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홍주보봉선원선불당기 승상장상영찬 洪州寶峯禪院選佛堂記 丞相張商英撰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6:11
 

 

 

홍주보봉선원선불당기 승상장상영찬 洪州寶峯禪院選佛堂記 丞相張商英撰

 

崇寧, 天子[1]賜馬祖塔號慈應, 諡曰祖印, 歲度僧一人以奉香火. 住山老福深, 卽祖殿後建天書閣, 承閣爲堂, 以選佛名之, 使其徒請記於余, 余三辭而請益堅, 余謂之曰: 「古人謂選佛而及第者, 涉乎名言爾, 子以名堂, 余又記之, 無乃不可乎? 憐子之勤, 謾爲之記.」 夫選者, 選擇之謂也, 有去有取, 有優有劣, 施之於科擧, 用之於人才. 此, 先王所以勵世磨鈍之具,[2] 非所以選佛也. 使佛而可選也, 取六根乎? 取六塵乎? 取六識乎? 取三六則, 一切凡夫, 皆可以作佛; 去三六則, 無量佛法, 誰修誰證? 取四諦六度‧七覺八正‧九定十無畏乃至十八不共法‧三十七助道品乎? 取之則有法也; 去四諦六度乃至三十七助道品乎? 去之則無法也. 去取有無, 渺然如絲之留于心中, 欻然如埃之入乎胸次. 此在修多羅藏, 或謂之二障, 或謂之四病, 或謂之不了義, 或謂之戱論, 或謂之遍計邪見, 或謂之微細流注. 取之非佛也, 去之非佛也, 不去不取亦非佛也, 佛果可以選乎? 曰: 「先生之論, 相宗也, 吾祖之論, 禪宗也, 凡與吾選者, 心空而已矣. 弟子造堂而有問, 宗師踞座而有答: 或示之以玄要, 或示之以料揀, 或示之以法鏡三昧, 或示之以道眼因緣, 或示之以向上一路, 或示之以末後一句, 或示之以當頭, 或示之以平實, 或揚眉瞬目, 或擧拂敲床, 或畵圓相, 或劃一劃, 或拍掌, 或作舞. 契吾機者, 知其心之空也, 知其心之空則佛果可以選矣.」 余曰: 「世尊擧花, 迦葉微笑, 正法眼藏, 如斯而已矣, 後世宗師之所指示, 何其粉粉之多乎? 吾恐釋氏之敎, 中衰於此矣.」 深.河東人也, 甘麤糲,[3] 耐辛苦, 久從關西.眞淨遊, 孤硬卓立, 必能宏其敎. 盖釋氏之敎, 枯槁以遺其形, 寂寞以灰其慮, 戒定密行, 鬼神所莫窺, 慈悲妙用, 幽顯所同仰, 迫而後應則, 五衆[4]喪其伴侶, 不得已而後言則, 六聚亡其畛域. 生死之變, 人之所畏也, 吾未嘗有生, 安得有死, 則奚畏之有? 利害之境, 人之所擇也, 吾未嘗有利, 安得有害, 則奚擇之爲? 夫如是則, 不空於外而內自空, 不空於境而心自空, 不空於事而理自空, 不空於相而性自空, 不空於空而空自空. 空則等, 等則大, 大則圓, 圓則妙, 妙則佛. 嗟呼! 吾以此望子, 子尙無忽哉!

숭녕 연간에 천자께서 마조에게 탑호를 자응, 시호를 조인이라 내리고 해마다 승려 한 명을 득도시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산에 거처하는 노승 복심이 조사전 뒤에 천서각을 짓고 천서각에 이어 승당을 지어 ‘선불’이라 이름하고는 그의 문도를 시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음에 내가 세 차례나 사절하였으나 요청이 더욱 견고하기에 내가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를 가려내어 급제시킨다는 것은 이름과 말에 끄달린 것일 뿐이라 하였는데 그대가 그것으로써 승당의 이름을 짓고 내가 또 그것의 기문을 지으면 옳지 않음이 없으리요만, 그대가 애씀을 가엾게 여겨 부질없이 그것을 위해 기문을 적는다」 하였다.

무릇 ‘가려 뽑는다(選)’는 것은 선별하여 채택함을 일컬으니, 덜어내야 할 것도 있고 취해야 할 것도 있으며 우수한 자도 있고 열등한 자도 있기에 그로써 과거를 실시하였고 그로써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는 앞선 제왕들이 세상을 권면하고 아둔함을 갈고 닦는 도구로 쓰고자 함이지 부처를 가려 뽑자는 까닭이 아니다. 만약 부처님도 가히 선별할 수 있다면 육근六根에서 취하겠는가, 육진六塵에서 취하겠는가, 아니면 육식六識에서 취하겠는가? 이 세 가지 육六을 취한다면 곧 일체의 평범한 사내도 모두 부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이 세 가지 육六을 버린다면 무량한 부처님의 법을 그 누가 닦을 것이며 그 누가 증득하겠는가? 사제四諦와 육도六度와 칠각지七覺支와 팔정도八正道와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십무외十無畏 내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과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을 취하겠는가? 이를 취한다면 곧 법이 있게 되며, 사제와 육도 내지 삼십칠조도품을 버리겠는가? 이를 버린다면 곧 법이 없게 된다. 버리느냐 취하느냐 있느냐 없느냐는 [그 분별관념이] 묘연히 마치 한 올의 실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으며, 홀연히 마치 한 톨의 먼지가 가슴속에 들어온 것과 같다.

