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당집(祖堂集)

나산(羅山) 화상

通達無我法者 2008. 3. 10. 13:35
 

 

 

나산(羅山) 화상

  

  암두(巖頭)의 법을 이었고, 복주(福州)에 계셨다. 선사의 휘(諱)는 도한(道閑)이요 성은 진(陳)씨이며, 장계현(長溪縣) 사람이다. 귀산(龜山)에서 출가하여 계를 받자마자 조사의 비밀한 뜻을 위해 길을 나섰다가 암두(巖頭)를 만나 비밀한 뜻에 계합하였다.

  처음 개당할 때에 법의(法衣)를 갖추고 법상에 올라서 "잘 가시게" 하였다. 이 때 학인이 나서서 물으려하자 선사께서 할을 하여 내쫓으며 말했다.

  "어디를 갔다가 오는가?"

  

  어떤 스님이 소산 화상을 위해 연수탑(延壽塔)을 세웠는데 공사가 끝나고 화상께 고하니, 소산화상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장인들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느냐?"

  스님이 대답했다. 

  "모든 것이 화상께 달려 있습니다."

  소산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돈 세 푼을 장인들에게 주었느냐, 아니면 돈 두 푼을 장인에게 주었느냐, 그도 아니면 돈 한 푼을 장인에게 주었느냐? 만일 대답을 한다면 나를 위해 친히 탑을 세워 준 것이 되느니라."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선사께서 대령(大嶺)의 암자에 머무르고 계실 때 그 스님이 왔기에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소산에서 왔습니다."

  "소산 화상께서 요즘 무어라 하시던가?"

  그 스님이 자세히 이야기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대답한 사람은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말했다. 

  "그대는 다시 소산에 돌아가 이렇게 말하라. '대령 화상께서 제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말씀하기를 만일 돈 서 푼을 장인에게 준다면 화상께서는 금생 동안에 결정코 탑을 세우지 못하실 것이요, 만일 돈 두 푼을 장인에게 준다면 화상께서는 한 손을 같이 거들어야 탑을 세울 것이요, 만일 돈 한 푼을 장인에게 준다면 장인의 어깨와 수염만 더럽히고 동시에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여라." 

  그 스님이 바로 돌아가서 소산에게 말하니, 소산이 얼른 위의를 갖추고 대령을 바라보면서 찬탄했다. 

  "아무도 없다고 여겼더니, 대령에 옛 부처님이 계셔서 광명이 예까지 비치는구나! 그대는 다시 대령으로 가서 말하기를 '마치 섣달에 연꽃이 핀 것 같습니다' 하라."

  그 스님이 다시 선사께 와서 이 일을 이야기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벌써 거북의 털이 두어 길이나 자랐구나!" 

  

  선사께서 또 언젠가 상당하여 말했다. 

  "종문의 깊고 깊은 뜻을 어떻게 말로 알아들을 수 있으며, 참된 마음 정하기 어려운데 실다운 이치를 어떻게 해석하랴? 조사가 대대로 드날리고 간곡히 지견(知見)드리우시니, 준수한 선비는 큰 일을 드러내고 차례대로 시행해서 부처와 악마를 무찌르고 깊은 경지(境地)에 돌아가며, 신령한 광채를 




