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우가녕승록삼교총론 右街寧僧錄三敎總論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20:46
 

 

 

우가녕승록삼교총론 右街寧僧錄三敎總論[1]

 

問曰: 「略僧史,[2] 求事端,[3] 其故何也?」 答曰: 「欲中興佛道, 令正法久住也.」[4] 曰: 「方今天子重佛道, 崇玄門, 行儒術, 致太平, 已中興矣. 一介比丘, 力輪何轉而言中興佛道耶?」 答曰: 「更欲助其中興耳. 苟釋氏子不知法, 不修行, 不勤學科,[5] 不明本起,[6] 豈能副帝王之興乎?」 或曰: 「子有何力, 令正法久住乎?」 答曰: 「佛言, 知法知摩夷,[7] 護持攝受,[8] 可令法不斷也.」 又曰: 「諸師已廣著述, 何待子之爲耶?」 答曰: 「古人著述, 用則闕如, 曾不知三敎循環, 終而復始, 一人在上, 高而不危.[9] 有一人故, 奉三敎之興, 有三敎故, 助一人之理. 且夫! 儒也者, 三王以降則宣用而合宜; 道也者, 五帝之前則冥符於不宰.[10] 昔者, 馬《史》躋道,[11] 在九流之上,[12]班《書》拔儒, 冠藝文之初.[13]子長欲返其朴而還其淳, 尙帝道也; 孟堅思本其仁而祖其義, 行王道焉. 自夏‧商‧周至于今, 凡幾百千齡矣, 若用黃‧老而治, 則急病服其緩藥矣. 由此, 仁義薄, 禮刑生, 越其禮而逾其刑則儒氏拱手矣. 釋氏之門, 周其施用, 以慈悲變暴惡, 以喜捨變慳貪, 以平等變冤親, 以忍辱變瞋恚, 知人死而神明不滅, 知趣到而受業還生, 賞之以天堂, 罰之以地獄, 如範脫土, 若模鑄金. 邪範漏模寫[14]物, 定成其寢陋, 好模嘉範傳形, 必告其端嚴, 事匪口談, 人皆目擊. 是以, 帝王奉信, 群下歸心, 草上之風,[15] 翕然[16]而偃. 而能旁憑老氏, 兼假儒家, 成智猶待於三愚,[17] 爲邦合遵於衆聖. 成天下之亹亹,[18] 復[19]終日之乾乾,[20] 之於御物也, 如臂使手, 如手運指, 或擒或縱, 何往不臧邪?[21] 夫如是則三敎是一家之物,[22] 萬乘是一家之君, 視家不宜偏愛. 偏愛則競生, 競生則損敎, 己在其內, 自然不安, 及己不安則毁損其敎, 不欲損敎則莫若無偏. 三敎旣和故法得久住也.[23] 且如秦.始焚坑儒術,[24] 事出李斯; 後魏[25]誅戮沙門, 職由寇謙之‧崔浩; 周.武廢佛道二敎, 矜衒己之聰明, 盖朝無正人; 唐.武宗毁除寺像, 道士趙歸眞率劉玄靖同力謗誣,[26]李朱崖影助[27]; 此四君諸公之報驗, 何太速乎![28] 奉勸吾曺, 相警互防, 勿罹愆失. 帝王不容, 法從何立? 况道學????守寶, 不爲天下先????,[29] 沙門何妨饒禮而和之? 當合佛言, 一切恭信, 信于老君, 先聖也, 信于孔子, 先師也. 非此二聖, 曷能顯揚釋敎, 相與齊行, 致君於羲‧黃之上乎? 苟咈[30]斯言, 譬無賴子弟, 無端鬪競, 累其父母, 破産遭刑. 然則, 損三敎之大猷, 乃一時之小失,[31] 日月食過, 何損於明?[32] 君不見? 秦焚百家之書, 聖人預已藏諸屋壁,[33] 坑之令剿絶, 楊‧馬‧二戴[34]相次而生, 何曾無噍類耶?[35]梁.武捨道,[36]後魏勃興; 拓跋誅僧,[37] 子孫重振;[38]後周毁二敎, 隋.堅復之;[39]武宗陷釋門, 去未旋踵, 宣宗十倍興之,[40] 側掌, 豈能截河‧漢之流? 張拳, 不可暴虎兕之猛.[41] 况爲僧莫若道安, 安與習鑿齒交遊, 崇儒也; 爲僧莫若慧遠, 遠送陸修靜, 過虎溪, 重道也. 余慕二高僧, 好儒重道, 釋子猶或非之, 我旣重他, 他豈輕我? 請信安‧遠行事, 其可法也.《詩》曰: ????伐柯伐柯, 其則不遠.???? 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斯之謂歟.」

