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57칙 조주의 분별하지 않음〔趙州不揀〕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25
 

 

 

제57칙 조주의 분별하지 않음〔趙州不揀〕


(수시)

깨닫기 이전에도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지만 깨달은 뒤에도 본래의 자기는 그대로 원래 은산철벽

이다.

어떤 사람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에게 말하리라.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 기틀을 내보일 수 있고, 한 경계를 살필 줄 알며, 핵심되는 길목을 꽉

틀어막고 범부도 성인도 어쩌지 못하는 경지라 하더라도, 특별날 것은 없다.” 그렇지 못하다면 옛

사람의 행동을 보도록 하라.


(본칙)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니 오직 간택을 그만두면 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쇠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삼키질 못한다. 반드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입이 꽁꽁 얼어붙었  다.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니라.”

-괜시리 해골 무더기를 일으켰다. 납승의 목숨을 일시에 뚫어버렸다. 금강으로 주조한 무쇠문서〔鐵券〕이다.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말에 놀아나고 마네. 이 늙은이를 한 대 내질러라.


“이 맹추〔田厙奴〕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산은 높고 돌은 험준하다.


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에게 곤장 삼십 대를 치리라. 곧바로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평창)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다…….”라는 구절은 삼조(三祖)스님의 「신심명(信心銘)」 첫 머리에 있는 두 구절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

면, “지극한 도란 본래 어려움이 없고 어렵지 않을 것도 없지만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

다”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1만 년이 지난다 해도 (그 의도를)

꿈에도 보지 못할 것이다. 조주스님은 항상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스님이

이 말을 가지고 거꾸로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를 말에서 찾는다면 그 스님이 도리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겠지만, 어구(語句) 위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30년을 참구하도록 하라. 이 조그마한 문빗장을 뒤집어볼 줄

알아야만이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면 반드시 본분의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 스님도 위험과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호랑이 수염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고 하자, 조주스님은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만일 이를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이 늙은이 또한 작가 종사

인데야 어찌하랴.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움직이며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몸을 돌린 것이

다.

그대가 이를 깨닫는다면 모든 악독한 언구와 천태만상의 세간의 희론(戱論)들이 모두 도(道)일

것이다. 만일 분명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조주스님의 자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전사노(田厙奴)는 복당(福唐 : 복주) 지방의 사람을 욕하는 말로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스님이 “이것도 오히려 간택이다”고 하자, 조주스님은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고 하였다.

종사의 안목이 반드시 이래야지만 바다를 뚫고 들어가 곧바로 용을 삼켜버리는 금시조(金翅鳥)처

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바다처럼 깊고

-이는 누구의 도량(度量)인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절반도 아직 헤아리지 못했다.


산같이 견고하구나.

-어떤 사람이 이를 흔들 수 있을까? 그래도 (그의 덕에는) 반쯤뿐이 안된다.


등에와 모기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고

-이런 놈이 있었지. 과연 제 힘을 알지 못하였군. 자신을 헤아리지 못했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네.

-한 구덩이에는 다른 흙이 없다(그놈이 그놈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 (설두)스님은 그 스님과 동

  참하고 있군.


간택함이여!

-강가에서 물장사를 하네. 무슨 말하느냐? 조주스님이 왔다.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로다.

-벌써 말 이전에 있다. (설두스님과 조주스님을)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다.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너의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평창)

설두스님은 두 구절(천상천하와 이 맹추)에 주석을 붙여서 “바다처럼 깊고 산 같이 견고하다”라

고 했다. 스님이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라고 말하자, 설두스님은 그 스님을 평하기를 “모기나

등에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고,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

다. 설두스님이 스님의 큰 담력을 칭찬한 것은 상근기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스님이 감히 이처럼 말하자 조주스님도 그를 놓아주질 않고 바로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

이냐?” 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나운 바람과 무쇠기둥이 아니겠는가.

“간택이여!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로다”라는 것은 설두스님이 맨 끝에 들춰내서 살아나게 한 것이

다. 만일 이를 명백하게 안다면 충분히 그 스님 스스로가 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였느냐, ‘친히 간절하게 하고저 한다면 언어문구를 가지고 묻지 말라’고 했던

말을. 그러므로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