조당집 > 조당집(祖堂集) > 조당집 제 9 권 > 476 - 479쪽

K.1503(45-233), 

  빽빽히 나열하고 눈 앞에 교법을 퍼뜨리며, 뜻을 들어 종지를 밝히면 광채가 큰 바다같이 흐른다. 선법과 도를 들으면서 자취를 없애고 소리를 죽인다. 부처와 조사가 분명한 옛길을 밝히는데 마등(摩騰)과 축법란의 노란잎[黃葉] 무엇이 다르랴?3) 대장경의 교법으로도 그려내지 못한다. 만일 종승(宗乘)의 한 가닥 길을 말한다면 바다같이 큰 입이라도 설명하기 어렵나니, 석가가 방문을 닫고, 유마가 입을 다물어 잠시 파란(波瀾)을 멈춘 것을 어찌 보지 못하는 것인가? 중생을 제접하려면 근기에 맞춰야 비로소 통하나니 준엄한 선비는 때맞추기를 바람과 같이하여 근기에 맞추기를 번개와 같이 한다. 한번 불러오지 않으면 마치 죽은 놈과 같나니, 칼날에 맞서는 한 대의 화살을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으리? 준수한 무리가 아니면 공연히 입만 놀리는 격이 되리라. 오랜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특함을 벗어나지 않나니 만일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고개를 숙여 조용히 듣고 마음으로 생각을 더듬어도 끝내 만져지지 않는다. 그저 옛사람의 말만 기억해 소경 무리를 미혹시킨다면 공겁으로 보내져도 윤회를 면치 못하건만 작가랍시고 대답하고 두드려봐서는 나귀 해가 된다 해도 이룰 수 없으리라. 잘 지내거라."

  정씨의 열셋째 딸 낭(娘)이 12세가 되자 어떤 비구니를 따라 서원(西院)의 대위 화상을 뵈었다. 막 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대위가 물었다.

  "저 비구니는 어디에 사는가?"

  "남대(南臺)의 강가에 삽니다."

  위산이 할을 하여 내쫓고는 다시 물었다.

  "등뒤의 노파는 어디에 사는가?"

  열셋째 딸이 온몸으로 세 걸음 앞서 나가 손을 모으고 섰다. 이에 위산이 다시 물었다.

  "저 노파는 어디에 사는가?"

  열셋째 딸이 대답했다. 

  "벌써 화상께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3) 마등은 선사(禪師), 축법란은 역경사(譯經師)이다. 즉 교(敎) 가리킨다. 여기서는 선과 교가 무엇이 다르겠는가의 뜻이다.

  위산이 말했다. 

  "가거라, 가거라."

  그리하여 법당 밖으로 나서는데 비구니가 물었다.

  "열셋째 딸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도 선을 안다'며 입을 마치 방울처럼 놀리더니 어째서 오늘 화상께서 물으실 때엔 전혀 한 마디도 못하는가?"

  열셋째 딸이 말했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겨우 그러한 안목을 갖추고서 '나는 행각(行脚)을 하노라' 말하니 누더기를 벗어서 나 열셋째 딸에게 입히려 해도 입히지 못할 것이오."

  열셋째 딸이 나중에 선사께 이 일을 이야기하고 물었다.

  열셋째 딸이 대위를 뵙고 그렇게 대꾸한 것이 온당하였습니까?"

  선사께서 대답했다. 

  "허물이 없을 수 없느니라."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선사께서 꾸짖으니, 열셋째 딸이 말했다. 

  "오늘의 일이야말로 비단 위에 다시 꽃 수를 놓은 것이겠습니다." 

  

  또 언젠가 상당하여 말했다. 

  "이치에 밝게 통하면 부처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현상에 밝게 통하면 모든 성인과 동등하게 되나니, 현상과 이치를 모두 통달하면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천하를 휩쓸고 다니면서 속박과 해탈에 자재하려면 모름지기 그러한 녀석이어야 한다. 근기에 임하여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잡았다 놓았다 함이 그때그때마다 자유로운 것은 그대들이 중얼거리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실제로 알지 못한다면 세 구절 나아가 네 구절이 얼기설기 서로 통함을 끝내 어찌 못하리라. 만일 위로 향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듣지 못했는가? 높은 선비는 관문을 알지 못한다 했다. 아는가? 만일 초월한 작자라면 깜짝 사이에 그만두리라. 지금에도 그러한 녀석이 있는가? 나와서 시험삼아 한 마디 일러보라. 얼마나 훌륭한가? 만일 긍정과 부정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면 먼저 여러 겁 동안의 부사의한 것

  

  을 스스로 알아차려 항상 드러나게 하여 자유자재로워야 한다. 만일 사자가 땅을 버티고 선 경지를 논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천 가지 시설과 작용도 야간(野干)의 울음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옛과 작금을 꿰뚫고 지나는 경지를 음성 이전에 알아차려 보아라. 일없으니 잘 가거라." 

