Δ 41. 마음과 인식기관을 떠난 물질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문: 그리고 보통으로 봐서 물질이라 할 수 없는 암시와 동작과 특징도 물질의 영역에 포함시키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답: 잘 보셨습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물질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이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내몸을 체험할 때 느껴지고 알아지는 물질의 성질을 모두 물질로 본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처럼 나의 인식과 관계없는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은 근본적으로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부의 세계란 그것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그것은 아비담마에서는 다섯가지 고짜라(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나머지는 모두 내게서 체험되어 분류되는 물질인 것입니다. 외부세계도 인식의 대상일때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불교에서 분류하여 설하는 물질은 근본적으로 요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 등에서 체계화시키는 물질과는 그래서 그 분류의 기준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인식기관을 통해서 체험하는 대상(법은 제외)을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예를 들면 4대도 땅이라는 불변의 물질적인 성질보다는 내가 느끼는 딱딱한 성질을 지대로 보는 입장입니다. 수대는 점착성으로 화대는 더운 기운이나 소화력으로 풍대는 유동성으로 이해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외부 대상에는 별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심심미묘해도 그것은 빤�띠(개념)일 뿐이고 대상은 나의 알음알이가 없는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름 모르는 별들 속에 있는 물질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던 의미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 즉 나의 몸뚱이를 떠난 아비담마의 물질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내 몸뚱이를 깊이 분석하고 분해해서 이해해 들어가면 우리는 반드시 이런 28가지의 물질과 물질의 성질을 실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보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이지요.
마치 수레바퀴, 축, 널빤지 ... 등등이 모여서 수레라는 이름이 있듯이 이런 최소 물질의 이합집산, 생기고 사라짐 ... 이것이 내몸뚱이라고 나라거나 내것이라는 감정을 버리고 관찰하는 것이 아비담마고 위빳사니이지요. 이물질은 우리의 마음현상보다 느리고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물질보다 16배나 빨리 생기고 사라지고 한다고 설합니다) 관찰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에 위빳사나에서는 이 물질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의 열가지 위빳사나에서 이 물질을 관찰하는 것을 위빳사나의 시작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Δ 42. 물질은 깔라빠(kalaapa, 무리)로 존재한다
문: 그 외에 더 중요한 개념들이 있으면 설명해주시지요.
답: 사실 물질은 이렇게 기본 단위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최소의 단위들이 몇가지가 결합해서 하나의 물질 단위를 구성합니다. 그것을 깔라빠(kalaapa)라고 하지요.
문: 예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에서 물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라 하던데요. 경에서 부처님이 사용하시지 않은 단어인데 아비담마에서 발전시킨 그런 아비담마의 중요한 개념이라고요.
답: 그렀습니다. 위에서 말한 28가지 물질의 최소단위들은 따로 따로 독립해서는 존재할 수 없답니다. 최소로 8가지의 단위들이 뭉쳐서 하나의 소위 말하는 물질로 인정되는 것을 형성하는데 이것을 깔라빠라합니다.
화학에 비유해서 말하면 28가지 최소단위들은 원자인 셈이고 그래서 1번부터 28번까지의 원소기호로 표시할 수 있겠지요. 마치 화학에서 말하는 물질은 1번 수소에서 254번?(정확히 모르겠음) 우랴눔까지이듯이요. 그리고 깔라빠는 분자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현실적으로 모든 물질은 분자상태로 존재하지 원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28가지 물질은 원자에 비유할 수 있고 깔라빠는 분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비담마에서 물질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최소단위로 분석한 것이라서 자연과학에서 정리한 최소단위인 원자와는 기본 전제가 다릅니다. 단지 이렇게 비유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 귀 코 혀 ... 등 등으로 부르는 경에 나타나는 물질들은 모두 이 깔라빠(무리)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 등의 후대 주석서나 논서들을 보면 cakkhu-dasaka(눈의 십원소)니 jiivita-navaka(생명의 구원소)니 하는 말들이 종종 나타나고 영어로는 eye-decad니 vital-nonad니 하는 알송달송한 말들로 옮기는데 이 말은 열 가지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dasaka) 눈[이라는 깔라빠], 아홉이 모여서된 생명이라는 깔라빠라는 의미입니다.
Δ 43. 깔라빠=분해할 수 없는 것(아위닙보가)= 영양소를 여덟번째로 한 것(오잣타마까)
문: 그렇군요. 깔라빠는 참 중요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를 발전시켜온 스님들의 직관이 배어있는 그런 용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조금 감이 잘 안잡히네요. 조금더 설명해주시지요.
답: 깔라빠를 이해하는 제일 중요한 용어가 아위닙보가(avinibbhoga)입니다.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한 깔라빠를 이루는 최소 단위라는 말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四大와 형상(r?pa), 냄새(gandha), 맛(rasa), 영양소(oj?)의 여덟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용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항상 서로 묶여서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인 대상에 현현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여덟 가지는 물질의 무리(깔라빠, kal?pa)를 이루는 최소의 구성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덟 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팔원소(suddha.t.thaka)’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깔라빠는 이들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구원소(navaka)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십원소(dasaka)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9원소는 8가지 아위닙보가에다 생명기능(명근)이라는 물질이 하나 더 붙어서 9원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위닙보가는 물질의 무리(깔라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석서들에서 오자앗타마까(oja.t.thamaka,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한 것)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이 아위닙보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오자(영양소)가 이 아위닙보가에서 맨 나중 즉 여덟 번째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위닙보가(분리할 수 없는 것)와 숫다앗타까(순수한 팔원소)와 오자앗타마까(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것)는 모두 동의어입니다.
