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80칙 급한 물살 위로 공을 쳐서〔急水上打毬〕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1:40
 

 

 

제80칙1) 급한 물살 위로 공을 쳐서〔急水上打毬〕


(본칙)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갓 태어난 아이도 6식(六識)을 갖추고 있습니까?”

-번뜩이는 번갯불 기봉이다. 왜 갓 태어난 아이를 말하느냐.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

-지나가버려 (자취도 없다). 훌륭한 매가 쫓아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그래도 (이 스님을) 시험해보아야지.


스님은 다시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래도 작가와 함께 시험하는구나. 지나가버려 (자취도 없다).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망상분별을 짓는 놈아!


(평창)

교학가(敎學家)에서는 이 6식(六識)을 참된 근본〔正本〕으로 삼는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이로 인해서 발생되니, 태어날 때는 선봉이 되고, 죽을 때는 맨 뒤를 따른다. 옛사람의 말에 “삼계(三界)는 마음일 뿐이며, 만법(萬法)은 식(識)을 뿐이다”고 하였다. 부처의 경지〔佛地〕를 깨치면서 8식(八識)은 4지(四智)로 바뀌는데, 교학에선 이를 두고 ‘이름은 바뀌었지만 본체는 그대로’라고 한다.

6근(六根)․6진(六塵)․6식(六識)의 3법에서 전진(前塵)은 원래 판단작용을 못하며 승의근(勝義根)이 식(識)을 일으키며 식이 색(色)을 나타내어 분별한다. 바로 이것이 제6의식(第六意識)이다.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은 세간 일체의 영상(影像)을 간직하여 사람을 번뇌케 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이는 모두 제7식(第七識)이다. 제8식(第八識)은 이를 아뢰야식(阿賴耶識), 또는 함장식(含藏識)이라 한다. 이는 모든 선악의 종자를 머금고 간직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스님은 교학의 뜻을 알았으므로 이를 가지고 조주스님에게 “갓 태어난 아이도 6식을 갖추고 있습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6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수는 있다. 그러나 6진(六塵)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길고 �음과 옳고 그름과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는 전혀 모른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영예, 오욕, 공명, 역정 순경(逆情順境)이 모두 그를 동요시키려 해도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눈으로 색(色)을 보아도 장님처럼,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처럼 하여 마음이 수미산처럼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납승들이 참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옛사람(석두스님)은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만사를 쉬니 이때 산승은 아무것도 모른다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더라도 겨우 조금 상응됨이 있을 뿐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한 점도 속일 수 없는데야 어찌하겠는가.

산은 여전히 산이며, 물은 여전히 물이다. 이 자리는 조작이 없으며 헤아리거나 생각도 없다. 마치 일월이 허공에 운행하듯이 잠시도 멈추지 않으며, 또한 일월 스스로 허다한 이름〔名〕과 모습〔相〕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하늘이 두루 덮어주고 땅이 널리 만물을 실어주는 것처럼, 마음이 없기에〔無心〕만물을 키운다. 그러면서도 일월 스스로가 많은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천지는 무심하기에 영원하다. 마음이 있었다면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다. 도를 얻은 사람 또한 이와 같다. 공용(功用)이 없는 데에서 공용을 베풀며, 모든 역경(逆境)이건 순경(順境)이건 모조리 자비의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스스로 경책하기를  “깨치고 깨치고 깨쳐서 깨친다는 것도 없고, 그윽하고 그윽하더라고 (이 경계를) 당장에 꾸짖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일〔事〕마다 통하고 물(物)마다 분명하지만 통달한 자는 이 말을 들으면 어둠 속에서 깜짝 놀라리라”하였고, 또한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면서 소리조차 내지 않으니 가만히 있는 용은 푸른 못이 맑을까 못내 두려워하네. 인생이 오래도록 이같을 수만 있다면 대지에 어느 누가 한 이름인들 남기랴”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또한 이 소굴에서도 뛰어나와야만 한다.

왜 듣지 못하였느냐, 교학(「화엄경」십지품)의 말을.

“제8 부동지보살(第八不動地菩薩)이 공용(功用)이 없는 지혜로 한 티끌 속에서 큰 법의 바퀴〔法論〕를 굴리어, 언제나 행주좌와함에 득실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지혜의 바다로 들어간다.”

납승들은 여기에 이르러서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단 시절을 따라 자재하면서 차 마실 때 차 마시고, 밥 먹을 때 밥 먹을 뿐이다. 이 끝없는 초월의 노정〔向上事〕은 선정(禪定)이라는 글자를 붙여서도 안 되며, 선정이 아니라는 글자를 붙여서도 안된다.

