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85칙 동봉의 호랑이 울음소리〔桐峰虎聲〕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3:46
 

 

 

제85칙 동봉의 호랑이 울음소리〔桐峰虎聲〕


(수시)

세계를 거머쥐어 털끝만큼도 번뇌가 생기지 못하게 하며, 온누리의 사람들이 손도 못 대고 입을 다물게 하는 이는 납승의 바른 법령이다. 정수리〔頂門〕에서 빛이 쏟아져 사천하(四天下)를 비추니 이는 납승의 금강의 눈이다. 무쇠를 두드려 황금으로 만들고 황금을 담금질하여 무쇠를 만들기도 하여 홀연히 사로잡고 홀연히 놓아주기도 하니 이것은 납승의 주장자이다. 천하 사람의 혀끝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여 끝내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도록 하고 3천 리 밖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납승의 기상이다.

말해보라, 도무지 위와 같이 하지 못할 때는 결국 어떠한 사람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느 스님이 동봉암주(桐峰庵主)의 처소에 이르러 물었다.

“여기에서 느닷없이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어찌합니까?”

-아이고 작가 선지식님, 회롱하시는구려. 잡초더미 속에 한 마리는 커녕 반 마리도 없다.


암주가 대뜸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자,

-점점 잘못돼가네. 그래도 이빨과 발톱은 있구나. (서로) 생사를 함께 하는군. 말을 들었으  면 반드시 종지를 알아야지.


스님은 바로 겁먹은 시늉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진흙덩이를 희롱하는 놈이다. 문제의 핵심을 보고서 움직이는구나. 비슷하긴해도 옳지는 않다.


암주가 껄껄대며 크게 웃자,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웃음 속에 칼이 있다. 놓아줄 수도 있고 잡아 들일 수도 있다.


스님은 말하였다.

“이 도적아!”

-그렇지만 제대로 알아야지, 잘못했다. 둘 다 모두 놓쳐버렸다.


“노승을 어떻게 하겠느냐.”

-따귀를 후려쳤군. 애석하군. 놓아주다니


스님은 그만두었다.

-결국 그만두다니. 둘 다 깨치지 못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옳기는 옳지만, 어리석은 도둑처럼 자신의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칠 줄만 아는구나.”

-(심금을 울리는) 그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다. 설두스님에게 점검을 당하였군. 말  해보라, 당시에 어떻게 했어야 점검을 면할 수 있었을까? 천하의 납승이 (누구도 그 경계   에) 이르지 못했다.


(평창)

임제스님〔大雄宗派 : 대웅은 百丈을 지칭〕의 문하에서 대매(大梅)․백운(白雲)․호계(虎溪)․동봉(桐峰) 등의 네 암주가 배출되었다.

두 사람을 살펴보니, 이처럼 눈으로 직접 보고 손수 분별하였다. 말해보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옛사람의 한 기틀〔一機〕, 한 경계〔一境〕와 한 말〔一言〕, 한 구절〔一句〕이 이처럼 수시로 나온다 해도 안목이 빈틈없고 바르다면 반드시 생기발랄한 경지가 있을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를 말해 사람들에게 삿됨과 올바름을 알게 하고 잘잘못을 분별하게 하였다. 그러나 달인(達人)이라면 잘잘못에 처하여서도 잘잘못이 없다. 만일 잘잘못으로 옛사람을 살펴본다면 완전히 틀린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잘잘못이 없는 경지에 끝까지 이른 뒤에 잘잘못으로 남을 분별해야만 한다. 만일 그저 언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데에만 마음을 쓴다면 어느 시절에 깨달을 날이 있으랴.

듣지 못하였느냐, 운문스님의 말을.

“행각승들과 괜히 이 고을 저 고을을 넘나들면서 유람하지 말라. 부질없는 말을 늘어놓아 노스님이 뭐라고 하길 기다렸다가 대뜸 선(禪)을 묻고 도를 묻고, 향상과 향하가 어떻느니 저떻느니 지껄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방대한 소초(疏抄)를 뱃속에다 꼭꼭 채워두고 이를 헤아리면서, 이르는 곳마다 화롯가에서 삼삼오오 머리를 마주하고 재잘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그리하여 (소초의) 이 말은 귀공자의 재치있는 말이라고 하기도 하며, 몸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현상의 일〔事〕을 이야기한 말이라는 둥, 몸 속의 본분에서 한 말이라는 둥 하면서, 이 집안의 아비와 어미(주인공)를 체득하려고 한다. 밥먹고 나면 오로지 꿈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불법을 알았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이처럼 행각했다가는 나귀 해〔馬盧年 : 12간지 중에 이런 간지는 없다〕가 되어야 만이 망상을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옛사람이 잠시 들어 희롱했다지만 어찌 승부․득실․시비 따위의 견해가 있겠는가?

동봉스님은 임제스님을 친견했다. 그때는 깊은 산에다 암자를 짓고 살 때였다. 어느 스님이 그곳에 이르러 마침내 물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어찌하시렵니까?”

동봉스님이 호랑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이는 호랑이를 이용하여 멋지게 응수한 것이다. 스님 또한 이를 알고서 잘못을 가지고 더더욱 잘못으로 나아가 바로 겁먹은 시늉을 하였다. 암주가 껄껄거리며 크게 웃자, 스님은 말하였다.

“이 도적아!”

