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1:30
 

 

 

서장 대 강좌 9 - 4강

 

 

  근기가 아주 뛰어난 사람인데 默照邪禪(묵조사선)으로 소견이 잘못된 것이 너무나도 애석해서 대혜스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나옵니다.

언충이라는 사람이 유보학 언수의 동생입니다.

  彦冲(언충)이 이 무리에게 무너졌으니 괴롭고 괴롭습니다.

이 말은 만약 당신이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깨닫지 못했다면,

徑山(경산)도 또한 말할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말을 알아들을 만치, 도가 그만치 돼 있으니까 내가 이 말을 한다 이겁니다. 안 그러면 곡해만 하고 나를 비방만 할 것이지, 먹혀들지 않을 텐데 당신은 그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니까 한다는 것이지요.   

  천만 번 얼굴을 내려 누르고 통렬히 수단을 써서 저 사람을 구제하십시오. 이것은 천만 번 얼굴을 내려 누르고 형제지간이지만 냉정하게, 냉정하게 형제는 형제고요. 법은 법이다 이겁니다.

소견 잘못 된 것은 형제고 뭐고 가차 없이 지적하고 바로잡아 줘야 이것이 어쩌면 그것이 형제로서의 도리가 아니냐? 이런 뜻이지요.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빕니다. 대혜스님이 뭐가 답답해서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빌겠습니까?정말 뛰어난 근기가 소견이 잘못된 것이 그렇게 선지식의 눈에는 안타까운 것입니다.

  저는 어떤 그런 특별한 근기 보다는 지금 불교가 너무 거품불교. 비불교적인, 정말 정법불교. 정말다이아몬드 같은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흙덩이 같은 무쇠나 구리 같은 값싼 그런 불교를 가지고 장사를 하니까 그런 불교 몇 푼어치가 되겠습니까? 몇 푼어치가 못 되는 그런 저급한 불교는,

제가 불교 아니라고 하기는 미안합니다.

사실은 냉정하게 말하면 불교가 아니만, 그래도 방편으로 불교 안에서 쓰니까 그런 저급한 불교는, 다른 종교에 가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 가도 있는 것. 우리까지...

天上天下에 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이 없는 그런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사는 우리 불자가, 다른 종교에 가도 있는 그런 것 가르치려고 우리가 이렇게 할 것은 없잖아요. 인류사에 최고의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우리는 좀 더 그 가르침도 남달라야 된다고요.

길거리에서,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그런 것을 우리까지 꼭 해야 됩니까? 이것을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불자는 자존심이 있어야 됩니다. 긍지가 있어야 된다고요. 불자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있어야 됩니다. 자존심과 긍지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요?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요.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바로 알아야 됩니다.

바로 알면 긍지와 자존심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정법을 바로 아는 것. 그리고 알고 널리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입니다. 참 급한 일입니다.그런데 다른 문제에 자꾸 그렇게 힘을 낭비할 일이 아닙니다. 힘은 한계가 있는데요. 힘을 그렇게 낭비해 버리면 정말 정작 써야할 곳에 힘을 못 쓰게 됩니다.

p. 162~163

  그러나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분은 맑게 스스로 살아서 세상맛에 물들지 않고 담박함을 여러 해 쌓아서 결단코 이것에 집착하여 기특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활이 아주 담박하고 도인다운 생활을 한다 이겁니다.

  만약 구제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와 더불어 일을 함께 도모하여 그를 기쁘게 하여 마음에 의심을 내지 않게 해야, 거의 믿음이 미쳐서 즐거이 머리를 돌려올 것입니다. 이 사람 생활이 그쯤 됐으니까 아무나 따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일단 그 사람이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당신도 그와 같은 유사한 삶을 살아야 된다 이겁니다.그것이 同事攝(동사섭)이라는 것 아닙니까?

  淨名(정명)이 이르되, 유마거사가 말하기를 

먼저 좋아하는 것을 끌어오고 뒤에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이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달래는 겁니다.

“가서 기도하면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놓고 나중에는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경전. 법화경 같은데 보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등 온갖 불교적인 방편을 다 권합니다.

또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소개를 합니다. 해놓고 결국은 끝에 가서는 그것으로서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고 이 말이 꼭 따라다닙니다.

이것이 중요하거든요.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보시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요. 지계가 목적이 아닙니다.