물어 이르되 「승려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거늘 [거듭하여] 일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불도를 중흥시켜 정법을 오래 머무르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하기에 이르기를 「바야흐로 지금의 천자께서 불도를 중시하고 도교를 숭상하며 유학을 시행하여 태평성대에 이르렀으니 이미 중흥을 이루었다 하겠거늘 일개 비구가 역량이 얼마나 미칠 수 있겠기에 불도를 중흥시키겠다고 말하는가?」 하므로 답하여 이르기를 「거듭 그 중흥을 돕고자 할뿐입니다. 만일 석씨의 아들로써 법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지 않으며 과목의 학문에 힘쓰지 않고 근본되는 기원을 밝히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제왕의 중흥에 부응하겠습니까?」 하였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그대는 무슨 힘이 있어 정법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겠는가?」 하니 답하여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법을 알고 논장論藏을 알아서 보호하여 가지고 거두어들인다면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모든 선사들이 이미 널리 저술하였거늘 하필 그대가 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므로 답하여 말하였다.

「옛사람들의 저술은 활용하기에 좀 미흡한 듯 하였으니, 세 가르침이 순환하여 마쳤다가 다시 시작하며 한 분이 윗자리에 있음에 높아도 위태롭지 않음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분이 있는 까닭에 세 가르침이 흥성하게 되고, 세 가르침이 있는 까닭에 한 분의 다스림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무릇 유교는 삼왕 이래로 베풀어 씀에 이치에 합당하였으며, 도교는 오제 이전에 곧 무위無爲의 도에 가만히 부합하였습니다. 옛적에 사마천의《사기》에서는 도道를 올려놓아 아홉 부류의 위에 두었고, 반고의《한서》에서는 유교를 끌어올려 예문지의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자장은 그 질박한 데로 돌이키고 그 순박한 데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니 황제의 도를 숭상함이요, 맹견은 그 어짊을 근본으로 하고 그 의리를 본받을 것을 생각하였으니 왕도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라와 상나라와 주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수 백천년이기에 만약 황제와 노자의 도를 사용하여 치료한다면 곧 급한 병에 더딘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의가 엷어지고 예절과 형벌이 생겼으니 그 예절을 넘어서고 그 형벌을 건너뛰면 곧 유씨儒氏는 팔짱을 끼고 있을 것입니다.

석씨의 문중은 베풀어 쓰기를 두루하여 자비로써 포악함을 변화시키고, 희사함으로써 아끼고 탐냄을 변화시키고, 평등으로써 원수와 친함을 변화시키고, 인욕으로써 성냄을 변화시키며, 사람은 죽더라도 신명은 멸하지 않음을 알고 또한 응당의 사후세계에 도달하더라도 업을 받아 환생함을 알아서 천당으로써 상을 주고 지옥으로써 처벌함은 마치 흙을 떨어버린 거푸집과 같고 쇠를 부어 만든 모형과 같습니다. 삐뚠 거푸집과 새는 모형에 물건을 쏟아 부으면 반드시 볼품없는 모양을 이루고 좋은 모형과 훌륭한 거푸집으로 형상을 전하면 반드시 그 단정하고 엄밀함을 이루게 될 것이니, 이러한 일은 입으로만 얘기하는 바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목격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왕이 받들어 믿고 많은 신하들이 마음으로 귀의함이 마치 풀 위로 바람이 불자 나란히 한쪽으로 쏠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곁으로 노씨의 말씀에 능히 기대고 겸하여 유가의 말씀에도 의지한다면 지혜를 이룸에 있어서 마치 세 사람의 어리석은 이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해서는 여러 성현들을 함께 좇아야 합니다.

