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로서 이롭게
43-9-148 華嚴論 云. 大光王入菩薩大慈爲首三昧 顯所行慈心業用 饒益自在 令後學者倣之. 以明無依之智 入一切衆生心 與之同體 無有別性. 有情無情 皆悉同體 入此三昧 所感業故 令一切衆生及以樹林涌泉 悉皆歸流 悉皆低枝 悉皆稽首 夜叉羅刹 悉皆息惡. 以明智隨一切衆生 皆與同其業用 一性無二. 如世間帝王 有慈悲於人 龍神順伏 鳳集麟翔 何況人焉而不歸仰. 況此大光王 智徹眞原 行齊法界 慈心爲首 神會含靈 與衆物而同光 爲萬有之根本.
ꡔ화엄론ꡕ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큰 빛의 왕이 보살의 대자비심을 으뜸으로 삼는 삼매에 들어 자비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업의 작용을 드러내니, 자유자재로 넉넉하게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후학들로 하여금 이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의지할 바 없는 지혜를 밝혀 일체중생의 마음에 들어갔기에 그들과 더불어 한몸이 되니 달리 세울 성품이랄 게 없었다. 유정과 무정이 모두 다 한몸으로 이 삼매에 들어가서 업(業)에 감응되기 때문에, 일체 모든 중생이 머리 숙여 예배하였고, 모든 나무와 숲이 공경의 표시로 가지를 드리웠으며, 솟아오른 샘물들이 모두 다 이 삼매로 흘러들고, 야차와 나찰도 모두 다 악한 업을 쉬게 되었다. 지혜를 밝혀 일체중생을 따르기 때문에, 모두 다 업의 작용이 똑같아 하나의 성품으로 달리 다른 성품이 없다. 이것은 세간의 제왕이 백성에게 자비심을 베풀면 용과 신장이 복종하고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이 모이며 날아드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귀의하고 흠앙하지 않겠는가. 더우기 큰 빛의 왕은 지혜가 진리의 근원에 사무치고 수행이 법계에 일치하여 자비로운 마음을 으뜸으로 삼으니, 신령스럽게 아는 앎이 중생과 더불어 하나의 빛으로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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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摩尼寶 與物同色 而本色不違. 如聖智無心 以物心爲心 而物無違也. 明同體大慈悲心 與物同用 對現色身 而令發明. 故山原及諸草樹 無不迴轉 向王禮敬 陂池泉井 及以河海 悉皆騰溢 注王前者. 以智境大慈 法合如此. 若衆生情識 所變之境 卽衆生不能爲之. 如蓮華藏世界中境界 盡作佛事 以是智境 非情所爲. 故聖者 以智歸情 令有情衆生 報得無情草木山泉河海 悉皆隨智迴轉 以末爲本故.
이것은 마니보주가 거기에 비치는 사물과 똑같은 색이 되나, 사물의 색이 마니보주 본래의 색을 거스르지 않음과 같다. 이것은 성스런 지혜인 무심(無心)이 중생의 마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으나, 중생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음과 같다. 하나의 몸이 된 대자비심을 밝혀 중생과 더불어 함께 쓰니, 색신(色身)을 마주하여 나타냄에 지혜의 빛을 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과 들과 모든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큰 빛의 왕을 향해 예배 공경하고, 저수지와 샘물과 강과 바다가 모두 큰 빛의 왕 앞에 환희로운 물결을 일렁이며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지혜의 경계인 대자비심으로 법에 합당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중생의 알음알이로 변하는 경계라면 곧 중생은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연화장 세계와 같은 경계는 모두 부처님 일로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에 중생의 알음알이로 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스런 자가 맑은 지혜로 중생에게 돌아가, 유정인 중생이 무정인 산천초목과 강과 바다가 모두 다 지혜를 따르고 자신의 위치를 돌이켜 보답하도록 하는 것은 지말로써 근본을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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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世間有志孝於心 冰池涌魚 冬竹抽筍. 尙自如斯 況眞智從慈者歟. 故知 得法界之妙用 用何有盡. 從眞性中緣起 起無不妙 則理無不事 佛法卽世法 豈可揀是除非耶. 事無不理 世法卽佛法 寧須斥俗崇眞耶. 但是未入宗鏡 境智未亡 興夢念而異法現前 發燄想而殊途交應. 致玆取捨 違背圓常. 所以 不能喧靜同觀善惡俱化者1) 未聞宗鏡故耳.
이것은 마치 세간에도 지조와 효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꽁꽁 언 연못에서 고기가 뛰고, 추운 겨울의 대밭에서 죽순이 올라옴과도 같다. 세간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참다운 지혜를 대자비심으로부터 쓰는 것에야 무엇을 더 이야기하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법계의 오묘한 작용을 얻는다면 무엇을 쓴들 다함이 있겠는가.
참성품 가운데에서 나오는 연기법은 일어나는 자리에서 오묘하지 않음이 없고, 이(理)가 사(事) 아닌 것이 없어 불법 자체가 세간법이니, 어찌 이 자리에 옳은 것을 가려내어 그른 것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사(事)가 이(理) 아님이 없어서 세간법 자체가 불법이니, 어찌 이 자리에 세간의 법을 배척하여 따로 참한 법이라고 숭상할 것이 있겠는가.
단지 아직 종경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경계와 지혜가 사라지지 않아 꿈결 같은 다른 법이 눈 앞에 나타나며, 아지랑이 같은 생각으로 육도에 윤회하니, 취하거나 버리는 자리에서 영원하고 원만한 진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끄럽고 조용함을 같이 보고 선과 악을 함께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 종경의 법문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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