선정도 목적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서 정말 제대로 눈을 뜨는 것이 목적이지, 보시해서 복 짓고 천도하고 기도해서 성취하고 이것은 전부 낚싯밥이라고요. 솔직하게 낚싯밥입니다. 고기 낚기 위한 낚싯밥입니다. 낚싯밥치고는 근사하지요. 탁 던지면 딱 물게 되어 있으니까요.

무조건 무니까요. 왜냐? 관세음보살만 부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데, 그것을 안부를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물지요.

저도 답답하면 한 번씩 부르는데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저도 답답하면 관세음보살 부르며 매달린다고요. 그런 달콤한 낚싯밥 안 물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낚싯밥이지, 그것이 되는 게 아니라고요.

  여기 보십시오. 경전에 구절구절마다 이렇게 했고, 유마거사도 이렇게 했지 않습니까?일개 거사가 이런 말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선불교의 과제를 앞에다 놓고 할 소리 다 해야지, 여기서 뭘 주저주저하고 남겨놓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제가 나중에 저승에 가서 부처님 볼 면목이 없잖아요.

여기서 할 소리 다 해야 돼요. 선불교. 최고급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이야기하면 그것은 안 되지요. 차라리 다른데 가서 사기를 치는 것이 낫지, 불교 1번지인 여기에 앉아서... 

  黃面老子(황면노자)가 이르기를 부처님이지요. 얼굴이 누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법의 선후를 보아서 지혜로서 분별하며, 시비를 살펴 정하여, 法印(법인)에 어긋나지 않고 차례로 한없는 실천의 법문을 건립하여,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의심을 끊게 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생을 위하여 법칙을 만든 것이며, 만세의 본보기입니다.

유보학. 이 분은 별 문제가 아닌데, 동생. 언충이라는 사람이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더욱 이 분의 근성이 그대와 더불어 멀어서 같지 않다.

형제라 하더라도 그 근성이 차이가 많이 나지요.

이 형은 상당히 점잖은 분이고, 동생인 언충은 아주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그런 분입니다. 여기에 예문을 들었습니다.

대혜스님은 그 분을 꿰뚫어 보니까요. 예컨대 하늘에 태어나는 것은 靈運(영운)의 앞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은 결단코 영운의 뒤가 될 것이다. 라고 한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글을 넣어야 맞습니다.

이 밑에 주해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옛날에 맹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부처님을 순수한 신앙으로 참 잘 섬겼어요. 선행도 잘 하고요.

그런데 그 정치적인 라이벌인 사영운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주 先知에 밝아 가지고, 저 사람. 부처님에게 정말 신심도 있고, 착한 일도 잘하고, 복도 많이 짓는 맹의에게 말하기를 “네는 나보다 천당에는 먼저 갈 거야, 하지만 소견이 그렇게 돼먹어가지고는 성불은 나보다 먼저 할 수가 없다.” 세상에 불교에 신심 있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욕이 어디 있습니까?

기가 막힌 욕 아닙니까? “천당에야 네가 먼저 가지만, 성불은 너는 나 따라오려면 멀었다.”고 이래 버리면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정치적인 라이벌인데 그런 말을 써 버렸어요. 이 사영운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은 없다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유보학의 동생. 언충이라는 사람이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 나는 사람입니다.

잘 달래고 잘 구슬려서 사람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이것은 당신보다 열 배, 백 배 수승한 그릇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뒤에 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사는데 우리 주변에 불교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세속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사례를 곳곳에 적용해서 생각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분은 지혜로써 포섭하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날로 달로 연마하면, 아마 스스로 그릇 된 것을 알아서 홀연히 즐겨 버릴 것입니다.지혜가지고 따지고, 지식가지고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옳고 그른 것으로 이 사람하고 따졌다가는 절대 안 된다 이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情적으로 나가야 됩니다. 아주 잘 해주고, “그래 네가 하는 것이 옳다.”하고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면 이 사람이 하는 말을 한 번씩 귀담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부터“네가 제대로 아는가? 내가 제대로 아는가? 어디 한 번 아는 것을 내놓고 옳고 그른 것을 판가름해보자.” 이렇게 나갔다가는 이건 고기 낚으려고 하다가, 괜히 고기에 물려가는 꼴이 되고 마니, 이런 것들도 우리가 자녀들 교육 시키는데도 적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근기를 잘 살펴서요.

  또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머리를 돌려 즐겨 오면 도리어 이 力量(역량)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대도 또한 모름지기 물러나 그에게 두각 나타냄을 양보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 사람한테 양보를 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주변에 예를 들어서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고, 불교 믿는다고 하는 도반들이나 친지들이나 이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불교를 정말 제대로 믿고 제대로 공부하는가? 이것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고, 참으로 불교를 삿되게 믿는다고 판단이 되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하더라도 구제해야 되는데, 구제 하는 데는 “네 그것 틀렸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반감만 사지요. 누구든지 반감만 삽니다.