온 천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풍토를 이루고 종일토록 쉬지않고 나아가는 풍토를 회복하면 만백성을 제어함에 있어 마치 팔이 손을 부리듯 하고 마치 손이 손가락을 움직이듯 하며 혹은 사로잡았다가 혹은 풀어 주었다가 하니 어디에 간들 좋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으면 곧 세 가지 가르침은 바로 한 집안의 물건이요 만승은 바로 한 집안의 주인이 되니 집안을 돌볼 때는 마땅히 편애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편애하면 곧 경쟁이 생겨나고 경쟁이 생겨나면 곧 가르침을 훼손할 것이므로 자신이 그 안에 있으면 자연히 불안할 것이요 자신이 불안하게 되면 곧 그 가르침을 훼손하게 될 것이니, 가르침을 훼손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곧 편애함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세 가르침이 화합하고서야 그로 인해 법이 오래도록 머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나라 시황제가 유교의 경전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땅에 묻은 것은 그 일이 이사로부터 나왔고, 후위 때 사문들을 참살시킨 것은 그 주장이 구겸지와 최호에게서 말미암았으며, 후주의 무왕이 불교와 도교의 두 가르침을 폐하고 자신의 총명을 자랑함에 힘쓴 것은 대개 조정에 바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당나라 무종이 사찰과 불상을 훼손시켜 없앤 것은 도사 조귀진이 유현정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불법을 비방하고 사문을 무고함에 이주애가 암암리에 도왔으니, 이 네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과보로 받은 영험이 어찌 그리 신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무리에게 받들어 권하오니 서로 경책하고 서로 막아주어 허물이나 과실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왕이 용납하지 않으면 법이 어디를 좇아 세워지겠습니까. 하물며 도교의 학문은 ????보배를 지킴에 천하의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예절을 넉넉히 하고 화합해 나아감이 사문에게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일체를 공경하여 믿어라 하신 말씀에 마땅히 부합하여 노자를 믿는 것은 앞선 성인이기 때문이며 공자를 믿는 것은 앞선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성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석가의 가르침을 드러내어 선양하고 서로 더불어 나란히 행함으로써 임금님을 복희씨와 황제씨의 위에 놓이게 하였겠습니까. 만일 이 말을 어기면 비유컨대, 무뢰한 자제들이 까닭 없이 겨루어 다투다가 그 부모에게 누를 끼치고 가산을 탕진한 뒤 형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 가지 가르침의 큰 도를 훼손하는 것은 곧 일시적인 작은 과실로서 일식이나 월식 같기에 어찌 밝음을 잃어버리기야 하겠습니까?

