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개선밀암겸선사답진지승서 開善密庵謙禪師答陳知丞書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5:36
 

 

 

개선밀암겸선사답진지승서 開善密庵謙禪師答陳知丞書[1]

 

某啓. 欣審官舍多暇, 焚香靜黙, 坐進此道, 何樂如之? 參禪如應擧. 應擧之志, 在乎登第, 若不登第而欲功名富貴, 光華一世者, 不可得也; 參禪之志, 在乎悟道, 若不悟道而欲福德智慧, 超越三界者, 不可得也. 竊嘗思, 悟道之爲易, 登第之爲難, 何故? 學術在我, 與奪在彼, 以我之所見, 合彼之所見, 不亦難乎? 是以, 登弟之難也. 參究在我, 證入在我, 以我之無見, 合彼之無見, 不亦易乎? 是以, 悟道之爲易也. 然, 參禪者衆, 悟道者寡, 何也? 有我故也. 有我則不能證入, 亦易中之難也. 讀書者衆, 及第者亦衆, 何也? 見合故也. 見合則推而應選, 是難中之易也. 故, 見合爲易, 無我爲難; 無我爲易, 無無爲難; 無無亦易, 亦無無無爲難; 亦無無無亦易, 亦無無無亦無爲難; 亦無無無亦無爲易, 和座子撞飜爲難. 故, 龐居士云: 「鍊盡三山鐵, 鎔銷五嶽銅.」 豈欺人哉! 因筆及此, 庶火爐邊團欒頭, 說無生話時, 聊發一笑.[2]

아무개가 아뢰노라. 흔쾌히 살피건대, 관사에 여가가 많아서 향을 사르고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가만히 앉아 이 도에 나아간다고 하니 어떠한 즐거움이 이와 같겠는가. 참선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과 같다. 과거에 응하는 뜻은 급제함에 있으니 만약 급제하지 못하고서 부귀공명으로 한 세상을 영화롭고자 하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며, 참선하는 뜻은 도를 깨치는데 있으니 만약 도를 깨치지 못하고서 복덕과 지혜로 삼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도를 깨치기는 쉽고 과거는 급제하기 어려우니 무슨 까닭인가? 학문과 기술은 나에게 있으나 주고 빼앗는 것은 저들에게 있으므로 나의 소견으로써 저들의 소견에 합치시켜야 하기에 대단히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과거에 급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참선으로 진리를 구함도 나에게 있고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도 나에게 있으므로 나의 소견이 없는 자리로써 저 소견이 없는 자리에 합치시키는 것이기에 대단히 쉽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도를 깨치기는 쉬운 것이다.

그러나 참선하는 자는 많으나 도를 깨치는 자는 적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면 증득하여 들어갈 수 없으니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려운 것이다. 글을 읽는 자가 많고 급제하는 자 또한 많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견해가 계합하기 때문이다. 견해가 계합하면 추천하여 선발에 응하는 것이니 이는 어려운 가운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견해가 계합되기는 쉬우나 내가 없기는 어려우며, 내가 없기는 쉬우나 내가 없음이 없기는 어려우며, 내가 없음이 없기는 또한 쉬우나 또한 내가 없음이 없는 것까지 없기는 어려우며, 또한 내가 없음이 없는 것까지 없기는 또한 쉬우나 또한 내가 없음이 없는 것이 없는 것까지 또한 없기는 어려우며, 내가 없음이 없는 것이 없는 것까지 또한 없기는 쉬우나 앉은 방석까지도 아울러 흔들어 뒤집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방거사가 「세 산줄기의 쇠를 모두 정련하고 다섯 산맥의 구리를 모두 녹여낸다」 하였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는가.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음에 화롯가에서 단란하게 무생無生에 관한 얘기를 말할 때 그저 한 차례 웃기를 바라노라.

【1】縣百戶以上爲令, 皆有丞, 主刑獄囚徒, 多以本部人爲之. 俗謂之閑官, 不領公事. 道謙禪師, 建寧府人, 嗣大慧.

【2】龐居士頌云: 「有男不婚, 有女不嫁, 大家團欒頭, 共說無生話.」

【1】현에서 1백 가구 이상을 令으로하여 모두 丞을 두었으니, 주로 옥사나 죄인의 일을 다루며 대체로 본 부락의 사람으로써 그 보직을 삼았다. 속칭 閑官이라 하니 공적인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도겸선사는 건녕부 사람으로 대혜의 법을 이었다.

【2】방거사의 송에 말하였다. 「남자가 있으되 장가들지 않고 여자가 있으되 시집가지 않고, 집안 모두 단란하게 둘러앉아 無生의 얘기를 함께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