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11. 백낙천이 제스님에게 보낸 편지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18:56

  

 

 

 향산거사(香山居士) 백낙천(白樂天 : 771~846)은 불경에 심취하였으며, 그와 교류하는 사람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  

그가 제(濟)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심오하고 은미한 이치를 깊이 깨치고 고매한 불법을 밝게 알았다.

   나는 항상 그의 글을 읽다 말고는 덮어두고 매우 감탄하며 그의 인품을 상상해 보곤 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제스님의 답서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를 계기로 제스님이 백낙천에게 보냈을 답서를 지어 이를 보완하고, 아울러 백낙천이 제스님에게 보낸 서간문의 전문을 여기에 기록하려 한다.

『〇월 〇일, 제자 태원(太原) 백거이(白居易)는 스님에게 아뢰옵니다.

   지난날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저의 어리석음을 개의치 않고 불법을 이야기해 주었고 때로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거듭 설명해 주셨는데도 이제 경전을 대함에 알지 못할 곳이 두어 군데가 있습니다.  

한번쯤 찾아 뵙고 물으려 하였지만 서로 한가한 시간이 없어 말로써는 모두 표현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어 대강이나마 글로 적어 묻사오니,

바라옵건대 살펴보고 상세히 회답을 주시어 깨닫지 못한 점을 열어 주십사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불존께서는 더할 수 없는 큰 지혜로써 일체 중생을 살펴보시고 그들의 성품[根性]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음을 아시어 큰 지혜로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제(闡提 :성불할 종자가 없는 중생)를 위해서는 10선(十善)을 설하셨고, 소승을 위해서는 4제(四諦)를 설하셨으며, 중승(中乘)을 위해서는 12인연(十二因緣)을 설하셨고, 대승(大乘)을 위해서는 6바라밀(六波羅密)을 설하셨습니다.  

모두가 병에 따라서 약을 쓰신 것으로 방편의 가르침 가운데에서도 바뀔 수 없는 모범이라 하겠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만일 소승에게 대승법을 설한다면 그의 마음은 어지러워 의혹과 불신을 가지게 될 것이니 이른바 작은 소발자욱에 큰 바닷물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반하여 대승에게 소승법을 설한다면 이는 보배 그릇 속에 더러운 음식물을 담아 놓은 격이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는 그뜻을 총괄하여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병에 따라 약을 주셨다” 하였고,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서는 “먼저 생각해 보지 않고 무슨 법을 설할 수 있겠는가? 응해야 할 대상에 따라 설법하는 것이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니 설법하는 사람이 근기[根性]에 따르지 않을까 걱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법화경(法華經)」에 경계하기를, “만일 부처만을 찬양하고 중생을 빠뜨리면 불법을 믿지 않게 되어 법을 깨뜨리고 불신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설법자가 그 병을 구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법을 듣는 자도 불법에 믿음을 내지 못하여 죄악에 빠져들까 걱정 한 것이니 부처님의 부촉(付囑)이 어쩌면 이다지도 간곡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어찌된 일입니까?

 「법왕경(法王經)」에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근기를 고정해 놓고, 소승인에게 소승을 설하고 대승인에게 대승을 설하고 천제에게 천제를 설하면 이는 불성을 잃고 불신(佛身)을 없애는 일이다.  

이렇게 설하는 사람은 마땅히 백천만겁 동안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설령 불존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하더라도 지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며, 만일 그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입술과 혀가 없는 업보를 받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의 성품이 바로 법성이니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데 어찌 그 가운데 병과 약을 분별하 수 있겠는가?”

   또 말하였습니다.

   “많은 불법 가운데 만일 높낮이가 있다 한다면 삿된 말이니 그의 입을 찢고 혓바닥을 두 동강이 내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일체 중생의 마음에 때가 묻으면 모두가 더럽고 마음이 청정하면 모두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에게 병이 있다면 모두가 똑같은 병일 것이며, 중생이 약을 필요로 한다면 모두 똑같은 약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만일 많은 법을 말한다면 그것을 ‘전도(顚倒)’라고 이름하니 무엇 때문인가?  

부질없는 분별로 선악의 법을나누어 일체 법을 깨뜨리기 때문이며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는 것은 불법을 끊어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헐어버릴 수 없는 분명한 뜻이다.”