그대는 보지 못하였습니까? 진나라 때 백가의 서적을 불태웠지만 성인께서 미리 집의 벽 속에 갈무리하여 두었고, 유생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전멸케 하였으나 양웅과 사마천 및 두 대씨가 서로 연이어 태어나니 어찌 일찍이 살아남은 자가 없었겠습니까. 양 무제가 도교를 버리자 후위가 발흥하였으며, 탁발씨가 승려를 주살하거늘 그 자손이 거듭하여 [불교를] 진흥시켰고, 후주에서 두 교를 훼멸시키자 수나라 양견이 이를 부활시켰으며, 무종武宗이 석가 문중을 무너뜨리거늘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선종宣宗이 열 배로 이를 부흥시켰으니, 손바닥을 기울여 어찌 능히 하수河水와 한수漢水의 흐름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주먹을 내질러 호랑이나 코뿔소의 사나움을 말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승려로서 도안 만한 이가 없으나 도안이 습착치와 더불어 교류한 것은 유교를 숭상한 것이요, 승려로서 혜원 만한 이가 없으나 혜원이 육수정을 전송할 때 호계를 지나쳤으니 이는 도교를 중시한 까닭입니다. 내가 두 고승을 사모하며 유교를 좋아하고 도교를 중시하니 석가의 자손들이 오히려 혹 그르다 하겠지만, 내가 이미 다른 이들을 중시하는데 다른 이들이 어찌 나를 경시하겠습니까. 청하건대 도안과 혜원이 행한 일을 믿어 그것을 본받으십시오.《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베니 그 법다움이 멀리 있지 않도다???? 하였으며,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의 운명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들의 화합만 못하다???? 하였으니 이를 말함일 것입니다.」

【1】眞宗.咸平元年, 奉詔入職右街僧錄, 尋遷左街.

【2】《僧史略》自序云: 「以太平興國初, 勅居東寺, 披覽多暇, 遂樹立門題, 搜求事類, 始于佛生, 敎法流衍, 至于三寶住持, 諸務事始, 一皆檃栝, 約成三卷, 盖取裵子野《宋略》爲目耳.」

【3】旣略其僧史, 又何能求事故之多端而總論三敎乎?

【4】《祖庭》云: 「非我失之, 自我復之爲中興, 如王中否而再興, 周之宣王‧漢之光武是也. 吾道東漸, 經三武破壞, 有德業盛大之宗師綱領斯道, 佛法中興耳.」

【5】十科之學.

【6】佛法根本始起之因由也.

【7】《華嚴‧玄談》云: 「摩夷, 此云行母, 依論藏成行故, 是行之母.」 又《四分》云: 「知法, 知律, 知摩夷.」 知法者, 善持修多羅藏, 如阿難等; 知律者, 善持毘尼藏, 如優婆離等; 知摩夷者, 善於訓導, 宰任玄綱, 如迦葉等.

【8】憐憫濟溺曰攝, 存約眷想曰受.

【9】若三敎幷行不悖, 則雖一人居高而奈何其殆哉坂乎? 坂, 危也.

【10】《老子》曰: 「長而不宰, 是謂玄德.」 註: 宰, 主也. 長養萬物而不作主也. 五帝之前, 帝王皆以無爲自然之道, 以治天下.

【11】司馬遷, 字子長, 作《史記列傳》.《詩》云「君子攸躋」, 躋, 言登也.

【12】九流者: 一, 儒流, 祖述堯‧舜, 憲章文‧武, 宗仰仲尼者也; 二, 道流, 淸虛自守, 卑弱自持, 此人君南面之述, 合堯之克讓․《易》之謙謙者; 三, 陰陽流, 敬順昊天曆象日月, 以授民時者也; 四, 法流, 信賞必罰, 以補禮制矣; 五, 名流, 名位不同, 禮亦異數, 正名列位, 以成事矣; 六, 墨流, 推兼愛之意, 養老惠施也; 七, 縱橫流, 言其當權受制, 宜受命而不受詞也; 八, 雜流, 兼儒‧墨, 合名‧法, 知國大體, 事無不貫矣; 九, 農流, 播百穀, 勸耗桑, 以足衣食也.

【13】班固, 字孟堅, 作《漢書‧藝文志》.

【14】傾也, 輪也.

【15】《論語》「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也. 草上之風, 必偃.」 註: 上, 與尙同, 加也.

【16】翕如鳥羽翼會聚也.

【17】古語, 三愚成一智.

【18】《易》云: 「成天下之亹亹.」 注云: 不倦之意也.

【19】返也.

【20】又云: 「君子終日乾乾.」 註: 天道自强不息貌.

