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7칙 운문의 호떡〔雲門餬餅〕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1:31
 

 

 

제77칙 운문의 호떡〔雲門餬餅〕

         

(수시)

머무름 없이 초월해가면〔向上〕 매가 비둘기를 낚아채듯 천하 사람의 콧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며, 머물러 매이게 되면〔向下〕 거북이 껍데기 속에 몸을 숨긴 것처럼 자기의 목숨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

만약 문득 어느 사람이 나와서 “본디 향상(向上)과 향하(向下)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말한다면 그에게 말하리라. “나도 아노라. 그대는 귀신 굴 속에서 살람살이하는 줄을.”

말해보라, 무엇이 흑백을 분별하는 것일까? (원오스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말하였다. “조문(條文)이 있으면 조문을 따르고 조문이 없으면 예규(例規)를 따르라.”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틈새가) 벌어져 있군. 맑은 하늘에 갑자기 우레치는 소리다. 내질러라!

“호떡!”

-혀끝이 윗잇몸에 딱 붙어 (말을 못하는군). (자취마저도 싹) 사라졌다.


(평창)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스님은  “호떡!” 이라고 말하였는데, 머리털이 쭈뼛이 솟구쳐 오름을 느꼈느냐? 납승들이 부처를 묻고, 조사를 묻고, 선(禪)을 묻고 도(道)를 묻고, 향상(向上)을 묻고 향하(向下)를 묻다가,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으면 이제는 질문의 단서를 일으켜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묻는다.

운문스님은 작가였다. 강물이 깊으면 배가 높이 뜨고, 진흙이 많으면 불상이 크게 마련이다. 그래서 운문스님은 “호떡!”이라고 답하였다. “도란 아무렇게나 행하여지지 않고, 공이란 헛되이 베풀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운문스님은 다시 대중 법문을 하였다.

“그대들은 조작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대들은 무엇을 부처라고 하며, 무엇을 조사라고 여기기에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삼계(三界)를 벗어난 것을 물었으니, 그대들은 삼계를 가져와봐라. 무슨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길래 그대들에게 장애가 되었으며, 무슨 성색(聲色)과 불법(佛法)이 있길래 그대들을 깨쳐줄 수 있었으며, 무슨 장애가 있길래 차별적인 견해를 지었는가?

옛 성인들은 그대들을 어찌할 수가 없는 나머지 몸을 가로누여 사람을 지도하면서 ‘전체가 모두 그대로 참다우며, 사물마다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고 말하였지만, 실로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운문스님 자신),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일삼음이 있다 하면 벌써 잘못되어버린다.”

이 말을 안다면 바로 “호떡”이라 한 의도를 알 것이다. 오조법연(五祖法演)스님께서는 “말똥을 사향에 비교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중도가」에서) “곧바로 근원을 끊는 것은 불조가 인가한 바이며,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건 나는 못한다”고 한 그것이다. 이 근원을 끊는 것을 몸소 간절히 얻고자 한다면 물음을 가지고 묻지를 말라.

이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스님이 ”호떡“이라고 말한 것을 보고서, 수치스러움을 알고 또한 잘못 했는 줄을 느꼈느냐?

사람들이 제멋대로 꾸며 “운문스님이 토끼를 보자마자 매를 날려 곧바로 호떡이라고 말했다”고 하나, 이처럼 ‘호떡’을 가지고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이라는 견해를 낸다면 어찌 살길이 있겠는가? 호떡이라는 것도 알려 하지 말고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다는 것도 알지 않는 그것이 살길이다. 이는 삼 세 근〔麻三斤〕과 북칠 줄 안다.〔解打鼓〕는 것과 한가지이다. 비록 그저 ‘호떡’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후세 사람들은 흔히들 이를 이러니 저러니 말로 따져서 말하기를 “거친 말과 자세한 말 모두가 제일의(第一義)로 귀결된다”고 한다. 이처럼 이해한다면 강석(講席)의 좌주(座主)가 되어 일생동안 수많은 알암알이를 감싸고 있게 되리라. 요즈음 선승들은 “부처와 조사를 초월할 때는 모든 부처님도 발밑에 밟혀 있으며, 조사도 발밑에 밟혀 있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이 호떡이라고 말하였다”고 하지만, 호떡이 어떻게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세히 참구해보도록 하라. 총림의 송이 지극히 많으나 모두가 문 앞에 어정거릴 뿐인데, 오로지 설두스님의 송이 가장 좋으니, 들어보아라.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초월한 말을 묻는 선객이 매우 많은데

-모두들 이런 견해를 내는구나. 삼대처럼, 좁쌀처럼 많구나.


틈새가 여기저기 터진 것을 보았느냐?

-이미 말 이전에 있다. (틈새가) 벌어졌구나. 자기의 똥냄새가 구린 줄을 모르는구나.


호떡으로 (입을) 틀어막았는데도〔������〕1) 오히려 긍정하지 못하고

-염주알로 그대의 눈동자와 바꿔버렸다.


천하엔 지금까지도 잘못 알고 있네.

-(원오스님은) 원상(圓相)을 그린 후 말하였다. 이렇게 이해하지 말아라!

남의 말이나 씹으면 언제 깨칠 날이 있겠느냐? 근심하는 사람이 온 대지에 아득하게 깔려  있구나.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초월한 말을 묻는 선객이 매우 많다”는 말은 선승들이 묻기를 매우 좋아한 말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운문스님의 말을.

“여러분은 주장자를 비껴 지고 스스로 참선하며 도를 배운다고 말하고서,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려는 도리를 찾는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겠다. 하루종일 행주좌와와 똥싸고 오줌누는 것과 똥통의 구더기와 저자의 염소고기 파는 가게의 탁자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도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도리가 있는가? 말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그러나 없다면 내가 횡설수설한다고 비방하지 말라.”

운문스님은 말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와버렸다.

어떤 사람은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하지 못하면서 원상(圓相)을 만드는데, 이는 흙 위에 진흙을 더하고, 목에 칼을 쓰고 수갑을 더하는 격이다.

“틈새가 여기저기 터진 것을 보았느냐”는 것은, 그의 물음에는 상당히 많은 틈이 나 있었다. 운문은 그의 물음이 빈틈이 많은 것을 보았기에 호떡을 가지고 틈을 메우려 했지만 스님은 오히려 긍정하지 않고 다시 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호떡으로 채워주었는데도 오히려 긍정하지 않아 천하에 지금도 잘못 알고 있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선객들은 오로지 호떡을 이해하려 하거나, 아니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만 한다. 이 두 입장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30년 뒤에 산승이 다시 뼈를 바꾸어 나왔을 때 그대들에게 말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