   또한 「금강삼매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결같은 도[一味道]로 해야지 결코 소승으로 해서는 안되니, 고른 비에 흠뻑 젖듯 전혀 다른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라.”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三菩提 : 無上正等覺)라 이름한다.”

   뒤에서 말한 세 경전(法王經. 金剛三昧經. 金剛經)에 근거하여 보면 앞에서 말한 세 경전(維摩經. 首楞嚴經. 法華經)의 뜻과는 매우 어긋나는데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유마힐(維摩詰)이 부루나(富樓那 : 제일가는 辯才로서 석가 십대 제자 가운데 하나)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마땅히 먼저 입정(入定)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본 뒤에 설법하라” 하였고, 또한 “사람의 근기를 보지 못하면 설법해선 안된다” 고 하였습니다.  

부루나는 통달한 지혜를 갖추었고 또한 여래를 친히 모신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도 중생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5백년이 지난 오늘날의 말법 속에 사는 제자로서 어떻게 중생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본 뒤에 설법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꿰뚫어보았다 하더라도 그가 소승의 마음으로 발심하였다면 그에게 대승을 설법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하고서 경솔하게 자기의 뜻을 설법하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중생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없다 하여 설법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겟습니까?   

만일 뜻에 의할지언정 말에 의하지 말라 한다면 위의 여섯 경전은 뜻이 서로 다르니 어느 경전을 따라야 합니까?  

만일 「요의경(了義經)」(방편설이 아닌 궁극의 이치를 설한 경)을 따르라 한다면 삼세 제불과 일체 훌륭한 법이 모두 이 경 속에서 나온 것이니, 무엇을 ‘불료의경(不了義經)’이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많은 경전 가운데 「유마경」「법화경」「수능엄경」의 말과 같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며, 「법왕경」「금강삼매경」의 말과 같은 부분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만을 들어 말할 수 없기에 각기 세 경전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 여섯 경전은 모두 스님께서 항상 강독하신 바이기에 오늘 이를 인용하여 질문하오니 반드시 매우 깊은 의미로 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느 사람이 생각찮게 스님에게 법을 묻는다면 스님은 그의 마음을 볼 수도 있고 그의 마음을 볼 수 없기도 하는데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으로 설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똑같은 병, 똑같은 약으로 설법하시겠습니까?   

만일 병에 맞게 약을 준다면 그것은 높낮이가 있게 되고 일미(一味)가 아닌 여러 가지 맛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법왕경」등의 세 경전의 뜻과는 상반됩니다.

어찌 그 뜻이 상반되는 데에만 그치겠습니까?  

위에서 말했던 죄보까지도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똑같은 병에 똑같은 약을 주어야 한다면 반드시 대승을 설해야 할 것이니 대승이란 바로 불승(佛乘)입니다.   

불승을 찬양하면서 기연에 따라 응하지도 못하고 병을 치료하지도 못한다면 이는 「유마경」등 세 경전의 뜻과는 상반됩니다.  

어찌 그 뜻과 상반되는 데에만 그치겠습니까?  

중생을 죄악의 괴로움속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여섯 경전 모두 여래의 말씀으로서 여래의 말씀은 참되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고 다른 점이 없습니다.   

이제 이를 따르자니 저것과 상반되고 저것을 따르자면 이것과 거슬리니, 가령 스님에게 묻는다면 무슨 법으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알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5온(五蘊)이란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이며, 12인연이란 무명(無明)은 ‘행(行)’으로 인연하고, ‘행’은 ‘식(識)’으로, ‘식’은 ‘명색(名色)’으로, ‘명색’은 ‘6입(六入)’으로, ‘6입’은 ‘촉(觸)’으로, ‘촉’은 ‘수(受)’로, ‘수’는 ‘애(愛)’로, ‘애’는 ‘취(取)’로, ‘취’는 ‘유(有)’로, ‘유’는 ‘생(生)’으로, ‘생’은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고뇌[老死憂悲苦惱]’로 인연한다는 것입니다.   

