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랑답운행인서 顔侍郞答雲行人書
近辱書誨, 且以禪敎之說見敎, 讀之, 深有開慰. 而向來亦嘗有所開示, 適以多事, 不能與師周旋,[1] 今復有言, 自非見愛之深, 孰能以此相警? 顧我愚昧, 何足知之, 然師所言者, 予竊疑焉. 於如來方便之道, 似執一偏, 猶有人我之見, 以我爲是, 以人爲非, 於佛法中, 是爲大病. 人我不除, 妄談優劣, 只爲戱論, 爭之不已, 遂成謗法, 未獲妙果, 先招惡報, 不可不愼. 但能於先佛一方便門, 精進修行, 行滿功圓, 自然超脫, 不必執我者爲是‧以餘爲非也. 修行淨土, 佛及菩薩皆所稱歎, 在家‧出家, 往生非一, 况今末法之中, 修此門者, 可謂捷經. 然, 於是中間, 亦須洗去根塵, 嶊折我慢, 於其他種種法門, 雖非正修行路, 隨力隨分, 亦加欽信, 豈可妄論優劣, 自爲高下? 達磨西來, 不立文字, 直傳心印, 一花五葉. 自曹溪來, 悟此法者, 如稻麻竹葦, 在李唐時, 世主尊崇, 如事師長, 以至于今, 師授不絶, 特未可以優劣議也. 若必欲引敎家義目, 定其造證, 謂如是修者方入某地‧如是行者方登某位, 眞所謂描畵虛空, 徒自勞耳. 故,《經》云: 「如人數他寶, 自無半錢分.」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願師屛去知見, 勿論其他, 專心自修於淨業也. 某每與師談, 見師多斥不立文字之說, 使此說非善則達磨必不西來, 二祖必不肯斷臂求之也. 今禪家文字徧滿天下, 此乃末流自然至此, 何足怪耶? 娑婆世界衆生知見種種差別, 非可以一法而得出離故, 佛以方便設種種法門, 使其東西南北縱橫小大, 皆可修行, 皆可證入. 華嚴會上, 文殊師利, 盖嘗問於覺首言: 「心性是一, 云何見有種種差別?」 問於德首言: 「如來所悟, 唯是一法, 云何乃說無量諸法?」 問於智首言: 「於佛法中, 智爲上首, 如來何故, 或讚布施, 或讚持戒, 或讚堪忍, 以至或復讚歎慈悲喜捨, 終無有以一法而得出離者?」 咸有頌答, 是師之朝夕所讀者也, 斯理必深明之. 夫受病旣殊, 處方亦異, 今以手足之疾, 服某藥而愈, 他人病在腹心而責其不進手足之藥, 乃以治腹心之劑爲非, 可乎? 楞嚴會中二十五行, 獨推觀音, 豈可便優觀音而劣諸菩薩? 神仙外道, 於我法中, 皆爲邪見. 然, 華嚴知識, 或在外道, 或爲人王, 或爲淫女, 引導衆生, 若以正修行者爲是, 則善財所參勝熱‧婆須密女‧無厭足王等, 皆可指爲非也.[2] 千經萬論, 止爲衆生除病, 病去藥除, 何須無病而自灸? 此心垢重, 故修淨因, 淨垢若亡, 復何修證. 三界無住, 何處求心, 四大本空, 佛依何住? 衣中之寶, 只爲衣纏, 衣若壞亡, 珠當自現. 聊敍鄙見, 以復來誨, 或別有可敎者, 更垂一言, 幸甚. 愼勿支離蔓衍, 以成戱論也. 邇來, 四大輕安否? 所苦不下食, 今復差退否? 某隨緣過日, 只求無事耳. 未間千萬珍重. 근자에 수고스럽게 서신으로써 깨우쳐 주시고 또한 선禪과 교敎의 말씀으로써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심에 그것을 읽으니 깨닫고 위로됨이 절실하였습니다. 또한 지난번에도 계도해 보이셨으나 마침 여러 일로 하여 스님과 더불어 서신을 내왕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다시 말씀이 있으시니, 만약 사랑을 드러내 보임이 깊지 않다면 그 누가 능히 이러한 것으로써 서로 경책하여 주겠습니까. 돌이켜보건대 제가 우매한 까닭에 어찌 흡족히 그것을 알겠습니까 마는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제가 그윽이 의심스럽습니다. 여래 방편의 도에 있어서 흡사 치우친 한 편에 집착하는 것 같아 오히려 인상과 아상의 견해가 있게 되어 나 자신을 옳다 하고 남을 그르다 하니 부처님 법에서는 이것이 큰 병폐입니다. 인상과 아상을 떨치지 못하고 망령되이 우열을 논한다면 단지 쓸모 없는 이론이 될 뿐이니 이를 다투어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정법을 헐뜯게 되어 오묘한 결과를 얻지 못한 채 앞서 죄악의 과보 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앞선 부처님의 한 가지 방편문에 능하여 오로지 수행해 나간다면 덕행과 공덕이 원만해지고 자연스럽게 초탈해질 것이므로 나 자신만이 옳고 그 나머지는 그르다는 생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토淨土를 수행하면 부처님과 보살이 모두 칭송하고 찬탄할 것이며 재가와 출가 가운데 왕생往生한 이가 한 둘이 아닐진대 하물며 지금과 같은 말법 시대에 이 정토염불문을 수행하는 것은 가히 첩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 또한 오근五根과 오진五塵을 씻어버리고 아만을 꺾어야 하고 기타 가지가지의 법문에서 비록 미리 마음먹었던 수행의 행로는 아니더라도 역량과 분수에 따라 또한 한층 더 공경하여 믿어야 할 것이니, 어찌 망령되이 우열을 논하여 스스로 높고 낮다 여기겠습니까. 