석실 선도(石室善道)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보지 못하였느냐? 어린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 일찍이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안다고 말하더냐? 이때는 불성(佛性)이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른다. 점점 크면서 갖가지 알음알이〔知解〕를 배우고서 ‘나는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객진(客塵) 번뇌인 줄을 모른 것이다. 16관행(十六觀行) 가운데에서 어린아이의 무심한 행동〔嬰兒行〕을 으뜸으로 여긴다. 이는 어린아이가 으앙거리고 우는 그때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분별과 취사(取捨)의 마음을 여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찬탄하여 비유를 취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도(道)라 한다면 그것은 요즈음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남전스님은 “나는 열여덟 차례나 살림살이를 할 줄 알았다”하였고, 조주스님은 “열여덟 차례나 집안을 망하게 할 줄 알았다”고 하였으며, 또한 “나는 남방에서 20년동안 있으면서 죽과 밥을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을 잡되게 썼다”고도 말하였다.

조산(曹山)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보살이 선정(禪定) 속에서 향기 나는 코끼리〔香象〕가 강 건너는 소리를 역력히 듣는다 하였는데, 이는 어느 경전에서 나왔느냐?”

“「열반경(涅槃經)」입니다.”

“선정에 들기 이전에 들었느냐, 선정에 든 뒤에 들었느냐?”

“화상이 떠내려 갑니다.”

“여울물에서 잡도록 하라.”

또한 「능엄경(楞嚴經)」에서는

“고요히 6식에 들어가 슬며시 8식에 잠긴다”하였고,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상생(相生)은 집착의 장애이며 상생(想生)은 망상이며, 유주생(流注生)은 허망을 좇아 유전(流轉)한다”고 하였다. 만일 공용(功用)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해도 유주상(流注相) 가운데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제3유주생상(第三流注生相)을 벗어나야 쾌활스럽게 자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혜적(慧寂)아, 요즈음 어떻게 지내느냐?”

“스님께서는 그 견해(見解)를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행해(行解)를 묻는 것입니까? 행해를 묻는다면 모르겠지만, 견해람녀 한병의 물을 다른 한병에 붓는 것처럼 차별이 없습니다.”

이와 같으면 참으로 한 지방을 지도할 만한 스승이 될 수 있다.

조주스님은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고 말하였다. 이는 벌써 동글동글 구르면서 다시 급류 위에서 공을 치니,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이를 비유하면 「능엄경」의 말과 같다. “급류의 물을 바라보면 편안하고 고요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말에 “비유하면 급히 흐르는 물〔馬史2)流水〕처럼 끝내 그침이 없이 흐르면서도 각각 서로를 모르는 것과 같다. 모든 법도 이와 같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의 답변은 곧 이와 같다고 하겠다.

스님은 또다시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한순간도 흐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는 천연스럽게도 그가 물었던 곳과 매우 잘 맞았다. 옛사람의 경지는 주도면밀하여 대답이 하나같이 일치되어, 결코 계교를 하지 않는다. 묻기만 하면 벌써 그 선지식들은 귀착점을 알아 버렸다. 어린아이의 6식이란 공용(功用)이 없기는 하나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투자스님이 이와 같이 대답하였으니, 상대방의 면모를 잘 분별한 것이라 말할 만하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꾸밈〔功用〕 없는 6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니

-눈이 있어도 봉사와 같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와 같다.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고 밝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다.


두 작가가 모두 상대의 핵심을 분별하였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흑백을 분별해야지. 깨쳐야만 알 수 있다.


아득한 급류에서 공을 치나

-시종일관이군. 지나가서 (흔적도 없다). 무슨 말 하느냐.


멈추지 않으니 떨어진 곳을 그 누가 알랴.

-보았다가는 눈이 먼다. 지나가서 (흔적도 없다). 여울물 아래에서 잡아라.


(평창)

“꾸밈없는 6식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고 하였는데, 옛사람이 도를 배워 이런 경지에 이르도록 수양하는 것을 “꾸밈 없는 공용”이라 한다. 이는 어린아이와 한가지로서, 눈․귀․코․혀․몸․의식이 있으나 육진(六塵)을 분별하지 못하니, 이는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화룡(火龍)을 항복 받고, 호랑이를 조복(調伏)하며, 앉아 입적하거나 서서 입적하거나를 자재할 것이다. 요즈음 사람도 눈앞의 모든 경계를 일시에 쉬어 버리면 된다. 어찌 8지(八地) 이상의 보살만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꾸밈이 없는 자리는 여전히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설두스님이 앞(41칙)에서 “삶 속에 있는 눈도 죽음과 같다. 약 먹을 때 함께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으로 어찌하여 작가를 비춰보느냐”고 송(頌)하였는데, 조주스님과 투자스님은 작가였다. 그러므로 “두 작가가 모두 핵심을 분별한다”고 하였다. “아득한 급류에서 공을 쳤다”고 하니 투자스님은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러분은 귀결점을 아는가? 설두스님은 맨 끝에서 스스로가 착안해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멈추지 않으니 떨어진 곳을 그 누가 알랴”고 말하였다.

이는 설두스님의 활구(活句)이다. 말해보라, 귀결점은 어디에 있는가를.

1)제80칙에는 [수시]가 없다.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