  

  진 상좌가 물었다.

  "암두(巖頭) 화상이 말한 것처럼 '동산은 좋은 부처이지만 다만 광채가 없구나' 했는데, 동산에게 무슨 흠이 있기에 광채가 없다 하셨습니까?"

  선사께서 무진을 불러 무진이 대답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확실히 좋은 부처인데, 다만 광채가 없구나."

  진 상좌가 말했다.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저의 말에 시비를 거십니까?"

  "어디가 노승이 그대의 말에 시비를 거는 곳인가?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

  무진이 대답을 못하자 선사께서 때렸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종문에서 유포되는 일입니까?"

  선사께서 손을 벌리니, 다시 물었다.

  "서둘러 와서 뵈었으니, 스님께서 한 번 제접해 주십시오."

  선사께서 대답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화살이 이미 지나갔느니라."

  또 어떤 대덕이 와서 참문하니, 선사께서 물었다.

  "대덕의 호는 무엇인가?"

  "명교(明敎)라 합니다."

  "교법을 아는가?"

  "어느 정도 압니다."

  이에 선사께서 주먹을 세우고 말했다.

  "영산회상에서는 이것을 무슨 교법이라 하는가?"

  

 

  "주먹의 교법이라 합니다."

  선사께서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것을 주먹의 교법이라 한다고?"

  그리고는 다리를 뻗으면서 물었다.

  "이런 것은 무슨 교법이라 하는가?"

  대덕이 대답이 없으니, 선사께서 말했다. 

  "다리의 교법이 아니겠는가?"

  

  선사께서 열반에 들기 직전에 상당하여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는 양구하다가 왼손을 펴니, 주사(主事)가 말했다. 

  "동쪽이 검으니, 스님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선사께서 또 양구하다가 다시 오른손을 펴니, 주사(主事)가 또 말했다.

  "서쪽이 검으니 스님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스승의 은혜를 갚으려면 지조를 지키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국왕의 은혜를 갚으려면 대교(大敎)를 퍼뜨리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하하하하! 잘 있으라."




선사가 어느 때 세 번의 성불하는 법을 말씀하시니, 세 번이란 다음과 같다.

  "세 번의 성불이란 무슨 뜻인가? 첫째는 증리성불(證理成佛)이요, 둘째는 행만성불(行滿成佛)이요, 셋째는 시현성불(示顯成佛)이다."

  증리성불이라 함은 선지식의 말씀 끝에서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마음 바탕에 본래의 한 물건도 없음을 활짝 깨닫는 것이니 이것이 성불이다. 만행(萬行)을 차례로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리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시기를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淨覺)을 이룬다" 하셨고, 또 옛사람은 말하기를 "불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이키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증리성불은 안에서 체성(體性)을 말한다면 물건도 없지만 3신(身)을 통틀어 말한다면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없지 않다.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 당장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으므로 부처가 되었다 하는데, 그 공은 문수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수는 부처님들의 어머니라" 하니, 이 뜻은 부처님들이 문수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수라 함은 실지(實智)인데, 모든 부처님이 그 실지에 의하여 보리를 증득

  

하기 때문에 문수를 부처님들의 어머니라 한다.

  행만성불(行滿成佛)이라 함은 비록 진리의 근원을 끝까지 규명하였지만 다시 보현(普賢)의 행원(行願)을 따라 보살의 도를 두루 닦아 수행이 골고루 갖추어지고 지혜와 자비가 원만해지기 때문에 행만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행하여 이른 곳은 곧 본래 온 곳이다" 하였으니, 그러기에 행할 바가 이미 원만하여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본래의 곳이라 함은 곧 이치[理]로서, 이 행만성불의 증득한 이치가 앞의 증리성불의 이치와 다르지 않나니, 행만성불이라 한다. 이 행만성불 안에서 과덕(果德)을 말한다면, 다만 보현행(普賢行)으로써 불도를 이루는 것뿐이다.

