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58칙 조주의 함정〔趙州窠窟〕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26
 

 

 

제58칙 조주의 함정〔趙州窠窟〕


(본칙)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를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겹의 공안이다. 오히려 네 말도 사람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   하구나. 또한 이런 사람이 있기는 있었구나. 자기의 집착으로 다른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말라.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으나 5년이 지났건만 잘 모르겠다.”

-낯을 붉히는 것은 바른 말을 하는 것만 못하다. 원숭이가 모충(毛蟲)을 먹고 모기가 무쇠소를    무는구나.


(평창)

조주스님은 일평생 (덕산스님처럼) 몽둥이질을 하거나 (임제스님처럼) 할(喝)을 하지 않았지만 (언구의) 활용은 몽둥이질이나 할을 능가하였다. 스님의 질문이 매우 기특하다. 만일 조주스님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답변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주스님은 작가였다. 그에게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지만 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묻는 것도 천 길 벼랑에 서 있는 듯하고, 답변 또한 그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바로 맞겠지만, 이러쿵저러쿵 말로써 계교해서는 안된다.

듣지 못하였느냐? 투자 법종(投子法宗)스님이 설두스님의 회하에서 서기(書記)로 있었는데, 설두

스님이 그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울게 없고 그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한 말을 참구하여

깨닫게 한 것을. 하루는 설두스님이 그에게 묻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한 뜻이 무엇이냐?”고 하자, 그 스님은 이렇게 대꾸했다. “이 짐승 같은 놈

아! 이 짐승아!”

그 뒤 투자산(投子山 : 舒州에 소재함) 에 은거하면서 주지 소임을 보러갈 때는 으레 가사 속에

짚신과 경문을 지니고 다녔다.

“어떤 것이 법종스님의 가풍입니까?”

라고 묻는 스님이 있으면 법종은 말하였다.

“가사 속의 짚신짝이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벌거벗은 다리 아래 동성(銅城 : 舒州의 安慶府의 마을 이름) 고을이 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불공을 올리는 것은 향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붙잡거나 놓아주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일문일답이 분명하게 고스란히 드러나 있

는데 무엇 때문에 조주스님은 “잘 모르겠다”고 하였을까?

“요즘 사람들은 이를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소굴 속에 있으면서 답변

한 것일까, (아니면) 밖에 있으면서 답변한 것일까? 이는 반드시 언구 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아야 한다. 혹 어느 사람이 골수에 사무치게 믿어 행한다면 용이 물을 얻은 듯,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을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켜고

-부귀 중에 부귀이다. 그 누가 오싹하지 않으랴. 좋은 소식이다.


사자는 포효한다.

-작가 중에 작가이다. 모든 짐승의 머리가 쪼개진다. 그 길로 들어가야지.


맛을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이여!

-욕하려거든 해라. 주둥이가 모자라면 하나 더 달아줄께. (사람을 붙들어매는 것이) 무쇠말뚝과

같다. 어찌 입을 들이댈 수 있을까? 밝히지 못한 지 5년이 지났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당(唐)

나라를 실었구나. 아득하고 커다란 파랑이 일어나니 어느 누가 따로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

랴.


사람의 입을 꽉 막아버렸다.

-뱉으려거든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 떠다 줄까? 쯧쯧! 설두스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동서남북에

-있느냐, 있느냐? 천상천하에 그득하다. 아이고,아이고!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노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 한꺼번에 산 채로 묻어버렸다.


(평창)

조주스님이 하신 “전에도 어느 사람이 나에게 물었는데 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모르겠다”는 말

은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켜고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도 같다.


“맛을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이여! 사람의 입을 막아버렸다.”

“동서남북에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린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이 끝 구절을 말하지 못했더

라면 어찌 설두스님이 명성이 지금까지 있겠는가? 이미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렸다. 말해보라,

조주스님․설두스님․산승(원오스님 자신)의 의도가 결국 어디에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