다 그렇다. 어느 곳에 있을까?


“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천하인이 찾아도 찾지 못한다.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하(簫何)라는 사람이 거짓으   로 은성(銀城)을 팔아먹는 것과 같구나.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한 배에 탄 모든 사람을 모조리 속이는군. 동산스님의 말에 놀아나는군. 낚시에 걸려들었구나.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

-진실은 거짓을 가리지 못하고 굽은 것은 곧음을 감추지 못한다. 벼랑에 임하여 범과 외뿔소를    보았으니 괜히 한바탕 근심스럽겠다. 큰 바다를 뒤엎어버리고 수미산을 걷어차버렸다. 말해보아   라, 동산스님이 어디에 있는가를.


(평창)

황룡 오신(黃龍悟新)스님이 이를 염(拈)하였다.

“동산스님은 소매 끝에 옷깃을 달고 겨드랑 아래 옷섶을 튼(보통 옷을 입었지만) 이 스님이 이해하지 못한 데야 어찌하랴. 지금 어느 사람이 황룡스님에게 묻는다면, 말해보라, 그가 어떻게 왔을까?”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말을 이었다.

“선(禪)을 함에는 굳이 산수(山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이 사라지면 불은 저절로 시원해진다.”

여러분은 말해보라. 동산스님의 올가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동산스님의 오위(五位) 및 정(正)․편(偏)으로 번갈아가며 사람을 제접하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와 같은 향상의 경계에 이르러야만 요리조리 궁리하지 않고서도 자연히 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름〔正〕 가운데 치우침〔偏〕이여!

삼경의 초저녁 밝은 달 앞에서

만나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달리 생각마오.

남 몰래 지난날의 유감을 품고 있네.


치우침 가운데 바름이여!

날이 밝자 노파는 옛 거울을 마주하여

자세히 얼굴보니 결코 참됨이 없네.

다시는 머리가 없다고 거울 속을 잘못 보지 마오.


바름〔正〕 가운데 옴〔來〕이여!

없음 〔無〕 가운데 길이 있어 티끌먼지 벗어나니

오늘날 입 조심만 하면

전조(前朝)에 혀잘린 선비보다 훌륭하리라.


치우침〔偏〕 가운데 이르름〔至〕이여!

두 칼날이 서로 부딪쳐도 피할 필요가 없다.

좋은 솜씨란 불 속에 피어난 연꽃 같으니,

뚜렷이 충천하는 기개를 지니셨구려.


겸하는〔兼〕 가운데 다다름〔到〕이여!

유무에 떨어지질 않는데 누가 감히 조화하랴.

사람마다 보통사람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서로가 숯 속으로 들어가버리리라.


부산(浮山)의 원록공(遠錄公)은 이 공안으로 오위(五位)의 격식을 삼았는데, 이 가운데에서 한 칙만 알아도 나머지는 저절로 쉽게 알 수 있다. 암두스님은 “이는 물위에 떠 있는 호로병처럼 자유자재하니 건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움직이니 결코 털끝만큼의 힘도 들지 않는다”하였다.

언젠가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문수와 보현이 찾아올 때, 즉 이(理)와 사(事)가 동시에 나타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소떼(수행승) 속으로 달려가겠다.”

“스님께서는 쏜살처럼 지옥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모두 그 무소떼(수행승)의 덕분이지.”

동산스님의 “무엇 때문에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는 것은 치우침 가운데 바름〔偏中正〕이며, 스님이 “어느 곳이 추위나 더위가 없는 곳이냐”고 묻자,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는 말은 바름 가운데 치우침〔正中偏〕이다. 이는 정위(正位)이면서도 편위(偏位)이며, 편위이면서도 원위(圓位)이다. 이는 「조동록(曹洞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문하에서는 잡다한 것이 없다. 이런 공안이란 대뜸 알아야 한다. “추위와 더위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핵심에서 벗어난 말이다. 옛사람은 “칼날 위에서 알아차리면 빠르지만 정식(情識)으로 헤아렸다가는 늦는다”고 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취미(翠微)스님에게 묻는 말을.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없거든 말해주리라.”

