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담마

아비달마 불교

通達無我法者 2010. 10. 11. 23:51

 

 

아비달마 불교 (2) / 권오민 자료실

 

복사 http://blog.naver.com/temple10/80058184005

출처 카페 > 적송공아(jugsonggon.. | 적송공아
원문 http://cafe.naver.com/bulgong/10930

1장 아비달마란 무엇인가

 

 

1. 아비달마의 본질
2. 아비달마 논서의 성립

 

 

 

(1) 발전의 세 단계
(2) 남방 상좌부의 논서
(3) 설일체유부의 논서
(4) 그 밖의 부파의 논서

 

 

3. ≪아비달마 구사론≫

 

2장 존재의 분석

 

 

1. 법이란 무엇인가?
2. 온蘊·처處·계界의 분별
3. 5위位 75법法의 분별

 

 

 

1) 색법色法 - 물질적 존재

 

 

 

 

(1) 5근根
(2) 5경境
(3) 무표색

 

 

 

2) 심心·심소법心所法 - 마음과 마음의 작용

 

 

 

 

(1) 마음
(2) 마음의 작용

 

 

 

3) 불상응행법 -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1) 득得과 비득非得
(2) 동분同分
(3) 무상과無想果와 무성 멸진정滅盡定
(4) 명근命根
(5) 유위 4상相
(6) 명名·구句·문文의 3신身

 

 

 

4) 무위법無爲法

 

 

4. 제법의 성호포섭 관계
5. 제법의 삼세三世 실유實有
6. 제법의 인과관계

 

 

 

1) 6인因과 4과果
2) 4연緣
3) 유위 4과와 이계과離繫果

 

3장 미혹한 세계

 

 

1. 세간과 유정

 

 

 

1) 3계界 5취趣
2) 불교의 우주관

 

 

2. 업

 

 

 

1) 업의 종류와 본질
2) 율의律儀·불율의와 선악의 기준

 

 

 

 

(1) 율의와 불율의
(2) 선악의 기준

 

 

 

3) 10업도業道와 그 과보
4) 과보를 낳는 시기

 

 

3. 윤회와 12연기

 

 

 

1) 유전의 네 단계
2) 무아론과 윤회상속
3) 12연기의 유전

 

 

 

 

(1) 생리적 과정으로서의 유전
(2) 12연기의 유전
(3) 삼세 양중兩重의 인과설
(4) 12연기와 유자성有自性

 

 

4. 번뇌, 즉 수면隨眠

 

 

 

1) 근본번뇌
2) 98수면으로의 전개
3) 지말번뇌로서의 수번뇌隨煩惱
4) 번뇌의 또 다른 분류
5) 번뇌의 단멸斷滅

 

4장 깨달음의 세계

 

 

1. 4제諦에 대한 통찰
2. 견도見道의 준비단계

 

 

 

1) 예비적 단계
2) 3현위顯位

 

 

 

 

(1) 5정심관停心觀
(2) 4념주念住

 

 

 

3) 4선근善根

 

 

 

 

(1) 따뜻해지는 단계(煖位)
(2) 꼭대기의 단계(頂位)
(3) 인가의 단계(忍位)
(4) 세간에서 가장 뛰어난 단계(世第一法)

 

 

3. 무루성도聖道와 성자의 단계

 

 

 

1) 견도見道
2) 수도修道

 

 

 

 

(1) 유루의 세간도

 

 

 

3) 성자의 단계

 

 

 

 

(1) 예류향과 예류과
(2) 일래향과 일래과
(3) 불환향과 불환과
(4) 아라한향과 아라한과 - 무학도無學道
(5) 초월증超越證의 성자

 

 

4. 그 밖의 실천도(37보리분법)
5. 지혜와 선정

 

 

 

1) 10가지 지혜(智)
2) 지혜의 공덕

 

 

 

 

(1) 불타만의 공덕 - 18불공법
(2) 성자와도 공통되는 공덕
(3) 범부와도 공통되는 공덕 - 6통通

 

 

 

3) 선정禪定

 

 

 

 

(1) 4정려靜慮
(2) 4무색정無色定
(3) 경설經說상의 삼마지

 

