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禪風)

覺性(각성)과 三玄(삼현)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09:32
 

 

 

覺性(각성)과 三玄(삼현)


한 波濤(파도)의 金鳥(금조)라 名(명)하며

夜半三更(야반삼경)에 金龜子(금구자)의 金箔(금박)을 벗겨내니 明(명)이라 名(명)한다


名(명)을 세우노라

知解(지해)와 智慧(지혜)가 몰록 끊어져 앎이 없으므로 昧(매)라 名(명)하고,

그 性(성)의 體(체)가 微妙(미묘)하고 玄妙(현묘)하고 희안하고 異常(이상)하여 玄(현)이라 名(명)하며, 貪瞋痴(탐진치)가 탈락되어 無明(무명)을 벗어 마치 夜半三更(야반삼경)에

金龜子(금구자)의 金箔(금박)을 벗겨내니 明(명)이라 名(명)한다.

昧(매)에 들어 玄(현)이고,

그 體(체)가 虛空(허공)을 비추는 것을 氣(기)라 하며,

그 體(체)의 밝음을 스스로 뿌리므로 明(명)이 된다.

그 體(체)의 밝음을 紫金光(자금광)이라고 하며,

眞墨光(진묵광)이라고 하며,

寂寂(적적)함 속에 惺惺(성성)히 潛(잠)기므로 大寂光(대적광)이라고 하며,

無量光(무량광)이라고 名(명)한다.

생각 생각길이 끊어진 無念處(무념처)라서 昧(매) 中(중)의 昧(매)이고,

이름하여 三昧(삼매)라 하며,

제대로 된 昧(매)이라서 正昧(정매)라 名(명)한다.

하고자 하는 바 없이 나투어 쓰고,

되돌아 없는 듯이 갖추어 있는지라 藏(장)이라고 하며,

쓰러져 자취는 沒(몰)하였으나 中天(중천)에 높이 떴으므로 涅槃(열반)이라고 名(명)하며,

六根(육근)을 통하여 풀어쓰되 一泉(일천)에서 솟는지라 묶어 한다발이므로 總持(총지)라 名(명)한다.

體中覺(체중각)과 口中覺(구중각)을 거쳐 玄(현) 中(중)의 玄(현)에 들었으므로 正玄(정현)이라고 하며, 明(명) 중의 明(명)이므로 正明(정명)이라고 하며, 暗(암) 중의 暗(암)이므로 正暗(정암)이라고 하며, 天(천) 중의 天(천)이므로 正天(정천)이라고 名(명)한다.

무언가 보았다고 할만하니 見(견)자란 文字(문자)를 빌어 見性(견성)이라고 하며,

무언가 따로이 있으나 문자로 그 莊嚴寂寂(장엄적적)함을 도저히 말할 수 없어 그냥 한 물건이다.

自證(자증) 自證(자증) 自證(자증)하여 볼 수가 있고,

明明白白(명명백백) 확실히 볼 수가 있어, 있다고 名(명)한다.

올라가는 곳은 다르나 내려오는 곳은 다 같으니 한 波濤(파도)의 金鳥(금조)라 名(명)하며,

命(명)을 놓을 곳을 보아둔 것 밖에 없고 그냥 동전 한닢이다.

如法(여법)이란 그 眞如性(진여성)이 虛空(허공)을 비추어 두루 섞이니 虛空(허공)과 一體(일체)이고, 不二(불이)라고 하며,

되돌아 法土(법토)에 사무치고 潛(잠)겨있어,

法身(법신)과 法土(법토)가 同穴(동혈)이라고 말한다.

萬像(만상)이 無常(무상)하여 滅(멸)한다고 하나,

滅(멸)하는 그대로가 眞如(진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法界(법계)가 常住(상주)하여 生(생)하는 바가 없다고 하나 生(생)하는 그대로가 眞如(진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空(공)은 空(공)대로 眞如(진여)이며, 色(색)은 色(색)대로 眞如(진여)이다.

도시 眞如(진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이것은 이것대로 眞如(진여)이고 저것은 저것대로 眞如(진여)이다.

