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82칙 대룡의 법신〔大龍法身〕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3:39
 

 

 

제82칙 대룡의 법신〔大龍法身〕


(수시)

장대 끝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는 안목을 갖추어야 알 수 있고, 격식 밖의 기틀은 작가여야 분별할 수 있다.

말해보라, 무엇이 장대 끝의 가는 실오라기이며, 격식 밖의 기틀인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대룡(大龍)스님에게 물었다.

“색신(色身)은 부서지는데 어떠한 것이 견고한 법신(法身)입니까?”

-두 갈래로 말을 하는구나. 나누어도 좋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구나.”

-구멍 없는 피리소리가 방음판에 부딪치니 (자취가 없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부서지지 않는다. 사람이 진주(陳州)에서 와서 허주(許州)로 가는구나.


(평창)

이 일을 말에서 찾는다면 방망이로 휘둘러 달을 치는 것처럼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옛사람(수산스님)이 분명히 말하였다. “물음을 가지고 묻지 말라. 왜냐하면 물음은 답에 있고 답변은 물음에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거친 짐을 한 짐 짊어지고 와서 한 짐이나 되는 어리석음과 바꾸듯이 물음의 실마리를 일으키니, 잘못이 적지 않았다. 대룡스님이 아니었다면 천지를 뒤덮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이처럼 묻고 대룡스님은 이처럼 답변하여 하나가 되어 결코 한 실오라기만큼도 틀리지 않았으니, 마치 토끼를 보자마자 매를 풀어놓으며 구멍을 보고 쐐기를 박는 것과 같았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에도 이처럼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이 있을까? 매우 기특하다 하겠다.

이는 언어가 무미(無味)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틀어 막아버렸다. 다음과 같은 계송이 있다.


한 조각 흰 구름 골짜기에 가려 있으니

얼마나 많은 새들 둥지를 헤맬까?


어느 사람은 “이는 나오는 대로 답한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해한다면 모두 부처의 종자를 멸망시키는 것으로서, 옛사람의 한 기틀〔一機〕, 한 경계〔一境〕란 (사량분별을 꽉 묶어두는) 수갑이나 족쇄와 같으며, 한 언구〔一句〕, 한 말〔一言〕이란 가공하기 이전의 본래의 순수한 쇳덩어리나 옥돌과 같은 것인 줄을 까마득히 모른 것이다.

납승의 안목과 식견을 지녔다면 때로는 잡아두기도〔把住〕하고, 때로는 놓아 행하기도〔放行〕하며, 조(照)․용(用)을 동시에 행하고 인(人)․경(境)을 말하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여 때에 맞게 자유자재한다. 대용(大用)과 대기(大機)가 없다면 어찌 이처럼 하늘과 땅을 거머쥘 줄 알겠는가? 이는 경대에 걸려 있는 밝은 거울에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중국인이 오면 중국인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공안은 (제39칙의) 화약란(花藥欄) 화두와 한가지이지만 뜻은 다르다. 스님의 물음은 분명치 못하나, 대룡스님의 답변은 매우 좋았다.

듣지도 못하였느냐, 어느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나무가 시들하고 잎새가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가을 바람이 통째로 드러나지.”

이를 화살과 칼끝이 서로 버티는 것 같은 절묘한 솜씨라고 한다.

스님이 대룡스님에게 “색신은 부서지는데 무엇이 견고한 법신입니까”라고 묻자, 대룡스님은 “산 꽃은 비단결처럼 피어나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고 하였다. 이는 그대로 서쪽 진(秦)나라로, 나는 동쪽 노(魯)나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는 이처럼 가지만 나는 이처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니, 운문스님과는 갑절이나 상반된다. 그가 이처럼 간 것은 그래도 알기 쉽지만 이처럼 가지 않은 것은 알기 어렵다.

대룡스님은 매우 빈틈없는 말을 하였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물어도 결코 알 수 없고

-동서를 분별하지 못했군. 물건을 가지고 놀면서도 이름도 몰랐다. 모자를 사고 나서 뒤늦  게 머리 치수를 재는 꼴이군.


대답해도 알 수 없다.

-남북을 분간하지 못했군. 해골과 바꾸었다. 강남․강북 온 천지가 그렇다.