달마가 서쪽에서 오셔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의 흔적으로 곧장 전하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이 되었습니다. 조계선사로부터 내려오며 이 법을 깨달은 자가 마치 빽빽이 들어찬 볏단이나 대나무숲처럼 많았고 이씨의 당나라 때는 대대로 군주들이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마치 스승이나 어른을 섬기듯 하였으며, 그렇게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승의 전수가 끊이지 않았으니 별스럽게 우열로써 의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교학의 가문에서 말하는 정의와 조목을 인용하여 증득의 경지에 나아가는 단계를 정하고자 하여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어떠어떠한 경지에 들어간다’거나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어떠어떠한 계위에 오른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허공을 묘사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 다만 스스로 수고로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이르기를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이의 보물을 헤아릴 뿐 자신에게는 반푼도 몫도 없는 것과 같다」라 하였듯이 법에 있어서도 수행하지 않으면 비록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알음알이 소견을 물리쳐서 버린 채 그 외의 것은 논하지 말고 전심으로 업을 깨끗이 하는 일을 스스로 닦으십시오. 제가 매번 스님과 얘기를 나눌 때 스님께서 여러번 불립문자의 논설을 배척함을 보았는데 만일 이 논설이 옳은 것이 아니라면 필시 달마가 서쪽에서 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반드시 혜가대사 또한 기꺼이 팔을 끊으며 그것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선가禪家의 문자가 만천하에 두루하니 이는 말법의 흐름이 자연히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이기에 어찌 괴이하다고만 하겠습니까. 사바세계 중생의 지혜와 견해는 가지가지로 차별이 있어 하나의 법으로써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부처님이 방편으로써 가지가지의 법문을 베풀어 동서남북과 대소종횡으로 하여금 모두 수행할 수 있게 하였고 모두 증득하여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화엄회상에서 문수사리보살이 일찍이 각수보살에게 묻기를 「마음과 성품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가지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보게 됩니까?」 하였고, 덕수보살에게 묻기를 「여래가 깨달은 바는 오직 한 가지 법인데 어찌하여 ‘무량한 모든 법’이라 말합니까?」 하였으며, 지수보살에게 묻기를 「부처님 법 가운데 지혜를 가장 우두머리로 여기는데 여래는 어떤 까닭으로 혹은 보시함을 찬탄하고 혹은 계를 지킴을 찬탄하며 혹은 감내함을 찬탄하거나 혹은 자비하고 희사함을 찬탄하기까지 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의 법으로써 벗어남을 얻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였는데 모두 게송으로 답한 것이 있으니 이는 스님께서 아침저녁으로 읽은 것이라 필시 그 이치에는 매우 밝을 것입니다. 무릇 얻은 병이 이미 다르면 그 처방도 다른 법인데, 지금 손발의 질환에 어떤 약을 복용하고 쾌유하였다 하여 다른 사람의 병이 뱃속에 있는데도 손발의 질환에 먹는 약을 쓰지 않았다고 힐책하며 뱃속 치료약을 그른 것이라 한다면 옳겠습니까? 