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강심사(江心寺) 동당(東堂)의 고승들
무언(無言)스님이 강심사(江心寺) 동당(東堂)요사에 머물 때 문에다가 방(榜)을 써붙였다.
”재를 하기 전까지는 경을 읽고 좌선을 하며 재를 마친 뒤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스님과 마주하여 당대의 주지를 칭찬하거나 훼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림의 전고(典故)와 선문의 강요(綱要)에 대해서는 하루종일 이야기하여도 피곤해 할 줄을 몰랐다. 그는 근대에 동당(東堂)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분이었다.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대나무 평상에 누워 웃으시면서 혼자말로 ”늙는다는 건 좋은 게 아니로군.”하였는데 흔들어보니 이미 입적한 뒤였다.
그 당시 무제(無際)스님도 동당(東堂)에 있었으며 석실 암(石室岩)스님이 주지를 맡아보고 있었다. 암스님은 학문이야 부족하였지만 매우 진솔한 인물이었다. 절의 노승들은 모두가 스님(무제)의 제자였기에 스님은 주지에게 경솔히 대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으레 초하루와 보름에 설법을 마친 후 모두들 스님의 처소에 와서 절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그들에게 주지의 상당법문이 어떻더냐고 말하도록 한 후 정담어린 말씨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장로의 상당법문은 좋은 말씀이다. 그의 법문은 주지직을 맡아보는 데 규모가 있고 문도를 거느림에 법도가 있는 말씀이다.”
기(岐)상좌는 명암 희(明巖熙)스님이 손수 도첩을 내려준 제자이다. 어느 날 욱(郁)산주의 과려도(跨瘻圖:당나귀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를 들고 무제스님을 찾아와 제(題)를 청하자 스님은 서슴없이 붓을 잡고 게를 지었다.
절름발이 당나귀 시내 다리 지나다가 발을 헛디였을 때
완두콩을 진주로 잘못 알았지 덧 덧 덧
아이들은 집안 추태 감출 줄 몰라서
도리어 양기노스님을 웃겨버렸네
策蹇溪橋蹉脚時 誤將虫宛豆作眞珠
兒曹不解藏家鬼 笑倒楊岐老古錐
이어 기상좌에게 물었다.
”말해보아라. 당시 양기스님의 한바탕 웃음이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를?”
기상좌가 말하였다.
바람도 없는데 연꽃 잎새 흔들거림은
필시 물고기의 움직임 때문.
無風荷葉動 必定有魚行
무제스님은 손바닥을 탁 치며,
”돌아가거든 너의 스승에게 이 말을 분명하게 전하라.”
고 하였다. 학인을 가르치는 스님의 방편은 과연 이와 같았다. 기상좌는 바로 대매사(大梅寺)의 중빈(仲邠)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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