 

 

4) 선정의 공덕

 

 

6. 불타

 

 

 

1) 성문과 독각
2) 보살의 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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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계界 5취趣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앞장에서 아비달마불교에 있어 세계란 경험된 세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경험은 의식적 언어적 신체적 행위라는 생명활동을 통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는 어떠한 세계가 있는가? 즐거움의 세계, 괴로움의 세계, 기쁨의 세계, 슬픔의 세계, 분노의 세계, 욕망의 세계, 그것은 다만 인간의 감정이 투영된 세계일 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절망과 비탄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삶을 생각해 보자. 누가 자신에게 드러난 그 같은 세계를 의식이 꾸며낸,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꿈이라고 여기겠는가? 그에게 있어 그 같은 세계는 다만 주관적이 세계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엄연한 현실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일 수도 있고, 영겁에 걸친 것일 수도 있다.
물질적 세계, 순수한 정신적 세계, 남극보다 더 추운 극한의 세계, 사하라의 사막보다 더 뜨거운 극열의 세계, 굶주린 아귀의 세계, 항상 싸움질만 하는 아수라의 세계,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 나아가 환희와 열락으로 충만한 천상의 세계, 세계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며 삼라만상으로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3계界 5취趣로 정리한다. 3계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이다. 앞의 두 가지 물질적 세계라면, 무색계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 정신적 세계이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 중에서도 특히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를 욕계라고 하며, 욕망이 배제된 세계를 색계라고 한다.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보다 뛰어난 세계로 생각되어 욕계가 가장 아래에 위치하며, 무색계가 가장 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욕계에는 다시 지하의 세계가 있고, 지표와 천상의 세계가 있다. 지하의 세계에는 지옥이 존재하며, 지표의 세계에서는 아귀와 축생과 인간의 삶이, 천상의 세계에서는 신들의 삶이 영위된다. 이를 5취라고 한다.(혹은 여기에 아수라를 더하여 6취라고도 한다) 물론 천상의 세계가 보다 뛰어난 세계이며,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열등하기에 3악취惡趣(혹은 惡道)라고 한다. 그리고 천상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섯 층급의 하늘이 있는데, 이는 천계 중에서도 하층에 속한다.
보다 높은 색계에는 네 단계의 17층급의 하늘이 있으며(카슈미르 정통 유부학설은 16층급임), 무색계에는 네 종류의 하늘이 있다.
이처럼 세계는 다양한데, 그곳의 환경과 거기서 감수하는 고통과 욕락 또한 각기 다르다, 인간의 삶이 천차만별이듯이 지옥 또한 그러하며, 천계 역시 그러하다.
지옥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네 인간세계(남섬부주) 아래로 2만 유선나踰繕那 떨어진 곳에 어떠한 찰나의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는 무간지옥이 있으며, 그 위로 불길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를 태워 해치는 극열지옥, 뜨거운 고통을 참기 어려운 염열지옥, 혹독한 고통에 핍박되어 비탄하고 절규하는 대규지옥, 원한에 사무쳐 절규하는 호규지옥, 온갖 도구에 의해 핍박당하는 중합지옥, 검은 쇠사슬에 묶여 사지가 절단되는 흑승지옥, 죽을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나 고통받는 등활지옥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지옥 네 문 밖에는 뜨거운 재가 무릎까지 차는 당외증 增, 송장의 똥오줌이 가득차 침과 같이 날카로운 입을 지닌 벌레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시분증屍糞增, 칼날로 이루진 봉인증鋒刃增, 뜨거운 잿물로 가득 찬 열하증烈河增이 있으며(여기서 '증'은 지옥에 부속된 별도의 정원이라는 뜻), 다시 그 옆으로는 노무나 추워 살이 터지고 절규하는 8한지옥이 있다.
천계의 경우는 어떠한가? 모든 하늘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수미산에 꼭대기에 존재하는 삼십삼천(혹은 도리천이라고도함, 욕계 제2천)의 경우, 네 귀퉁이에는 금강수金剛手라고 이름하는 팔부八部의 천중들이 이 하늘을 수호하며, 중앙에는 선견궁善見宮이라 이름하는 금으로 된 성이 있다.(여기에 제석천이 산다) 역시 순금으로 이루어진 지면에는 형형색색의 보배로 장식되어 있고, 그 감촉은 비단보다 부드럽다. 성밖에는 인간의 온갖 욕락을 낳게 하는 물건으로 채워진 네 정원이 있으며, 8공덕수로 가득찬 연못이 있어 원하는 바에 따라 꽃과 배와 새들로 장식되어 있다.
즉 이 하늘을 비롯한 욕계 6천의 삶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욕생欲生이라 한다면, 색계의 아래 9천(혹은 8천)에서 삶은 원하는 일도 없이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낙생樂生이다.(그 위의 8천은 즐거움마저 사라진 不動의 세계이다)
그들의 수명은 어떠한가? 욕계 최하천인 사대왕중천의 하루 밤낮은 인간세계의 5십 년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수명은 이러한 계산에 따라 500년이다.(인간의 수명으로 900만 년) 그 위의 5천은 순서대로 두 배씩 증가한다. 즉 삼십삼천의 하루 밤낮은 인간세계의 100년에 수명은 천 년이며, 나아가 제6천인 타화자재천의 하루 밤낮은 인간세계의 천 6백 년에 수명은 만 6천 년이다.(인간의 수명으로 92억 천 6백만 년) 참고로 색계에는 밤낮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겁劫으로서 수명의 길이를 논의한다.