능엄회상 가운데 25행에 유독 관음보살만을 추대한 것이 어찌 관음보살만이 우수하고 다른 모든 보살은 열등하다는 것이겠습니까. 신선이나 외도들은 우리 불법에서는 모두 삿된 지견이 됩니다. 그러나 화엄의 선지식은 혹은 외도에 있기도 하고 혹은 임금이기도 하며 혹은 음녀가 되기도 하여 중생들을 인도하는데, 만약 바르게 수행하는 자 만을 옳다 여긴다면 곧 선재가 나아가 도를 물은 승열과 파수밀녀 또는 무염족왕 등은 모두 그르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 가지의 경전과 만 가지의 논소들은 단지 중생들을 위해 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니 병이 제거되어 약이 폐기되었음에 어찌하여 병이 없는데도 스스로 뜸을 뜨겠습니까. 이 마음의 때가 무거운 까닭에 청정한 인연을 닦는 것이니 깨끗함이나 때가 만약 없어졌다면 다시 어찌 수행하고 증득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계三界에 머무름이 없으니 어디에서 마음을 구할 것이며 사대四大가 본디 비어 있는데 부처님이 어디에 의지하여 머물겠습니까. 옷 속의 보배는 단지 옷으로 쌓여져 있을 뿐이니 옷이 만약 닳아 없어지면 구슬은 응당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비천한 견해를 애오라지 서술함으로써 보내 주신 가르침에 답하오니, 혹시 달리 지도해 주실 것이 있으면 다시 한 말씀 내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난잡하게 너저분한 글이지만 삼가 노닥거리는 공론이나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근자에 심신은 편안하신지? 소화가 되지않아 고생하시던 것은 이제 차도가 있으신지? 저는 인연을 따라 날을 보내며 단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뵙지 못하는 사이 아무쪼록 자중자애하시기 바랍니다. 【1】周旋, 旋旗指麾也, 又回也, 幹也. 【2】勝熱, 示行癡行, 使善財得般若解脫門; 婆須密女, 示行貪行, 使善財得離欲解脫門; 無厭足王, 示行嗔行, 使善財得如意解脫門. 【1】周旋은 깃발을 흔들어 지휘하는 것이고, 회전시키는 것이요, 일을 감당해냄이다. 【2】승열은 어리석은 행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선재로 하여금 반야해탈문을 얻게 하였으며, 바수밀녀는 탐욕의 행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선재로 하여금 이욕해탈문을 얻게 하였으며, 무염족왕은 성냄의 행위를 드러내 보여서 선재로 하여금 여의해탈문을 얻게 하였다. ???? 古鏡和尙回汾陽太守 南陽.忠國師, 三詔竟不赴, 遂使唐.肅宗, 愈重於佛祖. 然我望南陽, 雲泥雖異路, 回首思古人, 愧汗下如雨.[1] 如何汾陽侯, 視我如泥土, 戱以玉峯寺, 出帖請權住? 豈可爲一身, 法門同受汚? 萬古長江水, 惡名洗不去. 謹謹納公帖, 觀使自收取, 放我如猿鳥, 雲山樂幽趣. 他年無以報, 朝夕香一炷. 남양의 혜충국사는 세 차례의 조서에도 결국에는 나아가지 않아 마침내 당 숙종으로 하여금 더욱더 불조를 존중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남양을 바라봄에 구름과 진흙처럼 현격히 차이나고 비록 길은 다르지만 머리를 돌려 옛사람을 생각해 보니 부끄러움에 흐르는 땀이 마치 빗줄기와 같습니다. 어찌하여 분양후는 나를 마치 진흙 보듯하여 옥봉사로 부임 문서를 내어 머무르기 청하는 것으로써 희롱하는 것입니까? 어찌 이 한 몸뚱이를 위하여 불법 문중이 함께 더러움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고의 장강 물로도 더럽혀진 이름은 씻어 낼 수 없습니다. 삼가고 삼가며 공문서를 바치니 관사께서는 스스로 거두시고 저를 원숭이나 새처럼 놓아주어 구름 낀 산속에서 그윽한 정취를 즐기게 하여 주십시오. 다른 때에 보답할 길이 없기에 아침저녁으로 한 심지의 향을 사릅니다. 【1】以我望於南陽, 雖似雲泥之逈隔, 然彼感皇王之詔, 余得太守之帖, 持今較古, 寧無愧汗之霢霂乎? 【1】나를 남양에 견주어 보면 비록 구름과 진흙 같은 현격한 차이가 있으나 그는 황제의 조서를 받았고 나는 태수의 서첩을 얻음에 지금으로 예전을 비교하면 어찌 제부끄러워 흐르는 땀이 가랑비 같음이 없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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