‘5온’이니 ‘12인연’이니 하는 것은 똑같은 법이며 똑같은 뜻으로서 간략하게 말하면 ‘5온’이고, 자상하게 말하면 ‘12인연’이라 하니 명칭이 많고 적음이야 다르다 하지만 그 옮아가는 차례는 모두가 일정한 조리를 가지고 일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5온’에서는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의 순서로 되어 있고 ‘12인연’에서는 ‘행. 식. 색. 입. 촉. 수. 상(行識色入觸受想)’의 순서로 배열되어 잇으니,

하나는 ‘색’이 ‘행’의 앞에 놓여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색’이 ‘행’의 뒤에 놓여 있습니다.  

제대로 순서를 따져 보아도 맞지 않고 거꾸로 헤아려 보아도 같지 않습니다.  

불존께서 차례대로 말씀하셨다면 아마 이러한 혼잡이 없었을 것이며,

우연스레 설법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인연’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니 앞뒤 순서가 맞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점이 제가 알지 못하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스님께서는 연로한 큰스님이며 후학의 큰 스승으로서 출가 비구에게 나아가 설법하여 불사를 이루셨으니 반드시 이 두 가지의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빠짐없이 통달하셨을 것이기에 스님의 친필 가르침을 바라는 바입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것을 깊이 간직하여 길이길이 잊지 않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의문도 뒤이어 끊임없이 물을 것을 바라면서 백거이 올립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대하여 답서를 대신하는 바이다.

 『글월까지 보내어 불법에 대하여 물었는데 돌이켜보니 노둔한 사람으로서 하늘이 내려주신 변재(辯才)를 어떻게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늙은 힘을 다해서라도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거사의 바람에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사가 말하는 여섯 경전의 두 가지 뜻과 ‘행’ ‘색’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의문을 풀지 못했던 까닭은,

거사 스스로가 물은 ‘방편지(方便智)’ 이 세 글자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이 세 마디 말을 깨달으면 아무리 수많은 오묘한 뜻과 끝없는 법문일지라도 연구하지 않고서 알게 될 것이니, 「유마경」「법왕경」등 전후 경전 속에 서로 어긋나는 뜻쯤이야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방편지’라 하는 것은 이를테면 장수가 병사를 거느릴 때,

뇌정이나 기괄(방아쇠)을 쏠 때처럼 일정한 법이 없이 갖은 전략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연(未然)에 실수를 막을 수 있는 동시에 천리 밖에서도 적을 깨부술 수도 있으니 어찌 전형적인 방식[典故]에만 근거하겠습니까?

 

   대체로 병력의 허실(虛實)과 병사의 사기 문제, 진법(陳法)의 가부, 성패의 예견에는 일정한 이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 불교에서 근기를 보고 법을 주어 어지러움이 없게 하기 위해 3승(三乘 : 성문. 연각. 보살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병사의 사기만을 보고 병력의 허실을 판단하여 일을 치룬다면 그릇된 것이니 우리 불법에서 예를 들면 대승의 법을 소승에게 전수할 수 없고 소승은 끝까지 대승의 법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유마경」「법화경」등 세 경전에서 간절히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법왕경」등 세 경전에서도 명백히 설명하여 숨김없이 가르쳐 주신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를테면 병사를 거느리는 장수의 뜻이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제하여 평안케 하려는 데 있다면 여래의 뜻은 미혹을 열어주어 밝은 지혜를 드러내려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3승이라는 말을 부처님의 ‘방편지’라고 집착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특히나 중생의 근기에 등급이 있다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도리어 상견(常見)에 떨어진 것이니,

그것은 외도(外道)이지 불도가 아닙니다.  

 

한편 중생의 불성은 예부터 이런 일(등급)이 없었다고 고집하는 자 또한 단견(斷見)에 떨어진 것이니 그것도 외도이지 불도는 아닙니다.

  「화엄경」에서는, “어리석은 범부는 불존의 방편을 깨닫지 못하고 3승에 집착한다” 하였고,

「법화경」에서는 “과거불을 거슬러 생각해 보면 그 분들도 3승을 설법하였을 것이다”하였으니

이것으로 그대의 의문은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열반경」에서는 “일찍 성불하려는 자는 일찍 성불하도록 하고 늦게 성불하려는 자에게는 늦게 성불하도록 한다”하였고,