  3신(身)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있나니,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에는 행이 원만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만을 취했으므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공이 보현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라" 하였나니, 이른바 부처님들이 보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이라 하는 것은 곧 만행(萬行)이니, 모든 부처님들이 그 만행으로 인하여 보리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한 부처님에 두 보살이라 함은 이치인 비로자나(毘盧遮那)와 지혜의 문수(文殊)와 행(行)인 보현(普賢)이니, 이치와 지혜와 행, 세 사람은 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또 한 부처님과 두 보살은 서로가 주인과 손이 되니, 본체가 위없음으론 비로자나가 주인이요, 성품을 보는 지혜의 공덕으로는 문수가 주인이요, 만행의 복력(福力)으로는 보현이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현통(李玄通)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들 모두가 문수·보현, 두 보살로서 부처의 보리를 이루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들의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라" 하였으니, 이로써 세 사람이 서로 주인과 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현성불(示顯成佛)이라 함은 앞에서와 같이 이치를 증득하여 행이 원만하고, 스스로의 행으로 부처를 이루는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이제 중생을 위하

여 부처 이루는 모습을 시현하여 여덟 가지 모습[八相]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다.

  여덟 가지 모습이라 함은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오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 등 여덟 가지 모습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현성불이라 하나니, 이 여덟 가지 모습의 성불은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고 진신(眞身)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았으며 열반도 없다 하였으니 본원(本願)의 힘 때문에 자재(自在)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경은 보신과 화신 가운데서 참 부처를 말한 것이다.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성불한 뒤로 이미 한량없는 겁이 지났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석가여래께서는 이미 한량없는 겁 전에 행이 원만한 대각을 이루셨으나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시는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지금의 이 석가부처님께서는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 가운데서 넷째 부처님이시니,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천 부처님과 현재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과 미래 성수겁(星宿劫)의 천 부처님과 이렇듯 세 겁 동안의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중생을 교화하시고 차례차례 수기(授記) 주기를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다. 교전(敎典)을 보고 옛사람의 자취를 두루 살피어 한 사람이 성불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세 번 성불하는 도리를 알 것이다.

  바라건대 부처의 지위를 연마하려는 이는 대충 제전[諦筌 :文字]을 살핀 뒤에 다시 먼저의 부처와 나중의 부처가 다 같은 길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길을 가는데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같은 길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기록해 두노라.

  선사는 언젠가 3편(篇)의 법을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이요, 둘째는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이요, 셋째는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이다.

  

  1.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

  

  넓은 들판에 해통(該通)이라는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대중에게 말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여 삼계를 헤매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연설하여 성품의 바탕을 단박에 깨달아 문득 정각을 이루게 된다고 하자 차례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돈증실제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설산(雪山)에 인욕초(忍辱草)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바로 제호(醍?)를 낸다' 한 것이 이 뜻이니라."

  이 때 대중 가운데 지통(智通)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다가 선인에게 아뢰었다.

  "뭇 중생에게는 원래 성품의 바탕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체지자(一切智者)께서 참 교법을 말씀하신 뜻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참 교법을 다 같이 듣고서도 깨닫거나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중생이 비록 본래부터의 청정하고 뚜렷이 밝은 본체를 가지고 있으나 근본을 등지고 끝을 쫓으면서 여러 겁과 여러 시간을 보내면서 별별 몸을 받아 근기와 성품이 같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참 교법을 같이 들어도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말씀하신 것이 재앙이 된 것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치 맑고 밝은 해를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 같이, 지혜의 마음이 없는 이는 끝내 보지 못한다' 한 것이니라.