【21】臧, 否也.《詩》「卜云其吉, 終焉永臧.」

【22】局喩.

【23】結答「子有何力, 令正法久住?」之問.

【24】術, 經術,《詩》․《書》也, 言焚術坑儒也.

【25】拓跋燾.

【26】謗法, 誣僧.

【27】如影從形而佐助也.

【28】崔浩信重寇謙之, 奉其道. 浩不喜佛, 言於魏主而廢之, 謙之先得惡疾而死, 浩繼以暴揚國惡被誅, 崔‧寇二家悉夷五族. 燾廢敎誅僧, 曇始入王宮門, 燾令斬之, 斫無所傷, 又餧檻虎, 虎伏不起. 燾悔過, 始爲說法, 明辨因果, 燾大生愧懼, 遂感癘疾, 以其過由於二人, 卽族兩家. 周.武性甚猜忌曰: 「儒‧道二敎, 此國奉遵, 佛敎後來, 朕欲不立.」 令道士張賓之與沙門知炫, 辨優劣, 賓之不勝, 遂兼道敎罷之, 旣已, 癘疾作, 尋卒. 其滅佛法受罪報, 見《冥報記》. 唐.武宗, 自幼不喜釋氏, 卽位, 召道士趙歸眞等, 於禁內受仙籙. 又召衡山道士劉玄靖, 爲光祿大夫, 充崇玄舘, 學士鄧元超等排毁釋氏, 帝遂廢除寺像, 未幾, 金丹發藥而殂. 諸道士等報驗, 具載別錄焉.

【29】老子有三寶: 一, 慈; 二, 儉; 三, 不爲天下先.

【30】戾也, 違也.

【31】雖暫被毁斥, 乃三敎之小失, 實爲損謗者之大害.《四十二章經》云: 「有人罵佛, 佛黙不對, 罵止, 問曰: ????子以禮從人, 其人不納, 禮歸子乎????? 對曰: ????歸矣.???? 佛言: ????今子罵我, 我今不納, 子自持禍, 歸子身矣.????」

【32】《語》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33】《書‧序》云: 「魯公.王餘, 景帝子也. 好治宮室, 壞孔子舊宅, 以廣其居, 壁中得經書. 孔子十三代孫襄, 好經書博學, 畏秦法峻急, 乃壁藏《家語》․《孝經》․《尙書》․《論語》於孔子舊宅壁中, 餘壞宅, 得之, 悉歸于襄孫子國.」

【34】楊雄‧司馬遷, 戴德‧戴聖, 二戴, 世所稱大戴‧小戴也.

【35】《漢書》「襄城無噍類.」 言: 無復有活而噍食者. 音初, 嚙也.

【36】梁.武有捨道事佛詔也.

【37】拓跋, 後魏姓. 北人謂土爲「拓」, 謂辰爲「跋」, 魏之先出於黃帝, 以土德王, 故爲拓跋.

【38】燾癘作而卒, 孫文成帝.濬立, 重興釋敎.

【39】周.武以惡疾殂, 靜帝立, 楊堅修政十三月, 封爲隋國公, 卽復二敎.

【40】宣宗卽武宗叔也. 武宗忌憚之, 沈于宮厠, 宦者仇公武俾髡髮爲僧. 嘗參鹽官齊安, 安一日預誡知事曰: 「當有異人至此, 禁雜語, 止橫事, 恐累佛法.」 明日, 行脚數人來禮, 安令維那高位安置, 禮殊他等, 因語帝曰: 「時至矣, 無滯泥蟠.」 囑令佛法後事. 去爲江陵少尹, 武宗崩, 宰臣迎立之, 大興佛敎焉.

【41】子謂子路曰: 「暴虎馮河, 死而無悔.」 注: 徒搏曰暴, 徒涉曰馮, 如馮几然. 兕, 野牛, 靑色一角.

【1】진종 함평 원년에 조서를 받들고 들어가 우가승록을 지내다가 얼마지 않아 좌가승록으로 자리를 옮겼다.

