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83칙 고불의 노주〔古佛露柱〕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3:42
 

 

 

제83칙1) 고불의 노주〔古佛露柱〕


(본칙)

운문스님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고불(古佛)과 노주(露柱)가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는 몇 번째 등급일까?

-삼천 리 밖에 떨어져 서로 관계가 없구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스스로 대신하여 말하였다.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조문한다. 한 덩어리가 되지는 못하는군.


“남산에서 구름 일어나니

-하늘도 땅도 볼 수 없고 칼로 찍어도 들어가지 않는다.


북산에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남(河南)․하북(河北) 모두 비가 내린다.


(평창)

운문스님은 80여 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는데, 입적한 뒤 70여 년이 지나 부도를 열고 살펴보니, 엄연히 예전의 살아 있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견지(見地)는 명백하고 솜씨〔機〕와 경계〔境〕는 신속하여, 모든 설명해주는 말〔垂語〕, 다른 측면에서 하는 말〔別語〕, 대신해서 대답하는 말〔代語〕이 참으로 고준(孤峻)하였다.

이 공안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참으로 신출귀몰하다 하겠다. 경장주(慶藏主)는 이에 대해서 “일대장교(一大藏敎)에도 이같은 말씀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흔히 알음알이〔情解〕로 살림살이를 하면서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길잡이시며,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시다. 이미 옛 부처〔古佛〕이신데 무엇 때문에 노주(露柱)와 서로 사귀는가?”라고들 한다. 이처럼 이해해서는 (운문스님의 말뜻을)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이를 ‘무(無) 속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나, 종사의 말씀은 의식(意識)이 없고 정량(情量)도 없으며, 생사(生死)가 없으며, 법진(法塵)이 없으며, 참된 진리〔正位〕에 들어가 다시는 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그대들이 말로써 이러쿵저러쿵한다면 바로 손발을 얽어매는 격이다. 말해보라, 운문스님의 뜻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다만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면〔一如〕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이 그를 흔들려 해도 흔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나는 ‘유(有)’를 말해도 옳고 ‘무(無)’를 말해도 옳으며, 솜씨〔機〕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여기에 이르면 박자박자마다 조사의 법령이다.

오조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상당한 운문스님도 원래 담력은 작았다. 산승이 그 경우였다면 그에게 제8등급이라고 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고불과 노주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는 몇번째 등급일까?”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한순간에 상대방을 포괄하였다 하겠다. 어떤 스님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스님은 “한가닥 끈을 삼십 문(文)에 샀다”고 하였다. 그에게는 천지를 갈라놓는 안목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뒤이어 대신하여 말하였다. “남산에서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이는 후학들에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천지를 갈라놓은 곳만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이리저리 헤아리고 칼끝을 드러내보이면 그것은 곧 정면에서 빗나간 것이다.

이에 운문스님의 종지를 캐내어 그의 고준한 기봉을 밝히고자 송을 했던 것이다.


(송)

남산의 구름이여

-하늘과 땅도 볼 수 없고 칼로 찍어도 들어가지 않는다.


북산의 비로다.

-빗방울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남(河南)․하북(河北) 모두가 그렇다.


28대 조사와 여섯 명의 조사가 서로 마주 본다.

-어느 곳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곁에 있는 사람까지 누를 끼치는구나.

  노주에 초롱을 걸어 훤하게 밝혔구나.


신라국(新羅國)에서는 상당(上堂)을 하였는데

-자유자재하는구나. 동쪽 시장에서는 서쪽 시장이 싼 줄을 모른다. 어디에서 이 소식을 얻  을까?


당나라(大唐國)에서는 아직 북도 치지 않았다.

-한 시각 지체됐다. 나에게 화두를 되돌려다오. 먼저 기다려도 도착하지 못하고 끝내 지치  고 만다.


괴로움 속의 즐거움이며,

‘-누구에게 알리는 것이냐!


줄거움 속의 괴로움이로다.

-두 번 거듭된 공안이다. 누구에게 거량하게 할까. 괴로움은 괴로움이고 즐거움은 즐거움이 다. 뭘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어느 누가 황금이 똥 같다고 말하리요!

-안목을 갖춘 자라면 분별해보라. 털고 닦아보아라. 아이쿠! 애석하다. 말해보라. 이는 고불  인가. 노주인가?


(평창)

‘남산의 구름이여 북산의 비’라는 것은 , 설두스님이 모자를 사면서 머리크기를 살펴보고, 바람 방향을 따라서 돛을 올리듯, 칼날 위에서 그대들에게 주석을 달아준 것이다. “28대 조사와 여섯 명의 조사가 서로 마주 본다”고 했는데, 이것을 잘못 알지말라. 이것은 “고불과 노주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는 몇번째 등급이냐?”에 대한 송을 끝맺은 것이다. 뒤이어 얼른 말을 이어 그의 의도를 보고자 “신라국에서는 상당하였는데 당나라에서는 아직 북도 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이 번개치고 유성(流星)이 날 듯이 민첩하게 “괴로움속의 즐거움이며, 즐거움 속의 괴로움”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한 무더기 진기(珍奇)한 보재를 쌓아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끝에 한 구절을 덧붙여 “어느 누가 황금이 똥 같다고 말하리요”라고 말한 것이다.

이 한 구절의 시는 선월(禪月)스님의‘행로난(行路難)’의 시구인데, 설두스님이 이를 인용한 것이다.

선월스님의 ‘행로난’ 시는 다음과 같다.

  

산 높고 바다 깊어 헤아릴 길 없는데

예나 제나 더더욱 푸르기만 하여라.

천박하고 경솔한 자와는 사귀지 마오

땅이 낮으면 가시덤불만이 나는 것이오

어느 누가 황금을 똥 같다고 말하는가.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소식이 감감하다.

가는 길 험난하고 험난하니

그대여 스스로 살펴보오.


이는 아마 땅이 드넓어 알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닐까? 운거사(雲居寺)의 나한상처럼 자만을 부리는군.

1)제 83칙에는 〔수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