  은사가 다시 선인께 사뢰었다.

  "고명하신 지도를 자세히 살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건대, 지혜로운 이가 설법하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니,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고 지혜로움은 본래 각각 다른데, 설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인이 다시 은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본래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도 영원히 어리석어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참됨을 깨달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니 이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영리함과 둔함을 가리리요.

  그러므로 어떤 중생이 둔하다면 거듭거듭 참된 교법을 들어도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만일 영리한 중생이라면 참된 교법을 잠깐 듣더라도 문득 성품의 바탕을 깨닫게 되나니, 이것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어디에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이 있으랴.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은 차이가 없고 오직 근기에 영리함과 둔함만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만을 위해서 설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어미 닭이 알들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은 알이 깨어나서 껍질을 벗어나는데 깨어나지 않는 것도 있다. 어미 닭은 모든 알을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껍질을 까고 나온 알만을 사랑하나니, 이는 깨어나고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알의 성품에 있고 어미 닭이 알을 품은 허물이 아니다.

  온갖 지혜를 가진 이도 그와 같아서 대중을 위하여 참 교법을 연설해 주면 근성이 영리한 이는 단번에 깨닫지만 근성이 둔한 이는 깨닫지 못한다. 지혜를 가진 이는 근성이 영리한 이만을 사랑하고 근성이 둔한 이는 사랑하지 않나니, 이는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근성에 있을 뿐 지혜로운 이가 설교한 것의 허물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들은 법은 남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방편에 의해야 되는 줄을 알 수 있으리라. 지혜로운 이가 항상 법을 설하는데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학인에게 있지 지혜로운 이의 설법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은사가 물었다.

  "영리한 근기는 참 교법을 들으면 당장에 지혜가 생겨 성품의 바닥을 활짝 깨닫는다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는 지혜로 문수를 비추는 경지이니라."

  

  "문수의 지혜로 비추는 경지는 어떠합니까?"

  "문수의 지혜로 비춤은 성품에 있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지혜로 비춤은 증득하는 사람이요, 성품의 바탕은 증득할 법이니라. 그러므로 능(能)과 소(所)의 차이는 없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 지각없는 반야로 형상 없는 진제(眞諦)를 증득한다' 하였으니, 지혜와 성품은 같지 않느니라. 또 증득하는 지혜로써 지각없는 경지를 비추되 증득할 성품의 바탕은 본체가 없으므로 능과 소가 있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혜가 진여의 경지를 다하면 능·소가 모두 없어진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다른 비춤이 없느니라."

  지통 은사가 선인의 말을 듣고, 고명한 지도를 받들자 의심의 그물이 활짝 트였다.

  그 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이미 지통(智通)에게 견성(見性)의 법을 말했다. 만약 중행(衆行)을 말한다면 이렇지는 않느니라."

  이 때 이 대중에 행통(行通)이라는 유자(遊子)가 있다가 선인에게 물었다.

  "견성은 그렇다 치고, 중행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유자에게 말했다.

  "어떤 중생이 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본 뒤에,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 지혜를 닦기 때문에 중행이라 부르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내가 일찍이 선인의 설법을 듣건대, 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달으면 지혜로 문수를 비춘다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선인의 말씀을 듣건대,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닫고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와 이타의 자비 지혜를 행하므로 중행이라 한다 하시니,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보현의 지위에 해당하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보현 대사(大士)는 어떤 지위에 속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원인인 5위(位)에 의지하여 결과의 지위에로 나아간다. 비록 지위에 이르렀으나 결코 이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느니라. 또한 중행(衆行)을 행할 때에 세 등급의 보현을 이루느니라."

  유자가 다시 물었다.

  "원인의 지위로부터 결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에서 어떤 것을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첫째는 출전보현(出纏普賢)이요, 둘째는 입전보현(入纏普賢)이요, 셋째는 과후보현(果後普賢)이니라."