두루 圓滿(원만)하고, 圓融(원융)하며, 圓通(원통)하여, 한통속이라서 圓覺(원각)이라고 名(명)한다.

앞생각이 없어지고 沒(몰)하여 痕迹(흔적)이 없어 空(공)이라고 하며 無(무)라고 말한다.

다음 생각이 生(생)하여 없다 할 수 없어 有(유)라고 하며 非空(비공)이라 名(명)한다.

대나무 마디마디에 是非(시비)라서, 開天(개천)에 王陵(왕릉)이라고 말한다.

念(염)하여 걸리고, 걷어 부칠 것 없이 그대로 眞如(진여)라서 無爲(무위)이고,

변하고 변하여 한없이 변하여도 無作爲(무작위)이므로 眞如(진여)이다.

念(염)하여 걸리면 걸리는 대로 眞如(진여)이고, 걸리지 않아도 眞如(진여)이다.

걸리는 當處(당처)가 비어서 空(공)이라고 하며, 五蘊(오온)이 탈락하여 空(공)이라 名(명)한다.

一切(일체)에 두루하고 常時(상시)에 應(응)함이 虛空性(허공성)과 같아서 虛空(허공)과 一體(일체)라 名(명)한다.

되돌아 色(색)에 사무치고 섞여 있어 目下絶壁(목하절벽)이라고 말하며,

色身(색신)에 사무치고 虛空(허공)에 섞인 玄妙(현묘)함을 끌어 모으면 理(이)라고 하여 氣(기)와 分別(분별)하니 理氣二元(이기이원)이라고 말하며,

그 玄妙(현묘)함이 色身(색신)과 虛空(허공)에 풀어지는 것을 氣(기)라고 하며,

두루 섞여 비빔되어 호로병 속이라, 理一元(이일원)이라 한다.

다 한통속 안의 놀음인지라 一太極(일태극)이고 圓覺(원각)이라 名(명)한다.


▶ 묻되, 當世(당세)에 공부하는 學人(학인)이 方便(방편)을 취하되 禪門(선문) 敎門(교문)이 혼돈되고 비록 禪門(선문)에 든다 하지만 文字(문자)나 書冊(서책)을 耽讀(탐독)치 않음이 없고,

印刷(인쇄)가 발달하여 祖師語錄(조사어록)이나 經(경)을 쉬이 얻어볼 수 있어 믿는 바가 깊은지라 묻습니다만,

禪門(선문)의 經截(경절)에 기히 바로 꺾어 얻어 듦이라면 바로 入玄(입현)이지 어찌하여 다시 三玄(삼현)이 생겼더란 말입니까?


▷ 답하되, 비록 看話(간화)하여 바로 꺾어 든다 하지만 覺(각)에서 覺(각)으로의 經路(경로)가 있고,

그 도중에 학인이 旣存(기존)한 知識(지식)과 새로운 智慧(지혜)에 스스로 속아 自家撞着(자가당착)함으로 인하여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하여 經截(경절)과 祖意(조의)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三玄(삼현)이 주장되는 것입니다.

體中玄(체중현)이라 하는 것은, 禪門(선문)에 들어 話頭(화두)를 看(간)하다 일어나면 그것을 自證(자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초기 단계로서 그 당시에는 학인이 스스로 얼핏 覺(각)이라고 주장하나,

覺(각)이라 말하면서도 무언가 걷어 잡을 것이 없어, 멍하니 더욱더 무언가 있음만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학인이 그것으로서 究竟(구경)을 삼지 않는다면 話頭(화두)를 바꾸든지 하여 疑情(의정)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大乘了意(대승요의)를 많이 들은 사람이나, 多讀(다독)하여 식견이 높은 사람은 이미 看話(간화)하기 前(전)에 道像(도상)이 가슴에 자리잡혀 있으므로 인해 반드시 그 곳에 撞着(당착)하게 되는 바,

三玄門(삼현문)에선 이것을 일러 初玄(초현)에 들어 東木(동목) 西木(서목)에 깃대를 꽂는다

하는 것입니다.

