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각범홍선사송승걸식서 覺範洪禪師送僧乞食序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7:13
 

 

각범홍선사송승걸식서 覺範洪禪師送僧乞食序[1]

 

曹溪.六祖, 初以居士服至黃梅, 夜舂以石墜腰;[2] 牛頭, 衆乏粮, 乞於丹陽, 自負米斛八斗, 行八十里, 朝去暮歸, 率以爲常; 隆化.惠滿, 所至, 破柴制履;[3] 百丈.涅槃, 開田說義.[4] 墜腰石, 尙留東山; 破柴斧, 猶存鄴鎭; 江陵之西, 有負米莊; 車輪之下, 有大義石. 衲子每以爲遊觀, 不可誣也. 世遠道喪, 而妄庸寒乞之徒, 入我法中, 其識尙不足以匡欲, 其可荷大法也? 方疊花制襪, 以副絲絇,[5] 其可夜舂乎? 纖羅剪袍, 以宜小袖, 其可破柴乎? 升九仞之峻, 僕夫汗血, 不肯出輿, 其可負米乎? 方大書其門云「當寺今止掛搭」,[6] 其肯開田說義乎? 余嘗痛心撫膺而嘆者也. 屢因弘法致禍, 卒爲廢人, 方幸生還,[7] 逃遁山谷, 而衲子猶以其嘗親事雲庵,[8] 故來相從, 余蓄之無義, 拒之不可, 卽閉關堅臥, 有扣其門而言者曰: 「雲庵法施如智覺,[9] 愛衆如雪峰,[10] 出其門者, 今皆不然, 道未尊而欲人之貴己, 名不曜而畏人之挨己, 下視禪者如百世之寃, 諂事權貴如累劫之親, 師皆笑蹈此汚而去, 庶幾雲庵爪牙矣.」 余於是, 蹶然而起曰: 「然則無食, 奈何?」 曰: 「當從淨檀行乞, 亦如來大師之遺則也. 老人肯出, 則庶使叢林知雲庵典型[11]尙存.」 余嘉其言, 因序古德事, 以慰其意, 當有賞音者耳.

조계 육조는 애초에 거사의 옷차림으로 황매에 이르러 밤중에 방아를 찧음에 돌을 허리에 매달았고, 우두는 대중들이 양식이 없어 곤궁해 하면 스스로 단양에서 구걸하여 직접 쌀 18말을 짊어지고 80리 길을 걸어 아침이면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기를 예삿일로 여겨 행하였고, 융화 혜만은 이르는 곳마다 장작을 패고 짚신을 삼았으며, 백장 열반은 밭을 개간하며 의리를 설하였다. 허리에 매달았던 돌은 아직도 동산에 남아 있고, 장작을 패던 도끼는 여전히 업진에 그대로 있으며, 강릉의 서쪽에 부미장이 있고, 거륜산의 아래에는 대의석이 있다. 납자들이 매번 만행 할 때 볼거리로 여겼으니 거짓될 수는 없다.

세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도가 쇠퇴하자 망령되고 용렬하며 곤궁하여 빌어먹는 무리들이 우리 법 가운데 들어오니 그들의 식견이 오히려 욕심을 바로 잡기에도 부족하거늘 그들이 어찌 크나큰 법을 짊어지겠는가. 바야흐로 꽃무늬 장식을 포개어 버선을 만들고 그것으로써 신발끈 장식을 북돋우는데 그러고도 밤중에 방아를 찧을 수 있겠는가? 가느다란 비단으로 장삼을 만듦에 편하고자 소매를 줄이는데 그러고도 장작을 팰 수 있겠는가? 아홉 길의 험준한 언덕을 오름에 노복들이 피땀을 흘려도 가마에서 내리려 들지 않는데 그러고도 쌀을 짊어질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그 문에 크게 써 놓기를 「당 사찰은 이제 방부를 중지합니다」라 하는데 그러고도 즐거이 밭을 갈며 진리를 설하려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마음이 아파 가슴을 어루만지며 한탄하던 바이다.