「기신론」에서는 “세존께서는 용맹한 중생을 위하여는 성불은 한 생각에 달려 있다 하시고,

게으른 중생을 위해서는 과보를 얻으려면 모름지기 아승지겁을 채워야 한다고 설하셨다”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방편지’의 심오한 뜻을 말한 것으로서 신통하게 이를 밝히며 자재하게 주고 빼앗는 방편을 베풀어 중생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일대시교(一代時敎 : 부처님 평생의 가르침) 전체를 법상종(法相宗). 파상종(破相宗). 성종(性宗) 3종(三宗)으로 분류할 수 있으니 앞에서 말한 여섯 경전의 두 가지 뜻은 ‘법상(앞 세가지)’과 ‘파상(뒷 세가지)’ 2종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2종이 원래 서로가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은 여러 가지 법상(法相)을 시설하느냐[建立]그것들을 부정하느냐[蕩除]의 입장[宗]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사는 선지식이 납자의 근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 행각하여 법을 잘못 전수하면 죄보(罪報)까지 얻게 될 것이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을 아는 비구란 비록 번뇌가 가득찬 범부일지라도 속으로는 밝은 지혜와 예리한 분변을 좋아하니, 과위(果位)를 소승과는 비교할 바 아닙니다.   

이는 마치 가릉빈가[迦陵鳥 : 극락의 새]가 껍질 속에 있어도 그 아름다운 소리는 뭇 새를 압도하고, 견호목(堅好木 : 唐木)이 움트면 뭇 나무들 중에서 빼어난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유마힐이 꾸짖는 말과 부루나가 스스로 그의 잘못을 말한 데에는 모두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논하면 거사가 오히려 더 큰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 가까운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왕공 대인들이 천하 선비를 찾을 때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나 문벌을 앞세우지는 않지만 반드시 먼저 말은 들어보게 마련입니다.  

말이란 덕행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므로 ‘덕을 지닌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한「논어(論語)」에서는 “그 사람이 행한 동기를 살피고 그 사람이 어디에 마음 편안해 하는가를 살피면 뉘라서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옛 성인이라 하여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니 법을 아는 자가 사람의 작고 큰 근기를 살펴보는 데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거사가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과 12유지인연(十二有支因緣)’ 법이 명칭의 순서가 맞지 않고 서로가 어긋났다 의심한 것은 명목(名目)의 이치를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의 5온은 ‘3고(三苦)’가 이미 갖추어진 몸이며,

12유지인연은 3세를 통해 고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는[三世生因] 법입니다.  

이를테면「화엄경」십지품(十地品)에 “으뜸가는 이치[第一義諦]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무명(無明)’이라 이름하고 업과(業果)를 짓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첫마음[初心 : 무명]에 의지하여 난 것이 ‘식(識)’인데 이것이 ‘4취온(四取蘊 : 색. 수. 상. 행)’과 붙어 나는 것을 ‘명. 색(名色)’등이라 한다” 하였으니 그 본말의 맞물린 관계를 서술한 것은 이치가 본디 그렇기 때문입니다.

 

  「반야경」에 의하면, “‘색(色)’이 ‘공(空)’이며 ‘공’이 ‘색’이니, ‘색’은 ‘공’과 다를 바 없고 ‘공’은 ‘색’과 다를 바 없다.   ‘수. 상. 행. 식(受想行識)’또한 이와 같다”고 하니, 이는 ‘유(有)’의 법이 참 아님을 간파한 것입니다.   우선 색의 체[色體]도 그러한데 하물며 ‘4온(四蘊)’이겠습니까.

  「반야경」등은 ‘유’를 부정하는 가르침이므로 ‘5온’을 말함에 있어 ‘색(色)’이 ‘행(行)’의 앞에 있고, 「화엄경」 십지품 등의 경전은 본말의 맞물린 인연을 서술한 것이므로 ‘색’이 ‘행’의 뒤에 자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사가 말하였듯, 간략하게 말하자면 ‘5온’이고, 자세하게 말하자면 ‘12인연’인 것은 아닙니다.

   법의 근본은 요컨대 이치[理]에 바탕하고 뜻[義]에 맞아야 하니 굳이 명칭과 개념에 매여 스스로를 얽어매서는 안됩니다.   

내 병 많은 몸으로 오랫동안 강학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불법의 심오한 뜻이며 감히 나의 억측으로 단정지은 말이 아닙니다.  

또한 말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와 부처를 빚어놓고 같은지 다른지를 명백하게 가릴 수 있을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