또는 覺(각)을 했다면서도 아는 바는 없고 조급한 마음과 我慢(아만)만 남아 文字(문자)나 書冊(서책)에 의지하여 스스로 契合(계합)하고 合理化(합리화)함으로써,

經截(경절)과 初發心(초발심)을 잊어버리게 됨으로 인하여 病(병)을 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혹은 智慧(지혜)나 知識(지식)의 深淺(심천)에 따라서 病(병)의 깊고 옅음도 다르고, 다시 말해 初玄(초현)이라도 覺(각)의 깊고 옅음이 다르다는 말이며 明明草草(명명초초)가 곤두박질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一般(일반)이나 혹은 門中(문중)에서도 參究(참구)의 趣旨(취지)도 모르고, 생각이 예민하고 汨沒(골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倉卒間(창졸간)에 體玄(체현)에 들게 되면 根機(근기)가 약한 사람은 스스로에 휘둘리고 소위 마구니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상근기인 사람은 쉬이 본래로 돌아오나 하근기인 사람은 본래로 돌아오기도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空我(공아)나 刹那(찰라)의 눈끝에 휘둘렸기 때문이며, 幻土(환토)에 뿌리박고 幻木(환목)으로 幻佛(환불)을 치기 때문입니다.

句中玄(구중현)이란 이러한 알게 모르게 初玄(초현)을 거친 사람이 公案(공안) 즉 話頭(화두)를 打破(타파)하는 것을 말함인데 初玄(초현)이 公案上(공안상) 답안을 얻는 각이라면,

즉 撞着(당착)하는 覺(각)이라면, 二玄(이현)은 얻는 쪽보다는 버리는 쪽이 강한 覺(각)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佛祖(불조)가 미움받고 一葉片舟(일엽편주)로 돌아옴으로 인해 白尺竿頭(백척간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句玄(구현)에 든 學人(학인)이 覺(각)으로 인한 그 境界(경계)를 고집하고, 理(이)와 事(사)에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病(병)을 삼는지라, 第二玄(제이현)을 두게 된 듯이 보이나, 其實(기실)은 浮雲(부운)이 空天(공천)을 의지하여 口中一色(구중일색)하는 病(병)을 破(파)하기 위함이며, 心地(심지)로 나아가다 心地(심지)에 入住(입주)함이 없이 東木(동목) 西木(서목)의 깃대를 꺾어버리는 것을 破(파)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祖師禪(조사선)과 如來禪(여래선)이 생겨났으며, 如來禪(여래선)이란 한 구덩이에 몸을 묻고 斷截(단절)과 回天(회천)을 말하나,

실상은 前名後名(전명후명)에 撞着(당착)하여 虛空性(허공성)과 覺性(각성)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며,

祖師禪(조사선)이란 心地(심지)에 입주하는 것을 目的(목적)으로 하며 別有(별유) 獨露(독로)하여 같으나 斷截(단절)된 빈깡통 속의 해바라기가 되는 것을 말함입니다.

이 句玄(구현)에도 知慧(지혜)와 知識(지식)의 深淺(심천)에 따라 覺(각)의 깊이가 여러 갈래이고 智慧(지혜)가 는다느니,

늘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들이 모두 初玄(초현)과 二玄(이현)을 破(파)하기 위하여 생긴 方便(방편)인 것입니다.

다시 三玄(삼현)을 두게 된 까닭은 黙然(묵연), 棒(봉), 喝(할)이라는 作用(작용)을 通(통)하여 句玄(구현)을 破(파)하고,

즉 生死(생사)를 超脫(초탈)하고 一然(일연)에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三(삼)․三(삼)에 安住(안주)하여 자신을 갖게 한 다음 正玄(정현)으로 나아가게 하는 놀음입니다.

허나 이것이 病(병)이 되는 것은 그대로 住着(주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혹은 이러한 작용을 받고 一然(일연)에 돌아오는 중에 正玄(정현)을 거치는 수도 있겠으나 차라리 黙(묵), 喝(할), 棒(봉)을 받지 않고, 文字(문자)나 書冊(서책)에 의지하지 않고, 經截(경절)을 택해 正玄(정현)으로 나아감이 可(가)합니다.