이처럼 천계에서의 삶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복락과 수명 면에서 뛰어나기는 하지만, 지복의 세계는 아니다. 그곳 또한 유위세계인 이상 무상 변천을 면할 수는 없다. 지옥에서 천계에 걸쳐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를 유정有情(혹은 衆生)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나아가는 세계는 이전에 행한 업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며, 일찍이 지은 업에 따라 5취 중 어느 한 곳으로 끝없는 생사生死의 유전을 되풀이한다. 생사 윤회한다는 점에서 천계의 유정도 지옥의 유정도 동일하다. 그곳은 다같이 미혹한 세계이다.
이러한 미혹한 세계의 유정은 태어나는 형태에 따라 다시 네 가지의 생, 즉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태생이며, 아귀는 태생 혹은 화생, 축생은 태생과 난생과 습생, 하늘과 지옥은 화생이다. 특수한 경우로서 인간 중에도 난생과 습생과 화생이 있을 수 있으며, 가루다나 용과 같은 축생은 화생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분류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자, 어떠한가? 이러한 온갖 세계는 실재하는가? 우리 인간의 세계는 어디쯤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의 세계는 적당한 고통도 있고, 적당한 쾌락도 있다. 가장 뛰어나다는 화생은 아니지만, 난생이나 습생도 아니다. 적당한 고통이 있기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적당한 쾌락이 있기에 그것에 더욱 탐닉하여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3계 5취의 분류는 인간을 중간자적인 성격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지옥으로도 갈 수 있으며, 천계로도 갈 수 있다. 다른 뭇 종교와 철학에서도 인간을 물성과 천성의 중간자로 규정하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늘'을 지향한다. 그것들이 인간을 중간자로 규정한 것은 하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경우, 하늘 역시 유위의 세간인 이상 무상 변천을 면할 수 없다. 하늘과 지옥 등은 다만 인간행위에 따른 생사윤회의 궤도일 뿐이다. 그곳들은 오로지 즐거움과 고통만이 감수되는 곳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업을 지을 수 없다. 그곳에서의 삶은 모두 이숙異孰의 과보일 따름이다.
아비달마불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3계 5취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3계 5취의 분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3계 5취의 세계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일 수도 있으며, 현실에서 경험하는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념의 세계일지라도 그것은 유식불교에서의 논의처럼 '외계대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깨어나지 못한 미망의 유정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인 세계와 다르지 않다. 꿈은 다만 깨어난 자에게 있어서만 꿈일 따름이며, 깨어나지 못한 자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다. 더욱이 욕계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현실의 세계라면,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명상)의 세계라는 점이다. 그곳은 선정을 통해 이를 수도 있고, 그 공덕에 의해 다음 생에 태어날 수도 있는 곳이다.
불교에서의 세계는 이처럼 다만 인간의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실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사유가 미치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포괄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해 해명한다고 할 경우, 이모든 세계에 적용되어야 하며, 그래서 아비달마의 모든 문제는 지극히 난해하다. 다시 말해 아비달마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는 그들의 일체의 논의 - 존재의 분석과 번뇌와 업, 그리고 수행 실천에 관한 일체의 논의를 3계 9지(욕계와 색계 4정려와 무색계 4무색정의 단계)와 관련시켜 논의함으로써 대단히 복잡한 이론체계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설명할 '미혹한 세계'에 대한 술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3계 5취의 세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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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의 우주관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앞서 누누이 아비달마불교에 있어 세계란 경험된 세계라고 하였으며, 3계 5취에 대해서조차 현실에서 경험하는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 사실로 여기는 성벽을 갖기 때문에 이 세계와는 다른 어떤 세계로 간주하는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다. 불교에서의 세계는 모두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이루어진 경험 즉 업의 소산이다. 그것은 분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신에 의해 조작된 것도 아니고, 우연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행·불생의 세계는 그렇다 할지라도 산하대지나 일월성신과 같은 자연의 세계를 어떻게 다만 업의 소산이라고 하겠는가? 불교는 이 물음에 대답하여야만 하였다. 