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양주석문사승당기 송대제사도찬 襄州石門寺僧堂記 宋待制査道撰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6:36
 

 

 

양주석문사승당기 송대제사도찬 襄州石門寺僧堂記 宋待制査道撰[1]

 

乾明寺者, 去郡百里, 古曰石門, 因勅易之. 高山峻谷, 虎豹所伏, 岐路磽确,[2] 人煙夐絶, 非志于道者, 罔能捿其心也. 遊宦之徒, 覊束利名, 雖觀其勝絶, 而罕能陟其境. 道守郡日, 知有學者, 法字守榮, 自雍熙[3]三年, 參尋而至. 後, 安禪之堂, 卑隘隳壞, 於是發心重構, 克堅其志, 聚落求化, 多歷年所, 召良工‧市美材, 迄景德[4]三年, 始告成, 凡五間十一架.[5] 春, 有學徒慧果, 携錫至京, 請余識之, 將刊于石, 乃書曰: 「自佛法廣被, 達磨西來, 具信根者, 求證本源, 星居曠野, 蔽身草木, 衣不禦寒, 食不充腹. 及正法漸漓, 人法替怠, 百丈禪師乃營其棟宇, 以安老病, 邇來禪刹, 競構宏壯. 少年初學, 恣臥其間, 殊不知化緣者勞形苦骨‧施財者邀福懺悔. 明因果者, 如臥鐵床, 若當寃敵, 自非朝夕, 密密增長聖胎, 其次親善知識者, 志求解脫, 可以暫容其形, 龍神攸護. 其或心沒盖纏,[6] 身利溫煖, 不察無明, 不知命縮, 惟記語言, 自謂究竟, 韶盡遷謝,[7] 墮彼惡趣, 丈夫猛利, 得不動心哉! 榮公生鳳翔.虢邑, 出家於雍州.鄠縣.白雲山.淨居禪院.」

大中祥符[8]二年四月八日, 記.

건명사乾明寺는 군郡으로부터 1백리 떨어져 있으며 예전에는 석문사石門寺라 하였는데 칙령에 의해 이름을 바꾸었다. 높은 산과 험준한 골짜기는 호랑이와 표범이 숨어 있고 갈림길은 울퉁불퉁한 자갈길로서 사람의 자취로부터 아득히 단절되어 있으니 도 닦는 일에 뜻을 둔 이가 아니면 능히 깃들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벼슬길에서 하릴없이 노니는 무리들은 이익과 명예에 매여있기에 비록 그 뛰어난 절경을 보더라도 능히 그 경계에 오를 이가 드물었다.

사도査道가 군郡을 지키던 때에 한 학자를 알고 있었는데 법명이 수영守榮으로, 옹희 3년부터 찾아다니며 법을 묻더니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후에 좌선하는 승당이 낮고 좁으며 여기저기 허물어졌기에 발심하여 다시 짓고자 그 뜻을 굳게 가지고 마을에서 시주를 구함에 여러 해를 지나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좋은 장인을 부르고 훌륭한 재목을 구입하여 경덕 3년에 이르러 비로소 낙성을 고하니 무릇 5간間 11가架였다. 봄에 학승인 문도 혜과慧果가 석장을 끌고 서울에 이르러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며 가지고 가서 돌에 새기겠다 하므로 이에 글을 써서 말하였다.

「부처님 법이 널리 미쳐서 달마가 서쪽에서 건너옴으로부터 신근信根을 갖춘 자들이 근본 원류의 증득을 추구하여 광야에 별처럼 거처하니, 초목으로 몸을 가리우나 옷은 추위를 막지 못하였고 음식은 배를 채우지 못하였다. 정법이 점차 경박해짐에 이르러 사람과 법이 쇠퇴하고 태만해져 백장선사가 이에 건물을 지어서 늙고 병든 이들을 편안케 하였더니 그로부터 선종의 사찰들이 경쟁적으로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짓게 되었다. 젊은 나이의 초학들은 그 곳에 제멋대로 누워 있으되 교화할 인연을 가진 자(化緣者)들이 고달픈 몸으로 고초를 겪은 일과 재물을 시주한 자들이 복을 맞기 위해 깊이 참회한 것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인과에 밝은 자는 마치 쇠로 된 평상에 누워 있는 듯이 여기고 흡사 원수나 도적을 마주친 듯이 여긴 것이 원래 하루이틀이 아니었기에 가만가만히 꾸준하게 성현의 씨앗을 늘려 자라게 하였고, 그 다음으로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자는 뜻에 해탈을 구하고 있기에 잠시 그 형상을 용납하더라도 용신이 보호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온갖 번뇌에 빠져서 몸으로 따뜻한 것만 이롭게 여기며 무명을 살피지 않고 명이 줄어듦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언어만 기억하여 스스로 궁극적인 것을 다 끝마쳤다 일컫는다면 세월이 다하여 물러갈 때 저 악도에 떨어질 것이니, 장부로서 용맹하고 예리한 자라면 어찌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공은 봉상의 괵읍에서 태어나 옹주의 호현 백운산의 정거선원에서 출가하였다.」

대중상부 2년 4월 8일에 글을 쓰다.

【1】谷隱山.石門寺.蘊禪師, 嗣首山念禪師. 住石門日, 太守以私意笞辱, 旣歸衆迎於道側, 首座問訊曰: 「太守無辜屈辱和尙如此.」 師以手指地云: 「平地起骨堆.」 隨指湧一土堆, 太守聞之, 令人削去, 復湧如初. 其後, 太守全家死於襄州. 宋査道爲待制, 每食必盡一膳, 常曰: 「福當如是惜.」

【2】石地不平.

【3】宋.太宗年號.

【4】眞宗年號.

【5】《史》註: 兩家爲一間. 此言五間十一架, 未詳.

【6】五盖十纏, 皆煩惱名.

【7】春光, 謂之韶光, 取和暢之義. 言此韶光倏忽已盡, 報緣遷變謝落則當沒溺惡道也.

【8】眞宗年號.

【1】곡은산 석문사 온선사는 수산 염선사의 법을 이었다. 석문사에 머물러 있을 때 태수가 사사로운 뜻으로 태장을 가해 욕을 보였는데, 이윽고 돌아옴에 대중들이 길 옆으로 서서 맞아주며 수좌가 물어 가로되 「태수가 무고하게 스님을 이와 같이 굴욕케 하였습니다」 하므로 스님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평지에서 뼈무더기가 솟아오르리다」 하니 가리킨 곳에서 한 무더기의 흙이 솟아올랐다. 태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시켜 깎아 버리게 하였으나 다시 처음처럼 솟아올랐다. 그 후에 태수의 온 집안이 양주에서 죽었다. 송사도는 대제가 되어 매번 식사 때마다 반드시 반찬 한 가지를 남김없이 먹고는 항상 말하기를 「복록도 응당 이와 같이 아까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2】자갈 땅으로 평탄하지 않음이다.

【3】송나라 태종의 연호이다.

【4】진종의 연호이다.

【5】《사기》의 주석에 2家를 1間으로 한다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5간 11가는 무엇인지 상세하지 않다.

【6】5盖와 10纏으로 모두 번뇌의 이름이다.

【7】春光을 韶光이라 일컬은 것이니 화창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세월의 빛이 홀연히 다하여 과보의 인연이 옮겨지고 변하여 물러나게 되면 곧 응당 악도에 침몰하여 헤어나지 못함을 말한다.

【8】진종의 연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