취미스님은 말을 마치고 밭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스님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주십시오.”

취미스님은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대나무는 이처럼 크게 자랐고 저 대나무는 저처럼 작구나”라는 말에 스님은 크게 깨쳤다.

또 한번은 조산(曹山)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 어디에서 피서를 하려느냐?”

“확탕․노탄 지옥에서 하겠습니다.”

“확탕․노탄 지옥에서는 어떻게 피서를 하겠느냐?”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저 집안 사람들을 보아라. 자연히 저 집안 사람들의 말을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저 집안의 일로써 송을 하였다.


(송)

(남을 지도하는) 손을 드리우면 그대로 만 길 벼랑과 같으니

-작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구별할 수 있겠으며 원융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명령이 발포되니 제   후가 길을 피한다.


굳이 정위이니 편위이니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러니저러니 따졌다가는 어떻게 (깨닫는)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양쪽을 다   관계하지 않는가? 바람이 부니 풀잎이 쓰러지고, 물이 흘러오니 도랑이 이뤄진다.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동그랗구먼. 절대 그림자를 오인하지 말고, 머리 위에 있는 저것이 달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우습구나, 영리한 사냥개〔韓獹〕가 괜스레 섬돌을 오른다.

-이번 뿐만 아니다. 잘못 빗나가버렸군. 흙덩이를 좇아가 무엇하려고.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설두스님) 그대도 그 객스님과 똑같이 잘못했구먼.

(평창)

조동스님의 문하에서는 세간에 나왔으니, 나오지 않았느니 하는 말〔出世不出世〕이 있으며, 방편으로 지도를 해준 것이느니 아니니 하는 말〔垂手不垂手〕이 있다. 세간에 나오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르지만, 세간에 나오면 벌써 더러운 재묻고 흙묻는 꼴이다. 하늘을 우러르는 것은 곧 만 길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며, 머리에 재가 묻고 얼굴에 흙이 묻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지도를 한 꼴이다. 어느 때는 머리에 재 묻고 얼굴에 흙묻은 채로 만 길 봉우리에 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만 길 봉우리에 선 것이 곧 머리에 재가 묻고 얼굴에 흙이 묻는 꼴이다. 그러나 실은 저자에 들어가 방편을 부린 것이나 높은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본원으로 돌아가 성품을 깨친 것과 세간의 지혜〔差別智〕는 차이가 없으니, 이를 서로 다르다고 알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손을 드리우면 그대로 만 길 벼랑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곧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굳이 정위이니 편위이니 따질 것이 있겠는가”라 한 것은, 작용할 때 저절로 이와 같이 되는 것이지 이리저리 따져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동산스님의 대답을 노래한 것이다.

뒤이어 말한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우습게도, 영리한 사냥개가 괜스레 섬돌을 오른다”는 것은, 바로 이 스님이 말에 휘둘리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조동종에서는 “애 못낳는 여자〔石女〕․나무로 만든 말〔木馬〕․밑빠진 바구니〔無底籃〕․야명주(夜明珠)․죽은 뱀〔死蛇〕 따위의 18가지의 얘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정위(正位)를 밝힌 것이다.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달은 둥그런 그림자가 있는 듯하다.

동산스님은 “왜 추위나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고 대답했는데, 이는 그 스님이 마치 사냥개가 흙덩이를 좇아가는 것처럼 연거푸 섬돌을 오르락거리며 달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다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어디냐?”고 묻자,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사냥개가 흙덩이를 좇아간 것처럼 섬돌 위로 달려가 보았으나 달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사냥개〔韓獹〕는 「전국책(戰國策」에서 나온 이야기로써, 거기에 이르기를 “한씨(韓氏)의 개는 날쌔고 중산(中山)의 토끼는 교활하였다. 한씨의 개만이 그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하여 그 스님을 비유한 것이다.

여러분은 동산스님이 사람을 제접한 속뜻을 아는가? (원오스님은)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였다. “토끼는 찾아서 뭐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