그것은 물론 불타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세간의 호기심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유정은 각자가 지은 업에 따라 3계 5취를 윤회하지만,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이를 器世間이라고 한다)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유정의 업에는 크게 유정 각각의 개별적인 업(別業)과 그들 공동의 업(共業)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유정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업이라면, 후자는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기원설에 대해서는 ≪장아함경≫에 수록된 ≪세기경世記經≫과 이것의 별역別譯인 ≪대누탄경大樓炭經≫ ≪기세인연경起世因緣經≫ 등에서 설해지고 있지만, 아비달마의 여러 논서를 거쳐 ≪구사론≫에 이르러 마침내 구체적으로 집대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고유한 학설이 아니라 인도 재래의 우주관이 불교의 업설과 관련지어져 정리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세계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그 개요만을 이야기해 본다.
화火·수水·풍風의 크나큰 재앙에 의해 유정과 세간이 모두 멸하는 괴겁壞劫과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겁空劫의 시기를 거쳐 어느 시기 마침내 유정의 공업共業에 의해 허공에 미풍이 일기 시작한다. 이 바람은 점차 밀도가 단단해져 급기야 원반 모양의 견고한 대기의 층을 형성하는데, 이를 풍륜風輪이라고 한다. 그 너비는 무한이고 두께는 160만 유선나로,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이를 부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구름이 일고 비가 내려 수륜水輪을 형성하며, 다시 바람이 물의 층을 후려쳐 응고시킴으로써 금륜金輪을 형성한다.
바야흐로 그 위로 금 은 에머럴드 수정을 이루어진 수미산이 융기하고, 여덟 산이 그 주위를 에워싸게 되는데, 그 사이는 바다이다. 안쪽의 일곱 바다에는 8공덕수로 가득 차 있으며, 바깥 바다는 짠물이다. 바로 이 바깥 바다에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남·동·서·북쪽에 각기 섬부주贍部洲(Jambu-dvipa)·승신주勝身洲(Purvavideha-dvipa)·우화주牛貨洲(Avaragodaniya-dvipa)·구로주俱盧洲(Uttarakuru-dvipa)라는 큰 대륙이 있으며, 그 옆에는 각기 두 곳의 중간 크기의 대륙이 있다.
남섬부주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 남섬부주의 북쪽에는 세 겹의 흑산이 있고, 흑산 북쪽에는 대설산大雪山과 향취산이 있으며, 그 사이에 아뇩달(Anotatta, 無熱惱)이라고 이름하는 큰못이 있이 여기서 캔지즈 등의 네 강이 흘러나와 동·남·북·서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이 못 북쪽에는 섬부贍部라고 이름하는 과실나무 숲이 있는데, '섬부주'라고 하는 명칭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남섬부주 아래로 2만 유선나를 지나면 8열지옥과 8한지옥이 있으며, 수미산의 중턱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역시 온갖 유정들의 공업共業에 의해 낳아진 바람에 의지하여 돌고 있다. 그래서 4대주의 일몰과 일출시간이 다른 것이며, 행도行道를 달리하기 때문에 낮과 담의 길이가 변화한다. 그리고 수미산 중턱에는 4대왕중천, 그 꼭대기에는 삼십삼천, 그 위로는 욕계의 야마·도솔·낙변화·타화자재 등의 4천과 색계 17천의 세계가 있다.
≪구사론≫ 권제11에서는 이 같은 각각의 세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수미산의 높이는 8만 유선나이며, 바다에서 색계 제17천인 색구경천까지의 거리는 1677억 7천 2백 16만 유선나이다.
유정의 공업에 의해 이러한 기세간의 세계가 이루어지면 이제 바야흐로 개별적인 업에 따라 천계로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 유정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상 세계와 유정이 생겨나는 시기를 성겁成劫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섬부주의 유정들은 태초 그 수명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었지만 그들의 업에 따라 10세로 감소하고, 다시 8만세로 증가하기를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괴겁을 맞이하게 된다. 이 같은 성·주·괴·공·의 기간을 1대겁大劫이라고 한다.
나아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세계가 각기 일천 개가 있는 것을 일 소천세계小天世界라 하고, 천 개의 소천세계를 일 중천세계中天世界라고 하며, 천 개의 중천세계를 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우주에는 10억 개의 이 같은 수미산의 세계가 있으며, 1대겁에 걸쳐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 이 세간은 참으로 광대 무변하며, 그것의 생성과 소멸 또한 시작도 끝도 없이 억겁을 두고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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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업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처럼 세계와 유정의 모든 차별 및 그것의 생성과 소멸은 유정의 업력에 따른다. 우리의 삶을, 세계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업이다. 초기경전에서 누누이 설하고 있는 것처럼 "태어남(즉 종성)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태어남에 의해 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고귀한 업에 의해 바라문이 되고, 비천한 업에 의해 천민이 된다. 그렇다고 할 때 이렇게 단언할 수 있으리라. '오로지 업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업에 의해 세계가 드러나며, 자아 또한 업에 의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중국의 불교사상가들은 이 같은 점에서 아비달마불교의 사상(연기설)을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라고 하였다.