그렇게 하면 그 쪽으로 더 빠져들어요.

삿된 길로 더 빠져들게 하는 방법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바로 이끌어 오는 것도 지혜를 써야 됩니다.

지혜를 써야지 무턱대고 감정적으로 “아이 그것 틀렸어. 내가 어디 가서 들어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더라. 무당짓거리 라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듣기 싫은 소리 해보세요. 더 그 쪽으로 빠져든다니까요.

그러니까 지혜롭게 방법을 잘 강구해서, 정 무슨 수가 안 돌아가거든 저한테라도 오세요. 와가지고 의논을 같이 해서라도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러지요. 어디 좋은 법회. 정말 정법을 선양하는 법회에 데리고 가라. 데리고 갈 때는 반드시 차도 태워다주고, 차비도 내주고 회비도 내주고, 가서 일 년치 회비 내주고, 이렇게 하면서 인도 하는 것이다.

제가 자세히 설명할 길은 없고, 바로 그 뜻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데,

정말 그런 마음을 써야 그래도 한 사람을 제대로 바르게 인도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참선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 하는 말이고요. 또 이것이 참선하는 입장뿐 만이 아니고, 우리 일상에 얼마든지 적용 될 수 있는 가르침이고, 특히 불교가 너무 잡다하게, 단순하지가 않고 잡다하게 펼쳐져 있다 보니까, 바른 불교. 좋은 불교. 옳은 불교를 왜 싫어하겠습니까? 그것이 인연이 안 되고, 잘못 만나서 그런 겁니다.

고의적으로 삿된데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가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정말 연민의 정으로서 감싸주고, 어떻게 하더라도 바로 인도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준비해서 그 사람을 어떻게 하더라도 바르게 인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나? 합니다. 저는 학인들을 가르칠 때 그런 생각을 잘 합니다.

“先情後敎”라. 먼저 정. 정말 진정. 참다운 정을 나 혼자 잔뜩... 

그거 뭐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학인들을 보면 정나미 떨어지지만, 그래도 억지로 속에서 정을 잔뜩 자아내요. 자꾸 만들어내요.

‘아이고 이쁜 놈’ ‘아이고 이쁜 놈’ 하고 자꾸 ‘이쁜 놈’ 이라고 속에서 주문을 외워요. 그러면 정이 생깁니다. “선정후교”입니다.

정을 먼저 준비하고, 그리고나서 가르쳐요. 그럼 그 가르침이 먹혀든다고요. 그렇지 않고 “이것이 옳고,” “이것이 좋은 사상이고 어쩌고, 저쩌고.” 속으로는 ‘혼자 잘해봐.’ 이런다고요.  ‘혼자 잘해보라.’고...

  여기 선생님도 많이 계시겠지만,  “선정후교” 좋지요?

먼저 정을 준비하고, 뒤에 가르침을 준비해서 나눠주는 것. 이것이 불교를, 특히 정법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런 자세가 꼭 필요하고, 대혜스님 말씀도 결국 그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대혜스님이 참 명석한 도인이지요. 이와 같이 훌륭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 9강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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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만 정리 했습니다.

  불교의 궁극의 이치를 깨닫는 것도 결국은 한 방편입니다.

간화선이 최후의 발달된 불교라고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선불교가요.

  예를 들어서 우리 초기불교에서 그 다음에 부파불교로,

부파불교에서 초기대승불교. 중기대승불교. 후기대승불교. 이렇게 해서 또 밀교로도 발전하고, 그 다음에 이쪽으로 넘어와서 선불교로 발전을 해서 선불교를 최후의 불교. 최첨단불교. 이런 표현을 제가 합니다만, 그래도 선불교의 수행방편은 어디까지나 방편입니다. 궁극의 뜻은 아닙니다.

“탐욕이 즉시 도다.”라고 하는 이 말은 말하자면 거기는 어떤 방편도 다 거기에 붙을 수가 없고, 또 인간 본연의 모습을 긍정하는 그런 입장이지, 어떤 수행을 통해서 이르러갈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니까 “탐욕이 즉시 도다.”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경지이고, 또 그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는 수 없이 번뇌를 제거하고, 또 화두를 들고 그래서 화두를 깨치고 하는 방편을 가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간 과정이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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