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의하면, 사조 도신(四祖道信)스님이 파두산(破頭山)에 있을 무렵 그 산중에 이름없는 노승 한 분이 있었는데 오로지 소나무만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소나무 심는 도인[栽松道者]’이라 하였다. 어느날 그는 사조스님에게 “설법을 좀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더니,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도를 듣는다 한들 널리 펼 수 있겠는가.
혹시 그대가 다시 태어나 찾아 온다 하여도 늦었다고 생각하리라” 하였다.
노승은 마침내 그 곳을 떠나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한 처녀를 보고서 정중하게 물었다.
“하룻밤 묵어 갈 수가 있겠소?
“저의 부형이 있으니 가서 부탁해 보시오.”
“그대가 응락한다면 가 보겠소.”
그러자, 처녀는 고개를 끄덕여 그러라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노승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 곳을 떠나갔다.
그 처녀는 주씨(周氏)집안의 막내딸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아기를 잉태하니,
그의 부모는 몹시 화가 나서 �아내 버렸다.
그 처녀는 갈 곳이 없어 낮에는 동네에서 길쌈으로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행각승이 묵어가는 객사[衆館] 아래에서 잠을 자며 지내다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불길하다 하여 물 속에 버렸으나 이튿날 보니,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몸이 매우 선명하기에 깜짝 놀라 건져 올렸다.
자라면서 어머니를 따라 구걸을 하니 그 고을 사람들이 ‘성 없는 아이(無姓兒)’라 불렀다.
사조스님이 황매산(黃梅山)으로 가는 길에 이 아이를 보고 장난삼아 물었다.
“너의 성이 무엇이냐?”
“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보통 성씨가 아닙니다.”
“무슨 성이냐.”
“불성(佛性)입니다.”
“성이 없느냐?”
“성씨가 ‘공(空)인 까닭에 없습니다.”
이에 사조스님은 그를 출가시키도록 어머니를 설득하니, 그 때 나이 7세였다.
당시의 객사[衆館]는 오늘날 절이 되어 불모사(佛母寺)라 하였으며,
주씨 집안은 더욱 성하게 되었고,
파두산 저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소나무 심는 도인[栽松道者]’의 육신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황매산 동선사(東禪寺)에는 불모총(佛母塚)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위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전등록(傳燈錄)」이나 「정조도(定祖圖)」의 기록에 의하면 홍인(弘忍)스님의 성을 주씨라 한 것은 모친의 성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석홍인(釋弘忍)스님의 성은 주씨이며 그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하였을 때 달빛이 그가 가는 곳을 따라 뜨락과 방안으로 비치어 밤새도록 대낮처럼 밝았으며 이상한 향기가 스며오니 온 집안이 기뻐하며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객사[衆館]를 태어난 집이라 하며 태어나 물 속에 버려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의 아버지가 몹시 사랑하여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들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일에 대한 헛된 서술들이 대략 이런 종류이다.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문학(文學) 여구균(閭丘均)이 부도탑을 세웠지만 쓸모 없는 글을 새겼을 뿐이다.
더우기 회창(會昌) 연간(841~846)의 불법 탄압과 당대 말엽의 잦은 난리로 또 다시 짓밟혀 더욱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록이 잘못된 것임은 어머니가 주씨인데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위자(無爲子)는 일찍이 스님의 영정에 찬하였다.
누구에겐들 아버지가 없으랴마는 조사에겐 오직 어머니뿐
그 어머니는 누구신가? 주씨 집안의 막내딸
도도히 흐르는 물이 강으로 들어가듯
문 앞은 변암없이 장안으로 가는 길
人孰無父祖獨有母 其母爲誰周氏季女
濁港滔滔入大江 門前依舊長安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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