업(karman)이란 '짓다' '행하다' '낳다'는 뜻의 어원 kr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차적으로는 활동 일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과의 관념과 결합되어 결과를 낳게 하는 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즉 선악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즐겁거나 괴로운 과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업은 현생에서뿐만 아니라 전생으로부터, 혹은 내생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윤회라고 하는 관념을 낳게 되었다. 이 같은 관념은 불교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인도의 보편적 사유로서, 이것이 불교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업이 결과를 낳게 하는 힘으로 규정될 때, 그것은 결정론적이고도 숙명론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과거(전생)의 업이 현재의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현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체념을 수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체념은 현재의 어떠한 의지도 노력도 부정하는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래서 불교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종교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의 업설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체념적인 인생관은 아니다. 인도의 저명한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업의 이론은 인간의 마음이 약해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상실될 때, 숙명론과 혼동되었다. 그것은 타성과 나태의 구실이 되었으며, 절망의 말이 되어버렸다. 결국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로서의 의미를 상실해버렸던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앞서 '제법의 인과관계'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싹은 씨앗으로부터 생겨나지만, 씨앗이 바로 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분이나 광선 온도 등의 일정한 조건에서만 비로소 싹을 틔우게 된다. 그리고 그 조건은 항상 현재의 몫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행위(즉 이숙인)에 의해 산출되는 그 과보(이숙과)는 무기로서, 그 자체로서는 또 다른 결과를 낳지 않는다. 예컨대 악취나 천계는 이숙과일 뿐, 거기서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업의 과보는 결코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이 미래의 존재를 규정짓지는 않는다. 미래는 항상 현재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며,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항상 순간순간 현재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다. 업은 항상 창조적이다.
이렇듯 업은 불교에 있어 세계창조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업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가 그렇듯이 인간의 행위 역시 일견 단순한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무릇 하나의 행위는 수많은 조건에 의해 행해지며, 그것은 또 다른 행위를 낳는 원인이 된다. 그럴 때 행위의 조건은 무엇이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선악의 기준은 무엇이며, 선악의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나아가 행위 결과와의 관계, 다시 말해 그것의 인과적 순환고리는 어떠한가? ≪대비바사론≫에서는 두 번에 걸쳐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업과 그 과보(5趣의 삶)의 양상은 참으로 심오하고 참으로 미세하여 관찰하기도 어렵고 깨달아 알기도 어렵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여래가 설한 일체의 경전 중에서 업과 그 과보의 차별상을 밝힌 업경業經(즉 율장)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12전轉(연기) 가운데 업(즉 '行'과 '有')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부처의 10력力 가운데 업력(즉 業異熟智力)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발지론≫의 8품 가운데 <업품>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4부사의不思議 가운데 업부사의 만큼 심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고자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부처님께서도 방에 들어가 오로지 골똘히 생각해 보아야 하였다고 논설하고 있다. 곧 업을 알아야 유정의 삶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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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업의 종류와 본질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일반적으로 행위는 이른바 신身·어語·의意라는 신체적 언어적 의식적인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아비달마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신업은 몸을 근거로 하여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소의所衣에 따른 분류이고, 몸이나 마음은 그 자체가 업이 아니지만 말은 바로 그 자체가 업이기 때문에 어업은 자성自性에 따른 분류이며, 의업은 앞의 두 업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등기等起에 따른 분류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밖으로 표출된 행위 즉 표업表業이고, 후자는 내적인 의지작용 즉 사업思業이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행위를 의지의 발로에 의해 드러난 업 즉 사이업思已業이라고도 한다.