  유자가 물었다.

  "이 세 등급의 보현에서 수승함과 열등함의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 세 가지 보현의 수승함과 열등함의 등급은 그 이치가 같지 않으니, 이른바 출전보현이란 성품을 본 뒤에 중행을 행할 때, 눈앞의 만 가지 경계를 대하면 깜빡 일어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이미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환화(幻化)의 경계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 하였느니라."

  유자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것은 문수가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문수가 성품을 상대할 때에 본체 

  

  안에는 딴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 것은 보현이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보현이 여러 지위를 섭렵할 때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은 같지 않다. 이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을 알지 못하면 미혹을 끊고 덕 이루는 이치를 놓고 다투게 된다."

  유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의 미혹을 끊는 일은 이미 그런 줄 알았지만, 보현의 미혹 끊는 일을 말한다면 그것은 현행(現行)을 끊는 것입니까, 습기(習氣)를 끊는 것입니까?"

  "보현의 지위로 말하면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겠지만 보현이 지위에 의탁하여 미혹을 끊나니 이는 습기번뇌에 해당하느니라."

  "현행과 습기가 어떠한 것이기에 보현은 현행의 번뇌는 전혀 없고 오직 습기의 장애만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범부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앞뒤의 경계를 알지 못해서 업을 짓나니, 이것이 현행이다. 지혜로운 이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경계가 허망한 줄을 알아서 앞 경계에 걸리지 않나니, 이것은 습기이기 때문이다.

  보현은 성품을 본 뒤에 만행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행의 미혹은 전혀 없고, 습기의 장애만 있다. 만일에 끊을 습기가 없다면 참기 어려운 일을 참을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 자비와 지혜로써 성불하는 법이 없다면 행하기 어려운 행을 행할 필요가 어디에 있으랴.

  비록 자비와 지혜, 두 문을 행하나 짓는 바는 본체에 의해서 행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짓는 바는 모두가 성품에 의지하여/공덕의 숲을 닦아 이룬다/마침내 적멸에 나아갈 뜻은 없고/오직 중생을 제도할 생각뿐이다/자비를 행하니 자비가 광대해지고/지혜를 쓰니 지혜가 더욱 깊어진다/이타를 하고 자리를 하는 일을/작은 성인이 어찌 감당할쏘냐'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출전보현은 자비와 지혜를 두루 행하나 본체에 의해 수행하여 이루는 것임을 알 것이다.

  

  또 자세히 보현의 중행을 말하자면 항포(行布)와 원융(圓融)으로 가지런히 나타나고, 미혹 끊음과 덕 이룸을 모두 갖추었고, 자리와 이타를 쌍으로 닦으며 지문(智門)과 비문(悲門)이 나란히 이루어진 것이다. 행을 말할 적에 큰 작용이 일어나니 일어났다 하면 반드시 온전히 진여요, 참된 행상을 말할 적에는 지위에 의해서 미혹은 끊는 법이 없지 않으니, 지위가 높아지면 습기는 차츰 옅어지고 행이 넓으면 자비와 지혜는 더욱 깊어지니, 10주(住)로부터 10지(地)에 이르면 출전보리가 이미 원만해진 것이다.

  입전보현(入纏普賢)이라 함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동류대비(同類大悲)를 가진 이는 앞의 출전보현(出纏普賢)의 지위에서 자비와 지혜를 널리 행하여 자리와 이타의 행을 행하는 까닭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이 없지 않다. 비록 미혹을 끊고 공을 이루는 공일지라도 출전의 법을 이미 만족한 뒤엔 출전 후에 근심 없는 곳을 믿지 않기 때문에 4생6취(四生六趣)에서 대비를 널리 행하고 같이 끊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입전보현이라 한다.

