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칙 풍혈(風穴)스님의 한 티끌을 세운다면
(수시)
법당(法幢)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세우는 일은 본분종사에게 돌려야 할 터이지만, 용과 뱀을 판
정하고 흑백을 분별함은 작가 선지식의 일이다.
칼날 위에서 살리고 죽이는 것을 논하고 몽둥이질할 때에 그 기연의 마땅함을 분별하는 경지는
그만두고, 홀로 법왕궁에 노니는 일구(一句)는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를 말해보라. 거량해보리라.
(본칙)
풍혈(風穴)스님이 법어를 했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렸다. 그렇지만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되어야 한다.
“한 티끌을 세우면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자재롭다. 꽃도 수북, 비단도 수북하다.
나라가 흥성하고,
-저 집안(임제스님 문하)의 일은 아니다.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종적을 쓸어 없앤다. 눈동자를 잃어버렸는데 목숨까지도 잃었다.
나라가 멸망한다.”
-모든 곳에 광명이 있다. 나라를 거들먹거려 무엇 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그 집안의 일이다.
설두스님은 주장자를 들고서 말하였다.
-모름지기 천 길 벼랑이어야 한다. 달마스님이 왔구나.
“생사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그러나 불평스러운 일을 공평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설두스님에게 헤아
려야 된다. 알았느냐? 아침에 3천 방망이, 저녁에 8백 방망이를 치겠다.
(평창)
에, 풍혈스님이 대중 설법을 하였다.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
면 나라가 멸망한다”하였는데, 말해보라, 한 티끌을 세워야 옳은지, 세우지 않아야 옳은지를. 여기
에 이르러서는 대용(大用)이 눈 앞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설령 언어 이전에 깨달아도 한 껍
질 남아 있고 경계에 걸리며, 비록 말 떨어지자마자 통달한다 해도 경계에 부딪치고 미친 견해임
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임제스님 회하의 큰스님이므로 곧 본분의 솜씨를 부린 것이다. 한 티끌을 세워 나라가 흥성
하여도 촌 늙은이는 이맛살을 찡그린다. 그 뜻은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안녕하게 하는 데에는 반
드시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기린이 나오고 봉
황이 나오니 바로 태평성대의 상서이다. 그러나 세 집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의 사람이 이러한 일
을 어떻게 알겠는가?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여 찬바람만이 쓸쓸히 부는데 촌 늙
은이가 무엇 때문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겠는가? 나라가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동산스님 문하에서는 이를 “몸 피하는 곳〔轉變處〕”이라 하나, 부처도 중생도 없으며 옳고 그름
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으며 소리와 자취마저도 끊겼다.
그러므로 “황금가루가 아무리 귀하여도 눈에 들어가면 눈병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또한 “금가
루도 눈에 병이 되고 옷 속에 감춰놓은 구슬도 법엔 티끌이다. 자신의 신령함도 중히 여기지 않는
데, 부처니 조사니 다 뭐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종횡자재하고 신통 묘용(神通妙用)이 있다 해도
기특할 게 없다. 여기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봉두남발한 채 만사를 다 쉬어야 한다.
이때는 산승도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만일 또다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며 현미(玄微)함을
말하고 오묘함을 말하여도 모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에 스스로 신선의 경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전(南泉)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황매산(黃梅山) 7백 고승은 모두가 불법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五祖〕의 의발(衣鉢)을 얻
지 못하였으나, 노행자(盧行者)만은 불법을 알지 못하였기에 의발을 얻었다.”
또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음〔有〕을 알지 못하고 이리와 흰 암물소가 도리어 있음〔有〕을 안
다.”
촌 늙은이가 이맛살을 찡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를 하기도 한다. 말해보라, 이를 어떻게 이해
하여야 할지. 그는 무슨 안목을 갖추었기에 이럴 수 있을까? 그러나 촌 늙은이의 문 앞에는 따로
이 조장(條章 :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두스님이 쌍으로 제시한 후 문득 주장자를 들고서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고 하였는데, 당시
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한마디를 말해 상대를 해주었다면 설두스님 이 늙은이가 뒤에 자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송)
촌 늙은이가 설령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 해도
-삼천 리 밖에 한 사람이 있다.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자에게는 걸맞지 않다.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태평곡 한가락에 모두가 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문다. 온 건곤 대지가 해탈문
인데 그대는 무엇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가?
지모 있는 신하들과 용맹스런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있느냐, 있느냐? 땅은 드넓고 사람이 없으니 참사람 만나기는 어렵지. 자만말라.
만 리에 맑은 바람부니 자연 알게 된다.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방자하구나. 누구에게 땅을 쓸게 하랴? 운거 나한(雲居羅漢)처럼 교만한
놈이로군.
(평창)
앞(본칙)에서는 쌍으로 제시하더니만 여기(송)에서는 한쪽은 제기하고 한쪽은 생략해버리니, 이는
긴 부분을 잘라서 짧은 곳을 보완하고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쪽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촌 늙은이가 설령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해도, 나는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
고자 하는데, 지모있는 신하와 용맹스런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하였다.
설두스님이 주장자를 들고서 “또한 생사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고 한 것은 “지모 있는 신하
와 용맹스런 장수가 있느냐?”고 말한 것처럼 한 입으로 모든 사람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중읍(中邑)스님은 “땅은 드넓고 사람은 적어 참사람 만나기 힘들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의 의중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한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 “만
리에 맑은 바람 부니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은 설두스님 스스로가 자만하는 것이다.
'벽암록(碧巖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63칙 남전의 고양이를 벰〔南泉斬猫〕 (0) | 2008.03.03 |
---|---|
제62칙 운문의 보물 한가지〔雲門一寶〕 (0) | 2008.03.03 |
제60칙 운문의 주장자〔雲門拄杖〕 (0) | 2008.03.03 |
제59칙 조주의 지극한 도〔趙州至道〕 (0) | 2008.03.03 |
제58칙 조주의 함정〔趙州窠窟〕 (0) | 2008.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