【2】《승사략》의 自序에서 말하였다. 「태평흥국 초기에 칙서를 받들어 동사에 거처하며 책을 펼쳐 보는 등 여가가 많았기에 마침내 門題를 수립하고 일의 유형들을 찾아 구하였으니, 부처님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교법이 널리 퍼진 일과 삼보를 주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의 시말을 하나 같이 모두 정리하여 3권으로 묶었으며, 대개 배자야의《송략》에서 취한 것은 목차를 흉내낸 것뿐이다.」

【3】이미 그 僧史를 간략히 하였는데 또 어찌 사건들의 잡다한 단서를 구하여 세 가지 교법을 총괄적으로 논하려는 것인가?

【4】《조정》에서 말하였다. 「내가 잃은 것이 아니나 나로부터 그것이 회복되었으면 中興이라 하니, 마치 왕이 중간에는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발흥한 경우와 같은데, 주나라의 선왕과 한나라의 광무제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불도가 동쪽으로 점차 나아오다 三武의 파괴를 경력하였으나 덕업이 성대한 종사들이 있어서 이 도를 이끌었기에 불법이 중흥하였던 것이다.」

【5】十科의 學이다.

【6】불법이 근본적으로 비롯하여 일어난 유래이다.

【7】《화엄경》의 현담에 이르기를 「‘마이’는 이곳 말로 하면 行母인데 논장에 의지하여 行이 이뤄지는 까닭으로 곧 行을 낳게 하는 母인 것이다」라 하였다. 또《사분율》에 이르기를 「법도 알고 율도 알고 마이도 안다」 하였다. 법을 안다는 것은 經藏을 잘 지니는 것이니 아난 등과 같은 이요, 율을 안다는 것은 律藏을 잘 지니는 것이니 우바이 등과 같은 이요, 마이를 안다는 것은 교화에 뛰어나고 교리를 잘 다루는 것이니 가섭 등과 같은 이다.

【8】물에 빠진 이를 가엾이 여겨서 구제하는 것을 攝이라 하고, 염려하여 다독거리는 것을 受라 한다.

【9】만약 三敎가 나란히 행해지며 어긋나지 않으면 비록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자리하여 있더라도 그 위태로움이 어찌 위기이겠는가. 坂은 위기이다.

【10】《노자》에 이르기를 「만물을 양육하나 주재하지는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玄德이라 한다」 하고는 주석에, 宰는 주관함이라 하였으니 만물을 길러 양육하지만 주재하지는 않음을 말한다. 五帝 이전에는 제왕들이 모두 무위자연의 도리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11】사마천의 자는 자장으로《사기열전》을 지었다.《시경》이 이르기를 「군자가 아득히 올라」 하였으니 躋는 높은 곳에 오름을 말한다.

【12】아홉 부류란, 첫 번째가 유가로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본받아 서술하여 밝히고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 그 법을 밝히며 중니를 종조로써 숭앙하는 자들이다. 두 번째는 도가로서 맑고도 공허함을 스스로 지키고 낮고도 연약함을 스스로 유지하니, 이는 人君南面의 언설로써 요임금의 克讓(자기의 마음을 눌러 남에게 겸양함)과《주역》에서의 謙謙(남에게 겸양하는 象)을 합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음양가로서 일월성숙의 천문이치에 삼가 순종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알맞은 시기를 주는 자들이다. 네 번째는 법가로서 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주고 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줌으로써 예법과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명가로서 이름과 지위가 같지 않고 예법도 또한 數理가 다르니 名位를 바르게 나열함으로써 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묵가로서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뜻을 추앙하여 敬老와 布施를 행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종횡가로서 當權受制하여 마땅히 命은 받고 詞는 받지 않음을 말한다. 여덟 번째는 잡가로서 유가와 묵가를 겸하고 명가와 법가를 합하였으니 나라의 큰 가닥만 안다면 다스림에 있어 꿰뚫지 않음이 없다. 아홉 번째는 농가로서 모든 곡식을 기르며 밭 갈고 뽕 치는 것을 권하여 먹거리와 입거리를 풍족하게 하는 것이다.