  이렇게 입전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덕과 앞에서 출전(出纏)하여 행을 이루는 공과의 두 마음의 공이 가지런히 행동하기 때문에 등각(等覺)이라 하고,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하고, 출전과 입전에 집착하지 않고 대지와 대비에 집착되지 않기 때문에 묘각(妙覺)이라 하느니라. 비록 자비와 지혜와 입전과 출전에 집착하지 않으나 과덕(果德)을 말하면 취하지 않는 행이 없고 거두지 않는 지위가 없느니라.

  과후보현(果後普賢)이라 함은 변행삼매(遍行三昧)를 이르는 말이니, 이른바 묘각의 지위에서 출전의 대비와 대지를 취하지 않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도리어 출전과 입전의 대지와 대비를 향하여 역과 순으로, 종과 횡으로 모든 지위의 중생들 가운데서 같은 마음과 같은 종류가 된다. 또 어느 일정한 지위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마음대로 하여 널리 대비를 지으며, 모든 종류 가운데서 어느 지위도 결정코 받지 않고, 짓는 것과 받는 것에서 짓지 않고 받지 않는 까닭에 과후보현이라 한다. 만일, 이 사람의 행하는 바를 일정하게 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의 행하는 곳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함은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행의 수승함과 열등함에 의하여 대충 세 등급의 보현으로 나눈 것

  

  이다.

  이른바 한 사람이라 함은 처음에 실제를 활짝 증득하는 것은 문수요, 지금 인연을 따라 행을 행할 때를 보현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 한다. 이는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만일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이 같지 않다면 문수와 보현은 두 사람이요, 만일 증득하는 이와 증득되는 대상, 그리고 여러 행이 같지 않음을 통틀어 취한다면 세 사람이 된다.

  이는 대교(大敎 : 화엄)의 뜻이기도 하다. 『화엄경』 제목에서 대방광(大方廣)이라 함은 말씀하신 법이니 곧 비로자나요, 불(佛)이라 함은 증득하는 사람이니 문수요, 화엄(華嚴)이라 함은 인연을 따르는 행이니 곧 보현이다. 그리하여 한 부처님에 세 보살이니, 곧 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보현의 행을 행하려는 이는 먼저 진리를 끝까지 궁구한 뒤에 인연을 따르는 행을 행하여서 지금의 행과 옛 어른의 자취가 부합되게 하여야 하나니, 마치 옛말에 문을 닫고는 수레를 만들고, 문을 열고는 수레바퀴를 꿰어 맞춘다는 것과 같다.

  

  2.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

  

  이 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설법을 했다.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삼계(三界)를 윤회하다가 3승(乘)의 점교(漸敎)를 듣고 3승의 법을 깨달았다 하자. 삼계의 환란 때문에 3승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참 교법[眞敎]을 듣고는 돌이켜 묘한 지혜를 이루어 실제(實際)의 경지를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점증실제(漸證實際)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 앞의 세 가지 수레는 방편의 법이요 드러난 땅의 흰 소라야 비로소 진실한 증득임을 밝힌다' 하였으니, 바로 이 뜻이니라."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물었다. 

  "이 회점증실제(廻漸證實際)를 얻은 이와 앞에서의 돈증실제(頓證實際)를 얻은 사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비록 앞에서 3승에 떨어졌었으나 3승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온 곳은 까마득히 다르나, 이제는 점교를 돌이켜 실제를 증득했으므로 저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1백 가닥의 개울이 바다에 돌아가서는 1백 가닥의 개울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3승이 1승으로 돌아가면 3승이란 이름은 없어진다' 했으니, 이것으로써 이 점증실제의 사람이 저 돈증실제의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회점과 돈증이 같은가 다른가를 걱정하지 말고, 인연을 따르는 마음을 스스로 돌리어 실제의 이치를 돌이켜 비추어라."

  지통 은사가 참된 말씀을 깨닫고는 잠자코 아무 말도 없었다.

  이 때 행통(行通) 유자(遊子)가 선인에게 사뢰었다.

