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8칙 열여섯 보살이 물의 성질로 깨달음〔開士水因〕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1:32
 

 

 

제78칙1) 열여섯 보살이 물의 성질로 깨달음〔開士水因〕


(본칙)

옛날에 열여섯 보살〔開士〕이 있었는데,

-한 무리를 이룬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한 떼거리의 멍청한 놈들아.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여느 때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눈앞에 빤히 보이는) 노주(露柱)에 부딪쳤구나. 먹통아, 무엇 하느냐.


홀연히 물의 인연을 깨쳤다.

-갑자기 더러운 물을 끼얹었다.


모든 선덕(禪德)들이여, 저네들이 “오묘한 감촉 또렷이 빛나며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어떻게 그를 이해해야 할까? 쳐서 떨어뜨리는 물방울이 다른 물건이 아니다(모두 법왕의 몸이다).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라고 말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천하의 납승들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찾지 못하는구나. 횡설수설해서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모름지기 종횡으로 자재해야만이 비로소 그처럼 할 수 있다.

-매를 칠 때마다 매맞은 자국이 분명하다. 산승을 저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딱딱 맞아떨어 지는구나. 일찍이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을 친견했느냐?


(평창)

능엄회상(愣嚴會上)에서 발타바라(跋陀婆羅)보살이 열여섯 보살과 함께 각기 범행(梵行)을 닦으며 각기 깨친 원통법문(圓通法門)의 인(因)을 말하였다. 이는 25원통(二十五圓通) 가운데 하나이다.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여느 때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수인삼매(水人三昧)를 깨치고 말하였다.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으며, 몸을 씻지도 않았다.”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이를 안다면 늘 편안하여, 있는바 없음〔無所有〕을 얻어,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얻은 바도 없다”는 것이니, 이는 참다운 반야(般若)이다. 만일 얻은 바 있다면 이는 사이비 반야(般若)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달마스님이 이조(二祖)스님에게 말한 것을.

“편치 못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편안함을 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아도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납승의 성명(性命)의 근본이니, 결코 허다한 갈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홀연히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것만 소화하면 자연히 깨칠 수 있을 것이다.

“6진도 씻지 않았으며, 몸도 씻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 경지에서는 한 점도 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 불(佛)자를 말해서도 안된다.

그는 말하기를 “오묘한 감촉〔妙觸〕 또렷이 빛나며〔宣明〕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라고 했는데, 선(宣)이란 밝게 나타남이며, 오묘한 감촉이란 밝음〔明〕이다. 오묘한 감촉을 깨쳤다면 부처님의 아들이 되어 곧 부처의 경지에 머문 것이다.

요즈음 사람 또한 목욕하기도 하고, 물로 씻기도 하면서 이처럼 만지는데 무엇 때문에 깨닫지를 못할까? 이는 모두가 6진(六塵) 경계의 미혹에 가리고 끈끈한 피부가 뼈에 달라붙은 듯 집착하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씻어도 얻은바 없으며, 물을 만져도 얻은 바 없고, 수임삼매 또한 얻은 것이 없다. 말해보라, 이는 오묘한 감촉이 또렷이 밝은 것인가, 아닌가를. 이를 똑바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오묘한 감촉으로 부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 또한 물을 만지는데 오묘한 곳을 보았느냐. 오묘한 감촉이란 일반적인 감촉이 아니라, 감촉한 사람과 서로 합하면 감촉이라 하지만, 여의면 아니다.

현사(玄沙) 스님이 산마루를 넘다가 돌부리에 발가락이 부딪친 일, 또는 덕산의 방망이도 오묘한 감촉이 아니겠느냐. 이처럼 자유자재하여야 비로소 이처럼 할 수 있는데 만일 (오묘한 촉감을) 몸에서만 찾는다면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대들이 자유자재하다면 굳이 목욕하러 들어간 것에만 한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 터럭 끝에 보왕(寶王)의 세계가 출현하고, 미세한 티끌 속에 큰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을 것이다. 한 곳을 꿰뚫으면 천곳 만곳이 일시에 꿰뚫리니 고집스럽게 하나의 소굴만을 지키지 말라. 모든 곳이 다 관음(觀音)이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다.

옛사람은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였고, 색(色)을 보고 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한 사람이 깨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어떻게 해서 열여섯 보살이 동시에 깨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옛 사람은 함께 닦고 함께 증오하였으며, 함께 깨닫고 함께 이해하였던 것이다.

설두스님은 교학(敎學)의 이야기를 들어 사람들이 오묘한 감촉이 있는 곳을 이해하도록 했다. 교학의 안목을 발휘하여 송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교학의 그물〔敎綱〕에 덮여 반은 취하고 반은 술 깬 상태에서 벗어나 대뜸 말끔하고 고준한 경지로 나아가게 해주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생사의) 일을 마친 납승은 한 사람이다.

-지금 한 명이 있군. 아침에는 3천 번 저녁에는 8백 번을 쳐야겠다. 금강의 우리에서 뛰어  나왔으니 한 명도 없군.


긴 침상 위에 다리 펴고 누웠네.

-예상했던 대로 이는 조는 놈이구나. 영원토록 선(禪)을 논하지 못한다.


꿈속에서 원통(圓通)을 깨달았다 말하니

-벌써 졸았으면서 또다시 꿈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대가 꿈속에서 보았다고 인정이야 하겠  지만, 잠꼬대해서 무엇 하려고.


향수로 씻었다 해도 낯짝에 침을 뱉으리라.

-쯧쯧! 흙 위에 진흙을 한 겹 더하였구나. 깨끗한 곳에다 똥싸지 말라.


(평창)

“(생사의) 큰 일을 깨달은 납승은 그저 한 명뿐이네”라고 했는데, 무슨 일을 끝마쳤다는 것인지 말해보라. 작가 선객이라면 거량하자마자 눈썹을 치켜 세우고 곧바로 떠나가버릴 것이다. 이같은 납승 한 사람만이 필요할 뿐, 한 떼거리 무리를 이룬들 무엇 하겠는가?

“긴 침상위에 다리 펴고 누웠다”는 것은 옛사람〔來山善會〕스님의 말에


분명하고 분명하여 깨달은 법 없는데

깨닫는다고 하면 도리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니

두 다리 쭉 펴고 잠자노라.

거짓도 없고 참도 없구나.


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가슴속에 (무심하게) 일삼지 말고 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밥먹는 것이다.

설두스님의 뜻은 “그대가 목욕하러 들어가서 오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밝음〔宣明〕을 깨달았다 말한다면, 그것은 무심하여 일삼지 않는 납승의 본분에서는 마치 꿈속에서 꿈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이어 “꿈속에서 원통을 깨달았다 말하니, 향수로 씻었다 해도 얼굴에 침을 뱉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는 더러운 물을 갑자기 끼얹는 것과 같을 뿐인데, 무슨 원통(圓通)이니 어쩌니 할 수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이러한 놈에겐 당장에 얼굴에다 침을 뱉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승은 곧 “흙 위에 흙을 한 겹 더한 격이다”고 말한 것이다.

1)제78칙에는 [수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