三玄(삼현)을 세운 바는 初玄(초현)과 二玄(이현)을 破(파)하고 一然(일연)으로 돌아오는 過程(과정)에 정현(正玄)을 거치게 함이며 非如(비여) 常如(상여)와 無關(무관)하게 玄中玄(현중현)에 들게 함입니다. 本分事(본분사)를 取(취)한 者(자)가 어찌 末後事(말후사)를 걱정하며 正玄(정현)을 거치지 않은 一然(일연)이 어찌 三玄(삼현)이 되겠으며 만약 開眼閉眼(개안폐안)없이 非非(비비)에 撞着(당착)하면 뼈대없는 達磨(달마)가 될 것입니다.

刹那(찰나)는 大病中(대병중)의 喜色(희색)일 뿐이로다.


▶ 묻되, 參究者(참구자)가 어찌 初發心(초발심)을 바꿔 如法(여법)에 撞着(당착)하며,

佛法(불법)이 이미 平常心(평상심)이며 明明草草(명명초초)라고 하는데 覺者(각자)가 어찌 如法(여법)에 撞着(당착)한다는 말이 成立(성립) 되겠습니까?


▷ 答(답)하되, 參究者(참구자)의 初發心(초발심)은 이 보고 듣고 느끼는 한 물건이 따로이 있다고 믿는 마음이며,

그 한 물건을 알고져 하는 것이 發心(발심)의 원인입니다.

그것이 初發心(초발심)입니다.

허나 如法(여법)에 撞着(당착)하여 초발심을 바꾸는 것은, 바꾸고자 하여 바꾸는 것이 아니라 刹那龍蛇(찰나용사)를 모르기 때문이며, 達本(달본)이 幻(환)임을 모르기 때문이며, 非(비)와 非非(비비)의 非名(비명)에 속아 是(시)를 택해 是名(시명)에 속았기 때문이며, 스스로 究竟(구경)이라고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初玄(초현)과 二玄(이현)에 들면, 沙漠(사막)이 춤을 추고 神秘女(신비녀)가 눈을 戱弄(희롱)하며, 눈 두개 달린 부처가 발목을 잡아당기는데 이것을 일러, 幻師(환사)가 眞師(진사)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하는 것입니다.

如法(여법)은 常如如(상여여)하고, 初玄(초현)은 二玄(이현)을 모르고, 二玄(이현)은 三玄(삼현)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覺性(각성)만을 論(논)한다면 이것이 三玄(삼현)이 되는 까닭입니다.


▶ 묻되, 初玄(초현)과 二玄(이현)에 든 者(자)는 어찌하여 覺性(각성)과 虛空性(허공성)에 自由(자유)롭지 못하며 그러하다면 正玄(정현)으로 나아가는 經路(경로)가 어떠합니까?


▷ 答(답)하되, 覺性(각성)과 虛空性(허공성)을 모르는 까닭은 한마디로 截間(절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正玄(정현)으로 나아가는 經路(경로)를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잘 익은 無字(무자)의 無字(무자) 껍데기를 만지다가,

홀연 힘을 가하여 단단한 無字(무자)가 無字(무자) 껍데기 안에 들어 있음을 알게 되는 境遇(경우)가 初玄(초현)이라고 합니다.

잡아본 사람은 感觸(감촉)으로 단단한 無(무)자가 들어 있음을 確信(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얼기설기한 껍데기에 비쳐 알맹이의 은근함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들어 있음을 確信(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리 窮究(궁구)하고 저리 窮究(궁구)하다가, 이 無字(무자) 껍데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어떻게 열어볼 것인가?

하다가 구겨진 껍데기 틈으로 스쳐 삐꼼이 無字(무자) 알맹이를 보고, 알았다! 알았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刹那(찰나)에 본 것이라서 無字(무자) 껍데기에 뿌리박고 無字(무자) 알맹이에 깃대 꽂는 것이며, 영원한 無字(무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지나온 경로를 생각할 때 無字(무자) 껍데기와 無字(무자) 알맹이 外(외)에 무엇이 있는가를 窮究(궁구)하여 色身(색신)에 사무치고 虛空(허공)에 섞인 名(명)을 끊고 圓覺山(원각산)의 원숭이를 잡아내는 것을 正玄(정현)이라고 하며 妙體(묘체)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 묻되, 깨달을 것 없는 그것을 깨달아야 된다는 말이 무엇이며, 그것이 곧 如法(여법)을 깨달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 我(아)가 有․無(유․무)를 超越(초월)하여 있다고 하나 權道(권도)로서 하는 말이지 가히 따로이 찾을 수 있겠습니까?

