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91. 깨친 후 습기의 존속에 대한 두 견해 / 규봉 종밀(圭峯宗密)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17:15

 

 

 

 당(唐) 상서(尙書) 온조(溫造)가 한번은 규봉 종밀(圭峯宗密)스님에게 물었다.

   “이치를 깨달아 망념이 쉬어버린 사람은 다시는 업을 짓지 않으니,

한 세상의 수명이 다하여 죽은 후엔 그의 신령한 성품〔靈性〕은 어디에 의탁하게 됩니까?”

 

   종밀스님은 서신으로 답하였다.

   “일체 중생 모두가 비고 고요하여 신령하게 아는 성품〔空寂靈性〕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는 부처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부질없이 일신에 집착하여 ‘나’라는 생각〔我相〕을 내기에,

사랑과 미움 따위의 정이 생겨나고 그 정을 따라 업이 지어지고 업을 따라 과보를 받게 되어 영겁(永劫)토록 낳음. 늙음. 질병. 죽음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 속에 알아보는 성품은 나거나 죽는 일이 없으니 이는 마치 꿈속에서 쫓기어도 몸은 변함없이 편안한 것과 같으며 또한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도 축축한 성질은 바뀌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 이치를 깨닫게 되면 그대로 법신(法身)이니,

본디 태어남이 없는데〔無生〕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고, 밝고 밝아 항시 알아 보지만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가는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생에 윤회하면서 망정과 집착을 익혀 그것이 성품이 되어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이 미세하고도 끊임없이 진리에 들어오니 이러한 것은 영특하게 통달한 사람이라 해도 갑자기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오래도록 살펴서 줄여가고 또 줄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바람은 갑자기 멈춰도 물결은 서서히 잠자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한번의 몸으로 닦아서 갑자기 부처님의 기용(機用)과 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공적(空寂)으로 본체를 삼을지언정 망념을 그것이라고 오인하지 말아야 하며,

진지(眞知)로 본심을 삼아 망념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망념이 일어났다 하여도 전혀 망념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러도 자연히 업이 그대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며,

설령 중음신(中陰身 : 죽은 뒤 다음 몸을 받기 이전 상태)을 받는다 하여도 자유로와 천상이든 인간세계이든 마음대로 의탁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분단의 몸〔分段身 : 여러 생에 일정한 기간씩 생사를 거듭하는 몸〕을 받지 않게 되므로 자연히 짧은 목숨이 장수하게 되고 추악한 것이 오묘하게 됩니다.       

또한 미세하게 흐르던 모든 것이 고요해져서 원만하게 깨달은 큰 지혜만이 오롯이 빛나면 곧 천백억 가지 몸을 나투어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게 되니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송(宋) 시랑(侍郞) 한종고(韓宗古) 또한 일찌기 회당 노스님에게 서신을 올려 물었다.

   “지난날 스님께서 ‘깨달으면 완전히 의심이 없어진다’고 말하셨는데,

까마득한 옛부터 있어온 번뇌와 습기(習氣)는 한꺼번에 다 없앨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에 대한 회당 노스님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보낸 서신 속에 담겨 있는 말을 살펴보니, ‘깨달으면 완전히 의심이 없어진다고 하나 까마득한 옛부터 있어온 번뇌와 습기는 한번에 다 없앨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밖에 다른 법은 없으니 번뇌와 습기가 무엇이기에 그처럼 깡그리 없애려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면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격입니다.  

옛스님들의 그와같은 말은 병에 따라 약을 마련한 것이므로 설령 번뇌와 습기가 있다 하여도 오로지 여래의 지견(知見)으로 치유하면 될 뿐이니 이 모두가 좋은 방편으로 후학을 이끌어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스려야 할 습기가 결정코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음 바깥에 없애야 할 어떤 법을 두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거북이가 진흙 위에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욱을 털어버리면 또 다른 자국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격이니, 도리어 병만이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 마음과 법이 없어지고 나면 또 다시 무엇을 말끔히 없애려 하겠습니까?  

보내온 물음에 간략하게 답하여 산중인의 서신으로 삼으려 합니다.”

   두 분 큰 스님이 방편에 따라 하신 말씀은 각기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애당초 우열이 없다.  

 

그렇지만 규봉스님의 답서는 뒤의 한종고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될 만한 것으로서 종지를 잃지 않고 바른 견해를 분명히 밝힌 것이니,

종밀스님의 말을 회당 노스님의 말씀과 비교하여 살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