달은 차갑고 바람은 드높은데

-무엇일까? 오늘이 바로 이 상황이다. 천하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였다.


옛 바위의 쓸쓸한 전나무여.

-비 온 뒤가 아니라도 깨끗하지. 구멍 없는 피리소리가 방음판에 부딪친다.


우습다. 길에서 도인을 만나다니,

-그래도 반드시 몸소 여기에 이르러야 한다. 나에게 주장자를 되돌려다오. 한 무리가 떼를  지어 이처럼 오는구나.


말로도 침묵〔語黙〕으로도 대꾸하지 않았네.

-어느 곳에서 대룡스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대꾸해야 좋을는지.


백옥의 채찍을 손에 잡고

-조각조각이 났구나.


검은 용의 구슬을 모조리 부숴버렸네.

-남겨두었다가 후인에게 보여줘라. 아깝다.

쳐부수지 않으면

-한 번 봐주는군. 또 이처럼 하는구나.


흠집만 더하리라.

-허튼 수작 부려 무엇하려고? 더더욱 어줍잖게 될 것이다. 죄가 하늘까지 뻗쳤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나니

-법을 아는 자라야 겁을 낸다. 아침에는 3천 번 치고 저녁에는 8백 번을 후려친다.


3천 조목이다.

-절반을 말했을 뿐이다. 8만 4천 한량없는 영겁토록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業)이나 아직 절  반쯤도 안된다.


(평창)

설두스님의 송에 가장 큰 솜씨〔工夫〕가 있었다. 앞(제27칙)의 운문스님의 화두에 대한 송에서는 “물음에는 종요(宗要)가 있고, 대답 또한 같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그처럼 말하지 않고 “물어도 일찍이 모르고 대답해도 모른다”고 하였다. 대룡스님의 대답을 곁에서 보니 참으로 기특하였다. 과연 누가 이처럼 물을 수 있을까? 묻기 이전에 벌써 잘못된 것이다. 그의 대답은 상대방에 알맞게 수준을 낮추어 기연에 따라서 말한 것이었다. “산 꽃은 비단결처럼 잘도 피어났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

그대들은 요즈음 대룡스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의 대답을 곁에서 보노라면 참으로 기특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송을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달은 차갑고 바람은 드높은 것’을 알도록 하였고, 또한 ‘옛 바위의 쓸쓸한 전나무’와 만나게 하였다. 말해보라, 그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때문에 나는 앞의 착어에서 “구멍 없는 피리소리가 방음판에 부딪친다”고 말하였다.

이 네 구절로 송은 끝마쳤으나, 설두스님은 또다시 사람들이 말로 이러쿵저러쿵할까 걱정이 되어 “우습다, 길에서 도인을 만나다니,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꾸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일은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또렷또렷하여 짝할 것이 없고

홀로 운행하나니 무엇을 의지하랴.

길에서 도인을 만나니

언어와 침묵으로 대꾸하지 않았네.


라 했다.

이것은 향엄(香嚴)스님의 게송인데, 설두스님이 인용한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던 말을.

“언어로도 침묵으로 대꾸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말하시겠습니까?”

“어리석음〔漆器〕을 드러낸다.”

이는 바로 조금 전의 대화와 같은 것으로 여러분의 알음알이〔情塵意想〕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엇과 같을까? ‘백옥 채찍을 잡고서 검은 용을 쳐부수는 것’이다. 조사의 법령을 행하면 시방(十方)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칼날 위에서의 일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지략이 있어야 하며, 이와 같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옛 성인을 저버리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자그마한 일삼음도 없어야 본래부터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머무름 없이 초월해가는 사람〔向上人〕의 경지이다.

아직 쳐부수지 않았다면 반드시 흠집이 더하여 허물을 만나게 될 것이니, 결국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나라에는 국법〔憲章〕이 있나니 3천 조목이다”라고 하였다. 오형(五刑)의 내용은 3천 가지 인데 그 가운데에서 불효(不孝)보다 더 큰 죄는 없다. 헌(憲)이란 법(法)이며, 장(章)이란 조례(條例)를 말한다. 3천 가지 죄를 일시에 모두 저질렀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러했을까? 본분의 일로써 사람을 제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룡스님이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