아비담마에 익숙치 않은 분들에게는 너무 생소한 술어들인데 알고보면 어려울 것 하나없는 용어들입니다. 인도에서 공부할 때 아비담마를 잘 모르는 교수님이 이 오잣타마까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온갖 산스끄리뜨 지식을 다 동원하여 설명하기를 오자(영양분)+타마(스떼만=영어 스테미나와 같은 어원=정력=힘)로 분해해서 음식을 먹고나서 원기왕성한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아비담마를 잘 모를때는 귄가민가하였고 문맥과 맞지 않아서 무슨 뜻인지 참 당황스러웠는데 미얀마 가서 영양소를 여덟번째로 한 것(앗타마까)이란 뜻이고 깔라빠의 동의어임을 알고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뭐든 알고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모르면 온갖 소설을 다 쓰게 되는 것이지요.
Δ 44. 사과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해보면?!
문: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 뭔가 좀 감이 잡힙니다. 아무튼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이 세상의 물질은 모두 이렇게 분해되고 이렇게 무리지어 존재하는군요. 그럼 사과의 물질구조는 아비담마로는 어떻게 분석될까요.
답: 아, 사과란 것은 아비담마에서 보면 단지 눈의 대상인 색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니 아위닙보가(분리할 수 없는 순수한 8원소) 8가지일뿐이겠습니다. 아위닙보가 속에 사과의 성분이 다들어 있으니까요. 사실 사과니 배니 코끼리니 하는 개념은 단지 빤�띠일 뿐이라서 아비담마의 관심이 아니지요. 그것은 일단 눈의 대상일 뿐이지요. 코끼리 소리라 하면 그것은 귀의 대상일 뿐이고요.
문: 잘 알겠습니다. 아비담마의 기본 전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시네요. 어쨋던 존재하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8가지 물질의 담마로서 정의하고 그 중에서 냄새와 맛과 자양분을 포함시킨다는게 흥미롭고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모든 깔라빠(분자상태?)의 물질은 고유의 냄세를 가졌고 고유의 맛을 가졌고 양분을 가졌다고 아비담마 논사들은 직관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문: 또 물질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없습니까?
답: 많지요. 그것은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읽어보면 됩니다. 여기서 다 말해버리면 길라잡이 책을 내는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웃음)
Δ 45. 열반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문: 스님, 이제 아비담마의 마지막 주제이면서 불교의 근본 이상인 열반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차례입니다.
답: 열반은 nibbaana(Sk. nirvaan*a)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寂靜이나 寂滅로 번역을 하기도 했는데 후대로 가면서 모두 열반으로 음역해서 정착했습니다. nibbaana는 nis(부정접두어)+√v?(to blow)의 과거분사형인데 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불어서 꺼진’의 뜻입니다.
초기경에서는 탐(r?ga), 진(dosa), 치(moha)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라고 설명하는데 열반의 가장 좋은 설명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말로서 설명하거나 거론하지 않습니다. 탐진치가 소멸된 그 경지를 어떤 언설로 설명하면 그것은 이미 열반이 아니고 알음알이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대승불교에서는 엄청난 개념을 총동원해서 소위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을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열반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진여, 법성, 자성, 원각 등등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은 열반을 개념화시키고 이념화시키는 우를 범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열반을 이념화 시키면 힌두에서 말하는 브라흐만이나 아뜨만 사상과 다를바가 없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힌두에서는 열반을 자기들 식으로 이해하여 브라흐만의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고 주장하며 그래서 힌두 제일의 성전인 바가왓기따(Bhagavadgiita)에서 브라흐마니르와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하고 있습니다.
Δ 46. 오온과 마음-마음부수-물질
문: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단 아비담마의 네 가지 주제 즉 �따(마음)와 쩨따시까(마음부수, 심리현상)와 루빠(물질)와 닙바나(열반)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여기서 열반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나면 일단 부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분석하여 파악하신 오온의 개념이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로 설해진 것 같습니다. �따는 알음알이요 쩨따시까는 느낌[수], 인식[상], 의도(형성된 것)[행]들이고 루빠는 물질[색]로 이렇게 배대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오온 그 중에서도 정신(naama)에 관계된 4온들 즉 수상행식을 같은 선상에서 설하셨고 특히 수행에서는 수와 상의 중요성을 거듭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응부에서는 느낌상응(S36)이 따로 독립되어 설해졌고요. 산냐도 여러 측면에서 설해졌습니다. 그럼 왜 아비담마에서는 윈냐나(알음알이)를 �따(마음)라고 하여 독립시켜 먼저 설명하고 나머지를 쩨따시까(마음부수)라 하여 나중에 뭉뚱그려 설명합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답: 이렇게 설명드리면 될까요. 앞에서 사진에다 아비담마를 비유했는데요. 이 욕계 색계 무색계 그리고 출세간계의 4계의 모든 찰라의 마음들을 순간순간 찍어낸다면 수백억조 불가설 불가설전 미진수가 되겠지요. 그것들을 어떻게든 분류하여 분석하고 분해해내려 시도하면 일단 무슨 분류의 기준이 있어야 겠지요. 그 기준이 되는 구극의 단위로 윈냐나(알음알이) 즉 �따(마음)를 아비담마 논사들은 주목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해봅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런 불가설 불가설전의 많은 명색(정신-물질)의 사진들을 아비담마에서는 �따를 중심으로 89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다른 단위들(dhammaa)은 이런 분류의 기준이 되기에는 너무 제한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알음알이는 찰라생 찰라멸하면서 ‘안다’는 단지 하나의 성질과 기능을 가졌지만 주위의 조건에따라서 89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기에 이렇게 나누었다 생각합니다.