  "저희들이 선인이 말씀하신 바를 듣건대 어떤 중생이 성품의 경지를 활짝 깨달은 뒤,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여러 가지 행을 행하면 중행이라 하는데, 이러한 행을 행하는 이를 보현이라 하겠습니다. 지금에 회점증실제를 얻은 사람도 여러 가지 행을 행합니까,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회점증실제를 얻는다는 것은 곧 드러난 땅에 있는 흰 소인데, 흰 소는 오락가락하여 드러난 땅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행을 행하는 이가 없지 않다. 이른바 드러난 땅의 흰 소라고 하는 그 드러난 땅은 증득해야 할 법이니 비로자나불이요, 흰 소는 증득하는 사람이니 문수보살이요, 흰 소가 움직여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보현보살이다. 보현이 행하는 바가 곧 여러 가지 행이다.

  두 편의 대의가 대략 이러하니, 그대들 스스로가 같고 다름을 잘 관찰하라."

  

  3.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이 때에 해통(?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만약 어떤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해 삼계를 윤회하면

  

  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점교를 듣고 믿음과 이해가 점차 생기게 되어 여섯 지위에 의지해 수행하면서 3아승기겁 동안 참기 어려운 일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여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어 비로소 무루(無漏)의 참 지혜를 얻어 법신이 드러났다 하면 그것을 이름하여 '믿음의 싹이 일념에 생기게 되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아신다. 이것을 인해 닦으면 오는 세상에 과위를 증득한다 한다. 3대아승기겁에 6바라밀을 오랫동안 닦아서 무루의 종자를 익히어 이루면 비로소 부사의라 부른다' 한 뜻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아뢰었다. 

  "지금의 이 점증실제를 얻은 이와 아까의 돈오 실제를 얻은 사람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비록 점(漸)과 돈(頓)이 같지 않으나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 어째서 그런가? 냇물이 바다로 돌아가면 완전히 같은 한 맛이 되듯이 점해(漸解)가 진원(眞源)으로 돌아감이 어찌 둘이겠는가? 그러므로 점과 돈은 다르나 진원으로 돌아감에는 다르지[無二] 않은 것이다."

  지통은 선인의 가르침에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물러 나와 묵연했다. 그 때 유행하는 행자 행통(行通)이 선인에게 아뢰었다. 

  "전편에서는 선인께서 돈증실제라고 설했다고 들었습니다. 후에 어떤 행인이 이 편(篇)은 점증실제라는 것을 밝힌다 했습니다. 점증실제 이후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인이 답했다.

  "비록 행이 없지 않으나 그 행은 전편에서 말한 행과는 다른 것이다. 돈증실제(頓證實際) 이후에 밝힌 행자는 자리[位]에 따라 수행을 할 때 구속에 들고나고 나아가 과위에 오른 뒤의 3등(等) 보현행이 지금 이 점증실제편의 의미이다. 행자는 이 점교방편에 의지해 3아승기겁이 지날 동안 보살행을 수행해야 비로소 무루의 참지혜를 얻게 되는데, 이 무루의 참지혜로 법신을 드러내는 까닭에 점증실제라 이름하는 것이다. 점증실제 이후에 비록 수행이 없지는 않으나 그 수행이 완전히 위의 등급에 의지하는 까닭에 전편에서 밝힌 것과 다른 것이다."

유행하는 행자가 물었다.

  "전에 들은 두 편 가운데 모두 증득하는 사람과 증득되는 법, 그리고 나아가 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각각의 이름을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 중에도 증득하는 사람·증득하는 법·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증득하는 이와 증득할 법과 인연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없지 않나니, 이른바 증득하는 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이니 보신불(報身佛)이요, 증득할 법이라 함은 곧 실제(實濟)이니 법신불(法身佛)이요, 수행하는 사람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가 과위(果位)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화신불(化身佛)이라고도 한다."

선사께서 나이 육십오세에 입적하니, 시호는 요오(了俉) 선사요 탑호는 (眞原)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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