이것은 수다라장에 있으니 혹은 이를 일컬어 이장二障이라 하고, 혹은 이를 일컬어 사병四病이라 하고, 혹은 이를 일컬어 불료의不了義라 하고, 혹은 이를 일컬어 희론戱論이라 하고, 혹은 이를 일컬어 편계사견遍計邪見이라 하고, 혹은 이를 일컬어 미세류주微細流注라 한다. 이것을 취하면 부처가 아니요 이것을 버려도 부처가 아니며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더라도 역시 부처가 아니니 그럼에도 불과佛果를 선별할 수 있겠는가?

이르기를 「선생의 논지는 상종相宗의 얘기이고 나의 선조의 논지는 선종禪宗의 얘기이니 무릇 나의 선별에 참여한 자는 마음이 공空할 따름이다. 제자가 승당에 나아가 질문을 하면 종사는 자리에 앉아 답하기를 혹은 삼현삼요三玄三要로써 보여주며 혹은 사요간四料揀으로써 보여주며 혹은 법경삼매法鏡三昧로써 보여주며 혹은 도안인연道眼因緣로써 보여주며 혹은 위로 향하는 한 가닥 길로써 보여주며 혹은 최후의 한 마디 말로써 보여주며 혹은 맞닥뜨린 당장의 그 상태로써 보여주며 혹은 평상스럽고 진실한 것으로써 보여주며 혹은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깜짝거리며 혹은 불자를 들어 법상을 치며 혹은 둥근 모양을 그리며 혹은 한 획을 그으며 혹은 손바닥을 치며 혹은 춤을 추는 것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니, 나의 근기에 계합하는 자는 그 마음이 공한 줄을 아는 것이며 그 마음이 공한 줄을 안다면 곧 불과佛果를 선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존자가 미소를 지었으니 진리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으로 깨달은 비밀의 법(正法眼藏)이란 다만 이와 같을 따름인데 후세에 종사들이 가리키며 드러내 보이는 바는 어찌 그리도 분분하여 많은가. 나는 석가의 가르침이 중도에 여기에서 쇠퇴해질까 두렵다」 하였다.

복심은 하동 사람인데 거친 양식을 달게 여기고 혹독한 고생을 참아내며 오랫동안 관서의 진정을 좇아 교류함에 의젓하게 우뚝 섰으니 반드시 그 가르침을 능히 크게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석가의 가르침은 마르고 말라버림으로써 그 형체를 돌보지 않고 적막함으로써 그 근심을 삭이며, 계를 지키고 선정에 드는 그윽한 수행은 귀신도 엿보지 못할 바이며 자비의 오묘한 운용은 어둡거나 밝은 세계가 함께 숭앙하는 바이니, 절박한 후에 응하면 곧 다섯 가지 무리(五衆)가 그 반려를 잃어버리고 부득이한 후에 말하면 곧 여섯 가지 모임(六聚)이 그 경계와 영역을 잃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의 변화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이나 나는 일찍이 태어남을 맛보지 못하였음에 어찌 죽음이 있을 것이며 또한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이익과 손해의 경계는 사람들이 가려 택하는 바이나 나는 아직 이익을 맛보지 못하였음에 어찌 손해가 있을 것이며 또한 어찌 가려 택함이 있겠는가.

무릇 이와 같으면 곧 외면에 공하지 않아도 내면은 저절로 공하여지고, 경계에 공하지 않아도 마음은 저절로 공하여지고, 일에 공하지 않아도 이치는 저절로 공하여지고, 형상에 공하지 않아도 성품은 저절로 공하여지고, 공에 공하지 않더라도 공은 저절로 공하여진다. 공하면 곧 평등하고, 평등하면 곧 크고, 크면 곧 둥글고, 둥글면 곧 오묘하고, 오묘하면 곧 깨달음(佛)이다. 오호라! 내가 이것으로써 그대에게 바라나니 그대는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1】徽宗年號.

【2】梅福云: 「爵祿束帛者, 天下之砥石也, 高祖所以勵世磨鈍也.」 勵世者, 有修飾振起之意.

【3】粟一石, 得米六斗爲糲; 糲米一石, 舂爲八斗爲鑿. 與鑿同, 精也.

【4】五衆者, 漢末, 飜爲五陰, 僧叡, 改爲五衆, 唐.三藏, 改爲五蘊.《法華》一如註五趣生滅之衆, 此言五蘊和合之衆皆喪亡也.

【1】휘종의 연호이다.

【2】매종이 이르기를 「작위와 녹봉 및 비단 등은 천하의 숫돌이니 고조가 그것으로써 세상을 권면하고 아둔함을 갈고 닦고자 하였다」 하였으니 勵世란 수식을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한다는 뜻이 있다.

【3】껍질을 벗기지 않은 벼 1석으로 현미 상태의 쌀 6두를 얻으며, 현미쌀 1석을 찧으면 정미를 거친 8두의 쌀이 된다. 鑿과 같으니 정미롭다는 것이다.

【4】五衆이란, [原典의 것을] 한나라 말기에 五陰으로 번역하였다가 승려 예가 고쳐서 五衆이라 하였으며, 당나라 삼장법사는 고쳐서 五蘊이라 하였다.《법화경》에서 일여는 ‘五趣에서 나고 죽음을 거듭하는 무리’라고 주석하였으니, 이것은 오온과 화합한 무리들이 모두 없어짐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