“노승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는 옳기는 옳지만 둘 다 깨닫지 못하여, 천 년이 지난 뒤에 남의 점검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옳기는 옳았지만 어리석은 두 도적이 귀를 막고 방울을 도적질할 줄만 알았다”고 말하였다. 그 두사람은 모두 도적으로서 중요한 문제에 당면했으면서도 어찌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귀를 막고 방울을 도적질한 것이다. 두 늙은이는 마치 백만 군사의 진영을 배열해놓고서 문득 빗자루 하나를 다투는 꼴과 같았다. ‘이 일’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솜씨가 있어야 한다. 만일 그저 잡아들이기만 하고 놓아줄 줄 모르며, 그저 죽이기만 하고 살릴 줄을 모른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잡다함이 없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일을 살펴보면 (두 사람은) 문제의 핵심을 알고 움직였다. 오조(五祖)스님께서도 이를 ‘신통유희삼매(神通游戲三昧), 혜거삼매(慧炬三昧), 장엄왕삼매(莊嚴王三昧)’라 말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살펴보지도 못하면서 옛사람을 점검하며 문득 득실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분명히 암주가 손해를 보았다”고들 하지만,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설두스님은 “두 사람의 만남에는 모두 놓아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여기에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어찌하시렵니까?”하자, 동봉암주가 대뜸 호랑이 울음소리를 냈던 것도 놓아버린 것이며, “노승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도 놓아버린 것이다. 이는 분명 제이기(第二機)에 떨어진 것이다.

설두스님은 “쓰고 싶으면 바로 쓴다”고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당시에 보기 좋게 법령을 시행했어야 했는데 ”라고 말하지만, 봉사가 몽둥이 휘두르듯 얼토당토 않은 짓을 하지 말라.

덕산스님의 경우는 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대뜸 방망이질을 하였고, 임제스님은 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갈(一喝)을 하였는데, 말해보라, 그들의 뜻은 무엇이었는가를.

설두스님은 뒷면에서 이와 같은 점을 송하였다.

말해보라, 필경 어떻게 해야 귀를 막고 방울을 도둑질하는 것을 면할 수 있을는지를. (설두스님은) 송하였다.


(송)

(호랑이를) 보고서도 잡아들이지 못하면

-빗나가버렸다. 벌써 천 리 만 리 밖이다.


천 리 밖에 가서야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 조심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구나. 아이고, 아이고!


(호랑이의) 얼룩진 무늬는 아름다운데

-(설두)화상아, 냄큼 꺼져라! 사용할 줄을 모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발톱과 이빨을 갖추지 못하였네.

-사용할 곳이 분명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발톱과 이빨이 갖추어지걸랑 그대에게   말해주리라.


그대는 보지 못하였느냐, 대웅산 아래에서 홀연히 만나보니

-조문이 있으면 조문을 따르고 조문이 없으면 예규를 따라라.


우렁찬 소리와 광채가 모두 대지를 진동했던 것을.

-이 호랑이가 이렇구나. 그래도 조금 멀었다. 몇이나 대장부일까?


대장부는 보았느냐?

-노파심이 간절하군. 눈을 뜰 줄 안다면 생사를 함께 하리라. 설두스님이 언어문자로 따지  네.


호랑이 꼬리를 잡고 호랑이 수염을 뽑았노라.

-갑자기 뛰쳐나오면 어떻게 잡을까? 천하의 납승을 여기에다 가두어두었다. 홀연히 한 사람이 나오면 한 번 내지르겠다. 그러나 만약 잡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서른 방망이를  놓아 그대들에게 몸을 비끼게 하여 한마디하도록 하겠다. 으랏샤!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   한다. 왜 도적놈이라고 말하지 않느냐?


(평창)

“보고서도 잡아들이지 못하면 천 리 밖에 가서야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은 위험을 당하고도, 도무지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노승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을 때 보기 좋게 본분의 솜씨를 내놓았어야 했는데, 당시에 이러한 수단을 쓸 수 있었다면 반드시 그(암주)는 뒤에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놓아줄 줄만 알았지, 잡아들일 줄은 몰랐었다.

보고서도 잡지 않으면 흰 구름은 멀리 만 리나 흘러가 버리는데 다시 무슨 “천 리 밖에 가서야 그리워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얼룩진 무늬는 아름다운데 발톱과 이빨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옳기는 옳지만, 호랑이가 이빨과 발톱을 감출 줄은 알았어도 사람을 물 줄 모른 데야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듣지 못하였느냐, 대웅산 아래에서 홀연히 만나보니 우렁찬 소리와 광채가 모두 대지를 진동했던 것을”이라 한 것은, 하루는 백장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산 아래 버섯 따러 갔다옵니다.”

“호랑이를 보았느냐?”

황벽스님이 문득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자, 백장스님이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어 찍는 시늉을 하니, 황벽스님은 백장스님을 잡아 쥐고 따귀를 후려쳤다.

백장스님이 저녁에 상당하여 말하였다.

“대웅산 아래 호랑이가 있다. 그대들은 출입하면서도 잘 살펴보도록 하라. 오늘 노승은 한 차례 직접 물렸다.”

그 뒤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의 호랑이 화두는 어떠한가?”

“스님의 뜻은 어떠합니까?”

“백장스님이 (그를) 당시에 도끼로 찍어 죽였어야 했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느냐?”

“호랑이의 머리를 탈 뿐 아니라, 호랑이 꼬리도 잡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혜적(慧寂 : 앙산스님의 이름)스님에게 매우 준험한 언구가 있었군.”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하여, 앞의 공안에 대해 “우렁찬 소리와 광채가 대지를 진동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에 자유자재하게 몸을 비껴, 말 속에서 몸을 벗어날 길을 마련하려 하였다.

“대장부는 보았느냐”고 물은 것은, 호랑이 꼬리를 잡고 호랑이 수염도 뽑았던 것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반드시 본분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 그대들이 호랑이 꼬리를 잡고 호랑이 수염을 뽑는 것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겠지만 일시에 콧구멍 뚫리는 것은 면치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