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禪風)

看話(간화)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09:45
 

 

 

看話(간화)


看話(간화)를 하며 黙照(묵조)가 되지 않으면

속 앵무새 밖에 안될 것이요

黙照(묵조)를 하며 看話(간화)가 되지 않으면

속벙어리 밖에 안될 것이다.



▶ 묻되, 대체 話頭(화두)란 무엇입니까?


▷ 답하되, 學人(학인)께서는 이미 가슴속에 話頭(화두)란 文字(문자)가 잡혀서 話頭(화두)가 되었는데 다시 무슨 話頭(화두)를 求(구)하십니까?


▶묻되, 어떻게 하여야 話頭(화두)를 제대로 잡아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 답하되, 學人(학인)께서는 여하한 話頭(화두)를 잡되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슨 까닭이 있을 터인데 하고 그 意趣(의취)를 자나깨나 自性(자성)이 確徹(확철)될 때까지 參究(참구)하십시오.

무릇 학인이 몇십년을 두고 看話(간화)하여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知解(지해)하여 撞着(당착)하는 까닭은 看話(간화)할 줄 모르기 때문이며 疑情(의정)이 없는 話頭(화두)에 疑心(의심)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무어꼬>가 되지 않는 까닭은 그냥 <이 무어꼬>만 부르짖기 때문이며, <이 무어꼬>는 토끼뿔을 관찰하면 틀림없이 解決(해결)됩니다. 또한 <뜰앞의 잣나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뜰앞의 잣나무>가 한 번씩 供養(공양)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며, <趙州無字(조주무자)>는 無字(무자)를 늘상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無字(무자)는 호주머니 속에 반드시 있습니다.


▶ 묻되, 祖師(조사)네의 奇怪(기괴)한 말씀에는 도대체 意味(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 답하되, 반드시 깊고 깊은 意趣(의취)가 있고 그 말씀을 하신 그 사람의 머리속을 뚫어야 합니다. 판대기를 들고 장승의 눈을 막아 눈을 뜨게 하고, 뜬눈으로 판대기를 뒤집어서 나머지 한쪽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 묻되, 운문스님은 부처를 일러 똥막대기라 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 답하되, 부처를 일러 똥막대기라 하지 않으면 부처가 갈 곳을 잃게 되고, 똥막대기를 일러 부처라 하지 않으면 똥막대기가 갈 곳을 잃게 됩니다. 만약 부처가 똥막대기가 아니라면 운문의 잘못이고, 똥막대기가 부처가 아니라면 부처의 잘못입니다. 에익! 똥막대기가 앵무새의 귀를 가져 가는구나.


▶ 묻되, 話頭(화두)에 의심이 가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 답하되, 학인께서 보고 듣고 한 알음이 생겨 이미 생긴 知識(지식)으로 해석해 버리기 때문인데, 話頭(화두)는 잡지 않고 話頭(화두)잡을 궁리만 한다는 것입니다.

잘 理解(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학인께서 理解(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인데 물어 알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話頭(화두)를 잡지 못하는 根本(근본)原因(원인)입니다. 話頭(화두)란 生死解脫(생사해탈)의 열쇠이고 반드시 그 話頭(화두)를 通(통)하여 自性(자성)을 確徹(확철)할 수 있다는 信心(신심)이 있어야 하며, 그 信心(신심)을 바탕으로 話頭(화두)의 意趣(의취)를 스스로 證明(증명)하는 것입니다.


▶ 묻되, 祖師(조사)네의 話頭(화두)를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하겠습니까? 疑心(의심)하는 方法(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 답하되, 자기의 話頭(화두)를 잡도록 하십시오. 학인께서 話頭(화두)를 입에 올린다면 벌써 여러 권의 經書(경서)나 祖師語錄(조사어록)을 읽었다는 말인데, 그러한 책을 읽던 중에 奇異(기이)한 말씀이나 東問西答(동문서답)식 말들이 있음에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들이 自性(자성)을 確徹(확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答案(답안)임을 믿고 其中(기중) 한 文句(문구)를 걷어잡고 왜 이러한 말씀을 했을까?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상하다? 하고 끝없이 參究(참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자기의 話頭(화두)를 잡는 것이라 하며 제대로 된 觀法(관법)인 것입니다.


▶ 묻되, 疑心(의심)이 생기지도 않는 話頭(화두)를 잡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 답하되, 그것은 자기의 話頭(화두)를 버리고 남의 話頭(화두)를 잡는다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듣거나 읽다가 생긴 疑心(의심)은 내버려두고, 즉 參究(참구)하여 自證(자증)할 생각은 않고 쉽게 흘려 버리고 남들이 한다 하여 애써 그쪽 話頭(화두)에 疑心(의심)을 맞추고 길들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生死解脫(생사해탈)의 工夫(공부)를 하다가, 혹은 文字(문자)나 語句(어구)에 奇異(기이)함이 있어 생각이 막히고 상식으로 解決(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을 즉시 話頭(화두)로 삼아 參究(참구)해야지, 그것을 知識(지식)으로 이해하려고 이리 저리 알아보면 疑心(의심)이 없어지고 소위 널리 알려진 고정된 話頭(화두)에 疑心(의심)을 맞추게 된다는 말입니다.