【13】반고의 자는 맹견으로《한서‧예문지》를 지었다.

【14】기울이다 또는 회전시킴이다.

【15】《논어》에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에 바람이 가해지면 반드시 쓰러진다」 하고는 주석에, 上은 尙과 같은데 가해짐(加)이라 하였다.

【16】翕은 새의 날개 깃이 모여 무리를 이룬 것과 같다.

【17】옛말에 어리석은 자 셋이 지혜로운 이 하나를 이긴다 하였다.

【18】《주역》에 이르기 「하늘 아래 부지런히 힘씀을 이룬다」 하고는 주석에, 게으르지 않다는 뜻이라 하였다.

【19】돌이킴이다.

【20】또 이르기를 「군자는 종일토록 쉼이 없다」 하고는 주석에, 하늘의 도가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 모습이라 하였다.

【21】臧은 아니라는 것이다.《시경》에 「점술로는 길함을 말하지만 결국에는 영원히 그렇지 않다」라 하였다.

【22】부분적인 비유이다.

【23】「그대는 무슨 힘이 있어 정법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겠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답한 것이다.

【24】術은 經學으로《시경》이나《서경》이니,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매장함을 말한다.

【25】탁발도이다.

【26】불법을 비방하고 사문을 무고함이다.

【27】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좇는 듯이 보좌하여 도움이다.

【28】최호는 구겸지를 믿고 중히 여겨 그의 도를 받들었다. 최호는 부처님을 좋아하지 않아 위나라 군주에게 말하여 폐지하게 하였는데, 구겸지가 먼저 악질을 얻어 죽고 연이어 최호는 나라의 나쁜 점을 폭로하였다가 주살 당하였으니, 최호와 구겸지의 두 집안은 5족이 모두 멸족 당했다. 탁발도는 교학을 폐지하고 승려들을 주살하였는데 승려 담시가 왕궁의 문안으로 들어오자 탁발도가 영을 내려 그의 목을 치게 하였으나 베어도 상처가 나지 않았으며 또 우리 속의 호랑이에게 먹이게 하였더니 호랑이가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탁발도가 죄과를 후회함에 담시가 그를 위해 설법하고 인과를 분명하게 분별하여 주었더니 탁발도가 크게 부끄러움과 두려운 마음을 내었으며 마침내 문둥병에 걸렸는데, 그 허물이 두 사람에게서 비롯하였다 하여 곧 두 집안을 멸족시켰다. 주나라 무왕은 성격에 투기가 심하여 말하기를 「유교와 도교는 이 나라에서 받들고 따르던 것이요 불교는 뒤에 전래된 것이므로 짐은 불교를 세우지 않고자 한다」 하고는 도사 장빈지에게 명하여 사문 지현과 우열을 가리게 하였더니 장빈지가 승리하지 못하자 마침내 도교도 함께 혁파시켰는데, 그러자 문둥병이 발병하여 얼마지 않아 죽었다. 부처님의 법을 멸하고 받은 그러한 죄과는《명보기》에 보인다. 당나라 현종은 어려서부터 부처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즉위해서는 도사 조귀진 등을 불러 궁궐 안에서 仙籙을 받았다. 또 형산도사 유현정을 불러들여 광록대부로 삼아 숭현관에 보직하게 하였고, 학사 등원초 등은 부처님을 배척하고 훼멸하였으며, 황제는 마침내 사찰을 폐지하고 불상을 없애더니 얼마지 않아 금단에서 독약의 기운이 배어나와 죽었다. 여러 도사 등이 징험을 당한 것은 별도의 기록에 상세히 기재하였다고 한다.

【29】노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하였으니, 첫 번째가 자비요 두 번째가 검약이요 세 번째가 천하에 앞서지 않음이다.