문: 잘 알겠습니다. 아비담마는 항상 사진으로 생각해보면 감이 잘 잡힐 것 같습니다. 매순간의 정신-물질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니 거기에는 분류의 조건이 되는 알음알이가 있고 여러 심소가 있고 여러 물질이 있더라. 이렇게 그려지네요.
Δ 47.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1 - 힌두는 초월적(transcendental)이다
문: 그런데 스님, 아비담마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도 물질, 느낌, 인식, 의도적 행위들, 알음알이의 오온이고 그 오온은 바로 부처님이 제시하신 ‘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비담마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체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 선종의 대표적 화두 ‘이뭣꼬’나 힌두 상까라파의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꼬아함(ko aham)’과 같은 말이 아닙니까?
답: 언어로 보면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분별 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습니다.
그리고 꼬아함은 ‘나는(aham) 누구인가(ka?)’로 번역되는 산스끄리뜨로 베단따 본류를 자처하는 상까라(Sa?kara)파의 힌두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명상 주제입니다. 그들은 이 ‘나’를 영원한 자아(아뜨만)라 하여 이 아뜨만에 몰입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니 화두참구를 이런 수준으로 파악한다면 참으로 문제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몇 몇 인도 사두들은 숨을 들이쉬면서 ‘꼬(ko)’하고 내쉬면서 ‘[아]함(aham)’하라고 지도를 한다니 참 화두와는 십만 팔천 리라 하겠습니다.
힌두 수행은 모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자리라는 식으로 아뜨만(자아)이나 브라흐만(梵)을 설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은 이런 대상을 향해서 몰두합니다. 때로는 그 아뜨만 브라흐만으로 옴(Aum)자를 설정하고 이 옴을 찬찬히 발성하면서 그 진동음속으로 몰입하기도합니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모두 이런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게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 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aara)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힌두 수행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 할 수 있습니다.
Δ 48.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2 - 간화선은 직관적(intuitive)이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합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심이 화두의 출발입니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닙니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의 출발입니다.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최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n$n$aanam* uparodha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입니다. 이런 산냐의 대표되는 것으로 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aatmaa-sam*jn$aa) 즉, 我相, 자아라는 산냐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 할 수 있습니다.
Δ 49. 아비담마와 '나는 누구인가' 3 - 아비담마는 분석적(analytic)이다
그러나 아비담마는 이 둘과 또 다릅니다. 아비담마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합니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닙니다.
나를 �따와 쩨따시까 루빠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냅니다. 그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집니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無我, anattaa]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며 그래서 삼차결집을 주도한 아쇼까 대왕때의 띳사 큰스님에서 유래된 상좌부 불교를 위밧자와딘(vibhajja-vaadin, 분석을 설하는 자들)이라 하며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요즘 일본 학자들은 분별상좌부란 말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물론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경지는 직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비담마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직관으로 완성되는 것이 위빳사나라 할 수 있겠지요.
Δ 50. 대승은 아비담마의 토양위에 핀 꽃이다 1
문: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그래서 법이라는 최소의 단위들을 설정하고 이것은 찰라생 찰라멸이지만 인식의 기본 단위라고 설명하고, 아까 스님께서 설일체유부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지만, 그래서 후대 대승 논사들이 부파불교는 아공은 말하지만 법공은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승이다. 교학적으로도 하열하다. 뭐 이런 주장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답: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그런 대승논사들의 주장이 근거없는 말씀은 아니라고 저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대승논사 중의 대논사이신 용수 스님만해도 그 분이 논거로 사용한 경들이 모두 남방의 니까야와 북방 소전의 아함부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분은 초기불교의 경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아비담마적인 법의 분석과 그것을 존재론적으로만 이해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용수 스님뿐만 아니고 초기 대승의 논사들은 모두 아비담마적 분석에는 능통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그런 바탕위에서 부파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극복하려한 것입니다.
'經典 > 아비담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비달마 불교 (0) | 2010.10.11 |
---|---|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6 (0) | 2008.04.02 |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4 (0) | 2008.04.02 |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3 (0) | 2008.04.02 |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2 (0) | 2008.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