그럴 경우 표업의 본질을 의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로서 드러난 행위의 구체적 형태나 말소리로 볼 것인가? 이는 동기론과 결과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행위는 시간적으로 일정한 길이를 갖고 성립하는 것으로, 행위를 시작할 때 그 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행위의 마지막 형태가 나타났을 때 그 최초의 부분은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행위의 본질(결과를 낳는 유효한 행위)을 어느 찰나에 둘 것인가?
나아가 행위의 인과상속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다시 말해 유위제법이 찰나생멸한다고 할 때, 행위 역시 이루어지자마자 바로 소멸하는데, 소멸된 행위가 어떻게 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인가? 선인선과(아비달마적으로 말하면 善因樂果) 악인악과,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사실은 다만 정서적인 믿음의 대상일 뿐인 것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표업은 이미 의지의 발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당연히 의지 즉 '사思'일 것이고, 따라서 의업은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표업은 의지의 발로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도둑이 금 덩어리라고 생각하고 훔쳐간 것이 돌덩이였을 경우, 의식상으로는 도둑질이 되지만 훔친 물건과 관련해 볼 때 그것은 도둑질이 아니다.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가진 자가 그의 집에 불을 질렀을 경우, 그 불은 방화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마을 전체를 태우기도 한다. 이처럼 행위가 어떤 구체적인 대상과 관련될 때 그것은 행위자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살인을 하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뜻(思)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와 다른 이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그만 살인이라고 하는 결과를 낳았을 경우, 양자는 엄격히 구별된다. 즉 전자의 경우는 회개하여 그 사람과 계속 친분을 유지할 수 있지만, 살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그 같은 사태 이전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의 발로에서가 아닌 물리적인 특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어쨌든 전후 간단없이 상속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회개가 가능하지만, 물리적인 행위의 경우 오로지 일회적인 것으로서 일단 행해져 끝나게 되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유부에 의하는 한, 사업思業에 의해 낳아진 신·어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이다. 그것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물질적 존재(色法)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표업은 예비적인 행위(이를 加行이라고 한다)와 본격적인 행위(이를 根本業道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부수적인 행위(이를 後起라고 한다) 등으로 구성되어 일정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체를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없고, 오로지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가, 예컨대 살인의 경우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거짓말의 경우 상대방이 속아넘어가는 순간 하나의 행위가 완성되며, 이 때 행위자의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가 바로 행위의 본질이 된다.
즉 경험의 현상세계를 온갖 존재로 분석하여 그것의 찰나성만을 인정하는 유부로서는,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의 극미로 이루어진 신체의 구체적 형태와 말소리를 표업의 본질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의지(즉 思業)는 다만 예비적 행위의 순간을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같은 업의 이해는 다음에 설할 무표업과 함께 다른 부파의 학설과는 대비되는 매우 독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형태(形色)란 다만 색채(顯色)의 차별로서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경량부에서는, 신표업은 다만 의지 즉 사思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것(그래서 경량부에서는 어표업과 함께 이를 動發勝思라고 한다)일 뿐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신체적 형태와 같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인 의지이며, 나아가 미래의 결과 역시 다음에 설할 무표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같은 의지의 변화에 의해 낳아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상좌부에서도 업은 모두 의지의 발로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의지와 신身·어語·의意 3업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의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가 어떻게 그 과보를 낳게 되는 것인가? 유부에 따르면, 표업은 행위된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업을 낳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위할 때의 마음과 다른 상태에 있든지 혹은 무념의 상태에 있든지 간에 항상 잠재 상속하여 이숙의 과보를 초래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적 삶을 규정한다. 