【30】어그러짐이요 어긋남이다.

【31】비록 잠시 훼멸과 배척을 당했음에 三敎에 있어서는 작은 손실이었지만 훼방하던 자들은 실로 커다란 해악을 입게 되었다.《사십이장경》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욕하자 부처님은 묵묵히 대꾸하지 않았는데 욕이 그치자 물어 가로되 ????그대가 예의로써 다른 사람을 따르는데 그 사람이 그 예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禮가 그대에게 돌아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돌아가나이다???? 하기에 부처님께서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나를 욕하였는데 내가 이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대는 스스로 재앙을 지닌 채 그대의 몸으로 돌아가리다???? 했다」고 하였다.

【32】《논어》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기에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게 되고 고쳐지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숭앙하게 된다.」

【33】《서경》의 서문에서 말하였다. 「노공 왕여는 경제의 아들인데 궁실을 건축하기 좋아하여 공자의 옛 저택을 허물어 그의 거처를 넓히다가 벽에서 경서를 발견하였다. 공자의 13대손인 공양이 경서를 좋아하여 박학하였는데 진나라의 법이 준엄함을 두려워하여 공자의 옛 저택 벽 속에《공자가어》《효경》《상서》《논어》등을 숨겨 두었음에 왕여가 집을 허물다 그것들을 얻어서는 모두 공양 자손의 나라에 돌려보냈다.」

【34】양웅과 사마천은 대덕과 대성의 二戴로서 세상에서는 大戴와 小戴라 일컫는다.

【35】《한서》에 「양성에는 噍類가 없다」 하였는데, 다시 살아 있어 음식을 먹을 자가 없음을 말한다. 음은 초(初)이며 ‘깨물다’이다.

【36】양나라 무제 때 도교를 버리고 불교를 섬기는 조서가 있었다.

【37】‘탁발’은 후위 왕족의 성씨다. 북방 사람들은 땅을 일컬어 ‘탁’이라 하고 별을 일컬어 ‘발’이라 하는데, 위나라의 선조는 黃帝로부터 나왔기에 土德으로 왕이 되었다 하여 ‘탁발’이라 한 것이다.

【38】탁발도는 문둥병이 발병하여 죽자 손자 문성제 탁발예가 즉위하여 불교를 중흥시켰다.

【39】주나라 무왕이 악질로 죽고 정제가 즉위하자 양견이 정치에 참여한지 13개월만에 수국공에 책봉되어 즉각 도교와 불교를 회복시켰다.

【40】선종은 곧 무종의 숙부이다. 무종이 그를 꺼렸는데 궁실의 뒷간에 빠져 있던 것을 환관 구공무가 머리를 깎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일찍이 鹽官 제안과 함께 하였었는데, 제안이 하루는 지사에게 미리 경계시켜 이르기를 「어떤 異人이 여기에 도착하면 잡다한 말을 금하고 제멋대로 대하지 말라. 불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다음 날 행각승 몇 사람이 예방하거늘 제안이 위나를 시켜 높은 자리로 모시게 하고 그 예우가 다른 이들과는 달랐으며, 그런 인연으로 帝에게 말하기를 「시기가 올 것이오니 진흙 속에서 몸을 서리고 계시는 것이 그리 지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며 불법에 관한 뒷일을 부탁하였었다. 얼마 후 강릉소윤이 되었는데 무종이 죽자 재상과 신하들이 그를 맞아들여 즉위시키니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41】공자께서 자로에게 이르기를 「맨손으로 호랑이를 쳐죽이고 걸어서 황하를 건넘에 죽어도 후회가 없다 하였는데…」라 하고는 그 주석에, 맨손으로 때리는 것을 暴이라 하고 걸어서 건너는 것을 馮이라 하였으니 마치 안석에 의지함과 같이 그렇게 함이다. 兕는 야생소로서 푸른색에 뿔이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