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 연수(永明延壽 : 904~975)스님이 말씀하셨다.
“불조의 정종(正宗)을 진실로 뉘라서 알겠는가.
믿음만이라도 있으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나아가 닦아 깨치는 단계를 논하자면,
총림에서는 모두 보살의 지위를 공부한 수준에 따라 다르게 보고 있다.
우선 교학에서는 초심(初心)보살을 모두 ‘미루어 아는〔比知〕’ 단계로 인정한다.
또한 가르침(敎)을 통해 깨친다고도 한다.
먼저 설법을 듣고 앎으로써 믿고 들어간 뒤에 생각 없는〔無思〕방편을 닦아 계합한다는 것이니,
믿는 단계에 들어가면 조사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한다.
다음으로 지금 세상에서 닦는 방편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중생계(衆生界)에는 첫째, 미루어 암〔比知〕, 둘째, 그대로 암〔現知〕, 셋째 교설에 의지해 앎〔約敎而知〕이 있다.
첫째 미루어 앎〔比知〕이란 번뇌에 싸인 지금 우리의 경우이다.
밤에는 모두 꿈을 꾸게 되는데 꿈 속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경계에 대하여 근심. 기쁨이 분명하지만 깨어보면 침상 위에서 잠자는 몸이니 어찌 이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하겠는가.
모두가 꿈 속에서 의식과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니 깨어났을 때 보이는 경계도 모두가 꿈 속과 같아서 실제가 없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미래. 현재 3세의 모든 경계는 원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의 직접적인 상분(相分)으로서 본식(本識)이 변한 것이다.
현재의 경계는 명료의식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독두(獨頭)의식과 산란(散亂)의식의 사유(思惟)여서 꿈 속에서와 깨어있을 때의 경계가 비록 다르다 하지만 모두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유심(唯心)의 뜻도 여기에 미루어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둘째의 그대로 앎〔現知〕이란 사물을 대하는 대로 분명히 알아 비교나 추측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파란 물건이나 흰 물건을 보는 경우,
그 물건은 본래 자체가 비었으므로 ‘나는 파랗다’, ‘나는 희다’ 말할 수 없고 모두가 안식(眼識)의 분(分)이 그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의식(意識)과 함께 헤아리고 분별하여 파랗다 희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으로 색(色)인 줄을 판단하고 말로 파랗다고 하니,
모두 의식과 언어가 망령되게도 거치른 6진(六塵)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는 스스로 성립하지 못하고 이름은 스스로 불리워지지 못하니,
하나의 색이 이미 그렇다면 만법도 다 그러하여 모두 자성(自性)이 없는 의식과 언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본디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가 시끄럽게 법석댄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유(有)’의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경계가 모두 ‘유’이고, ‘공(空)’의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는 온갖 경계가 모두‘공’이다.
그렇다면 ‘공(空)’은 스스로 ‘공’이 아니라 마음을 의지하여 ‘공’이 되며,
‘유’는 스스로 ‘유’가 아니라 마음으로 인연하여 ‘유’가 되는 것이다.
이미 ‘공’도 아니요 ‘유’도 아니라면 오직 식이며 마음일 뿐〔唯識唯心〕이니 마음이 없다면 만법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또한 과거의 경계를 어찌 ‘유’라 할 수 있으랴?
생각에 따라 일어나는 곳에 갑자기 앞에 나타나니,
만일 생각이 생기지 않는다면 바깥 경계는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모두 중생의 일상생활에서 현실로 느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이해하기 쉬우니 어찌 닦아 깨침을 빌리겠는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큰스님은 ‘오직 식〔識〕인 줄 아는 대근기는 항상 자기 마음의 의식과 언어를 바깥 경계라고 관〔觀〕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처음 ‘관’할 때 비록 성인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분명히 의식과 언어를 부분적으로 알면 보살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교설을 통해 안다〔約敎而知〕는 것은 「대경(大經)」에 ‘삼계는 유심(唯心)이요,
만법은 유식(唯識)’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깨달아야 할 근본이치〔所證本理〕인 동시에 이치를 설명해주는 방편〔能詮正宗〕이다."
나는 일찌기 이 말들을 서너차례 반복해 읽은 후 불조의 가르침이 이토록 넓고 평범하며 명백하고 간결한 데에 대하여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이를 참으로 알고 믿는 자가 많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청량 징관(淸涼澄觀 : 738~839)스님은 말하였다.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근면과 용기와 생각과 지각으로 수행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세상살이를 탐착하는 옛부터의 악습을 버린다는 것은 세간의 자애로운 부친과 효자가 이별하는 것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정진하여야만 비로소 버릴 수 있다.
근면〔勤〕하면 채찍질하고 격려하는 데 부지런하며,
용맹〔勇〕하면 그침이 없고,
생각〔念〕하면 명백히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알면〔知〕후회없이 결단할 수 있다.”
나는 청량스님의 훈계를 지키고 영명스님의 종지를 따라 여러 도반들과 함께 원각 도량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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