▷ 答(답)하되, 학인의 眼(안)이 얼마나 막혔으면 魔鬼(마귀)가 귀를 하나 더 달아 주었겠는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도다. 瞿曇(구담)이 통곡하고 祖師(조사)가 등을 돌리도다. 佛種(불종)을 끊는 말이도다. 군말않고, 非非(비비)란 對(대)를 세우지 않고 말하노니, 玄體(현체)가 別有(별유)로다.


▶ 묻되, 원래 닦을 것이 없다는 말도 있는가 하면 世世生生(세세생생) 닦고 또 닦아야 된다는 말도 있고,

몰록 닦는다는 말도 있고 점점 닦는다는 말도 있는데 학인의 나아갈 바를 明快(명쾌)하게 일러주십시오?


▷ 답하되, 學人(학인)께서는 어찌하여 明快(명쾌)한 것을 좋아하여 상자속에 들어가기를 즐겨하며, 스스로 撞着(당착)하여 묶이기를 좋아하며, 한쪽에 치우쳐 스스로 옳다하는 것을 주장하려 하며 나아가 正眼(정안)을 막아 스스로 迷惑(미혹)되기를 즐겨 하십니까.

그러한 말들은 모두 맞는 말이며 모두 틀린 말입니다. 空理(공리)에 의하면 바다를 뒤엎고 물을 구하니 草草(초초)가 바람을 따른다는 말이라서 원래 닦을 바가 없다는 말이며,

몰록 닦는다는 말은 東木(동목) 西木(서목)의 깃대를 뽑아 中天(중천)에 올랐으며, 覺性(각성)을 알고 命(명)을 놓을 곳을 구했으니 관계할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점점 닦는다는 말은 소가 밭을 갈다 죽으면 농부가 갈아야 된다는 말이며,

뿔 뽑아도 바람은 분다는 것입니다.

世世生生(세세생생) 닦고 또 닦아야 된다는 말은 理(이)와 事(사)가 섞여 돌아 굴려 用(용)을 쓴다는 말이며, 眞人(진인)의 칼이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 틀린 말이란 1+1이 鬼神(귀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 묻되, 自性(자성)과 虛空(허공)이 一體(일체)라는 말은 四大(사대)가 흩어지면 性品(성품)이 虛空化(허공화)되어 버린다는 말입니까?


▷ 답하되, 참으로 꽃이 꽃을 피우고 벌나비는 갈 곳이 없습니다.

性品(성품)의 性質(성질)이 虛空(허공)과 같이 無時以來(무시이래)로 두루 圓滿(원만)하여 一切處(일체처)에 應(응)함이 같다는 말이며 그 妙(묘)한 機微(기미)는 虛空(허공) 非虛空(비허공)에 관계치 않으며, 古來(고래)로부터의 祖意(조의)는 一切(일체)에 간섭치 않는 한 물건입니다.


▶ 묻되, 生(생)함이 없이 生(생)함이며 滅(멸)함이 없이 滅(멸)함이란 覺性(각성)과 어떠한 聯關(연관)이 있습니까?


▷ 답하되, 山河大地(산하대지) 森羅萬象(삼라만상)이 明(명)에서 無明(무명)으로, 理(이)에서 氣(기)로, 昧(매)에서 知(지)로 옮길 때 生(생)하는지라,

비록 옮기고 生(생)하였다고 하나 원래 옮기고 生(생)한 바가 없으므로 똥막대기로 名(명)과 念(념)의 허리를 끊어 風光(풍광)을 잡아챈다는 것입니다.

허나, 生滅(생멸)이란 風光(풍광)의 불똥으로서 되돌아 佛田(불전)이라고 해야겠으며 覺性(각성)은 佛種(불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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