누차 불법을 홍보한 인연으로 화를 당하다 결국에 폐인이 되었다가 바야흐로 다행히 살아 돌아와 산 속 계곡으로 도망하여 은둔하였으나 납자들이 오히려 일찍이 운암선사를 친히 섬겼다 하여 짐짓 찾아와서 서로 붙좇으니 내가 그들을 길러 주는 것도 의롭지 못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기에 곧 문을 닫은 채 자리를 틀고 누워 있었는데, 그 문을 두드리며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운암은 법 베풀기를 흡사 지각선사와 같이 하였고 대중 사랑하기를 흡사 설봉선사와 같이 하였으나 그 문중에서 나온 자들은 지금에 모두 그렇지 않으니, 도는 아직 높지 않되 사람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길 바라고, 이름은 빛을 발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참선하는 자들을 멸시하기를 마치 백세의 원수 같이 하고, 권력과 부귀에 아첨하고 섬기기를 마치 누겁에 걸친 어버이 같이 하거늘, 선사께서 모두 웃으며 이러한 더러움을 뒤밟고 떠나가니 아마도 운암 문중의 가장 으뜸이 될 분일 것입니다」라 하므로 내 이에 궐연히 일어서며 말하기를 「그렇지만 먹을 음식이 없는데 어찌 하겠는가」 하니 이르기를 「응당 깨끗한 단월을 좇으며 걸식할 것이니, 이 또한 여래와 대사들께서 남기신 법도입니다. 노인께서 기꺼이 나오신다면 아마도 총림으로 하여금 운암의 법도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가상히 여기고 그 인연으로 고덕의 사실을 써서 그 뜻을 위로하니 응당 이 말을 즐겨 듣는 자가 있을 것이다.

【1】師初名惠洪, 後改名德洪, 字覺範. 瑞州.彭氏子, 嗣眞淨.克文和尙.

【2】墜與縋同.《說文以繩有所懸也.

【3】相州.隆化寺.惠滿禪師, 榮陽.張氏子, 常行乞食, 住無再宿, 所至伽藍, 析薪制履焉.

【4】百丈山.涅槃.法正和尙, 常《涅槃經, 時呼涅槃和尙也. 一日謂衆曰: 「汝等與我開田, 我與汝證大義.」

【5《禮云: 「繩履, 無絇.」 絇, 履頭繩, 履飾也. 副, 佐也.

【6】搭‧附也, 又掛也.

【7】師初住江寧.淸凉寺, 坐爲狂僧誣告抵罪. 張丞相當國, 復度爲僧, 易名德洪. 後住黃龍山, 會, 丞相去位, 復竄師南海島上, 三年遇赦.

【8】眞淨克文和尙.

【9】求明寺.智覺.延壽禪師.

【10】雪峰.義存禪師.

【11】法度也.

【1】선사는 애초에 이름이 혜홍이었다가 후에 덕홍으로 고쳤으며 자는 각범이다. 서주 팽씨의 아들로서 진정 극문화상의 법을 이었다.

【2】墜는 縋와 같다.《설문에는 꼬아서 만든 줄로서 매어달린 것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3】상주 융화사의 혜만선사는 영양 장씨의 아들로서 항상 걸식을 행하였으며 머물렀던 곳에 거듭 묵지 않았다 하며, 도착하는 가람에서 마다 섶나무를 쪼개고 신을 삼았다고 한다.

【4】백장산 열반 법정화상은 항상《열반경을 외웠기에 당시에 열반화상이라 불려졌다. 하루는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와 함께 밭을 개간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大義를 증명해 보이리라」 하였다.

【5《예기에 이르기를 「노끈으로 엮은 신에는 絇가 없다」 하였으니, 絇는 신 머릿부분의 줄로서 신발의 장식이다. 副는 돕는다는 것이다.

【6】搭은 부착하다 또는 거는 것을 말한다.

【7】선사가 처음에 강녕 청량사에 머무르다 미친 승려의 무고에 연루되어 죄를 받았다. 장승상이 국정을 맡자 다시 득도하여 승려가 되어 이름을 덕홍이라 고쳤다. 후에 황룡산에 머무를 때 마침 승상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선사를 다시 남해의 섬으로 귀양을 보냈었는데 3년만에 사면을 받았다.

【8】진정 극문화상.

【9】구명사 지각 연수선사.

【10】설봉 의존선사.

【11】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