▶ 묻되, <이 무어꼬> 話頭(화두)가 가장 병통이 많다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 답하되, <이 무어꼬>는 모든 參究者(참구자)가 疑心(의심)하는 바이고, 또한 보고 듣고 느끼는 이 한물건을 알고져 하는 <이 무어꼬>는 바로 話頭(화두)의 終意(종의)입니다. 그러나 이 話頭(화두)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지고 놀기 때문에 대단한 병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境界(경계)에 따라 疑情(의정)이 이동하므로 看話(간화) 자체에 문제가 있고

둘째는 <이 무어꼬>를 破解(파해)한 뒤 그대로 <이 무어꼬>에 당착하는 것이 다른 話頭(화두)에 비해 지극하다는 것입니다.


▶ 묻되, 듣기로 自性(자성)을 確徹(확철)하는 것은 話頭(화두)만 破(파)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어떠합니까?


▷ 답하되, 그 말이 바로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서 주저앉은 사람을 말하는 말이고 하늘에 오르다가 떨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며, 無字(무자) 껍데기에서 無字(무자) 알맹이에다 깃대를 꽂은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東西南北(동서남북) 上下(상하) 左右(좌우)가 曠茫(광망)하여 樓閣(누각)은 주춧돌이 내려 앉았으나 눈알만은 孤高(고고)한 것입니다. 無字(무자)를 뽑고 空明殿(공명전)에 올라야 하며, 하늘을 나꿔채야 하며, 돛배를 버려야 합니다. 妄念(망념)은 無爲(무위)를 당할 수가 없고,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撞着(당착)하면 病(병)이 되는 것입니다.


▶ 묻되, 話頭(화두)를 파하지 않고도 <이 뭐꼬>에 당착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 답하되, 그곳은 命(명)을 놓을 곳이 아니며 膏盲(고황)입니다.


▶ 묻되, 話頭(화두)를 看(간)하면서도 보고 듣고 느끼며 또한 說法(설법)도 듣는다 하는데 어떠합니까?


▷ 답하되, 그것은 疑情(의정)이 純一(순일)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話頭(화두)가 제대로 잡히면 차차 덜할 것입니다. 또한 話頭(화두)를 잡고 說法(설법)을 듣는다 하는데, 一念(일념)이 話頭(화두)에 있는데 무슨 說法(설법)이 들리겠습니까? 開遮(개차)를 한다는 말이지만, 그것을 어찌 工夫(공부)라고 하겠습니까. 생각이 귀에 있는데 어찌 疑情(의정)이 남겠으며, 어째서 거짓 생각만 생각이고 無爲念(무위념)은 생각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 묻되, 話頭(화두)를 看(간)하다 話頭(화두)가 없어져 버리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話頭(화두)가 없어져 허둥지둥 하다가 깨어나는데 어찌된 까닭입니까?


▷ 답하되, 工夫(공부)는 깊은데 뒷힘이 부족하고 因緣(인연)이 닿지 않습니다. 相對(상대)를 향해 寶劍(보검)을 휘둘렀으면 끝내 그 자취를 놓치면 안됩니다. 어찌 상대도 놓치고 자취도 놓쳐버린단 말입니까?


▶ 묻되, 대체 話頭(화두)를 몇 개나 파해야 自性(자성)을 確徹(확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답하되, 학인께서는 어찌 話頭(화두) 破(파)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모름지기 소를 찾으려면 人牛俱忘(인우구망)하여 空明殿(공명전)에 오를 때까지 찾아야 하며, 玄(현)을 찾으려면 모름지기 一色外一色(일색외일색)을 찾아 玄(현)이 體(체)가 될 때까지 찾아야 합니다.


▶ 묻되, 覺(각)을 話頭(화두)를 破(파)하지 않고도 智慧(지혜)로 알 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 답하되, 참으로 佛種(불종)을 끊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 色身(색신)받은 이후 생긴 知識(지식)으로 解析(해석)해 버린다는 말이고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에 속아 타협한다는 말입니다. 옛 聖賢(성현)들이 理一元(이일원)이나 理氣二元(이기이원)을 말할 때에는 文字(문자)를 빌어 표현함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모르고 後代(후대) 학인들이 쓸데없이 是非(시비)한 것이 모두 色身(색신)받은 以後(이후) 知識(지식)으로 解析(해석)한 때문이며 正玄(정현)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생긴 智慧(지혜)로 해석한 때문입니다.


▶ 묻되, 만약 話頭(화두)를 破(파)하지 않고는 아니된다면 黙照(묵조)는 어떻게 正玄(정현)에 들 수 있겠으며 看話禪(간화선)과 黙照禪(묵조선)은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 答(답)하되, 비록 看話禪(간화선)과 黙照禪(묵조선)이란 主張(주장)이 있다고 하나 看話(간화)나 黙照(묵조)가 모두 入覺(입각)하는 순간의 經路(경로)는 같으며, 만약 看話(간화)를 하며 黙照(묵조)가 되지 않으면 속 앵무새 밖에 되지 않을 것이요, 黙照(묵조)를 하며 看話(간화)가 되지 않으면 속 벙어리 밖에 안될 것입니다. 看話(간화)를 잘 하는 사람은 절로 觀(관)에 들어 黙照(묵조)가 될 것이요, 黙照(묵조)를 잘 하는 사람은 절로 一念(일념)이 되어 看話(간화)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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