유부에서는 선행된 행위로 하여금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낳게 하는 이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업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하였는데, 4대종으로 이루어진 물질적 존재인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무표색이라고도 한다. 이는 불교의 여러 학파 중에서도 오직 유부만이 주장하는 교설로서, 그들은 다음의 8가지 논거로써 이것의 실재성을 논증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 경에서 색에는 유견유대有見有對·무견유대無見有對·무견무대無見無對의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무루색의 존재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볼 수도 없고 공간적 점유성도 지니지 않은 색이라고 할 것이며, 무엇을 번뇌를 수반하지 않는 색이라고 할 것인가?
셋째, 경에서 세간의 복이나 출세간의 복은 상속 증장增長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때의 마음은 이미 소멸하고 다른 마음이 생겨났는데 어떻게 그것이 단절되지 않고 증장할 수 있을 것인가?
넷째,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인을 시켜 사람을 죽이게 하였을 경우, 교사자는 마땅히 그 업을 성취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표업(즉 어표업)은 그가 한 살인이라는 행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살인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만 예비적인 행위이지 본격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자가 살인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표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경에서 법처를 외처外處이고,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무대라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색법'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색법인 무표색이 법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여섯째,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루정려에서는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으며, 세속은 현실생활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8정도正道 중의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이 배제되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상태에서도 그것의 무표가 여전히 존속하기 때문에 8성도지聖道支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일곱째,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戒를 받더라도 그 힘이 상속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악심이나 무기심을 일으킬 것이므로 비구라고 이름할 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수계 이후 그를 비구라고 하는 것은 계의 무표 즉 별해탈율의가 상속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경에서 '계는 강물을 막는 제방처럼 항상 상속하여 범계犯戒를 막기 때문에 제당계堤塘戒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제방에 상응하는 실체 즉 수계의 무표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유부의 가장 강력한 대론자對論者였던 경량부에서는 무표색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컨대 계 측 율의律儀를 수지하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생 등을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서원이라는 어표업語表業에 근거한 무표업 때문이 아니라 계를 받는 순간의 의식작용인 의지와 그것의 잠재세력(思種子)이 상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부의 무표색은 과거 대종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만, 그들에 의하는 한 과거의 법은 실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무표는 색법의 특성, 이를테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에서 설명한 업의 종류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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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의와 불율의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런데 무표업은 모든 표업에 의해 낳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 세력이 강성한 표업만이 무표업을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표업이 강성한 것인가? 그것은 필경 강력한 의지에 의해 표출된 업일 것으로, 예컨대 수계식과 같은 맹서의 의식儀式을 통한 행위나 선악의 성격이 분명한 행위가 그러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이들 앞에서 어떤 이를 죽이기로 맹세하고 죽이는 것과 다만 탐욕의 결과 죽이는 것, 그리고 우발적으로 죽이는 것은 동일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그 세력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불살생을 선언하고서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과 가엾은 마음에서 죽이지 않는 것,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죽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작용하는 힘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맹서를 지키는 것을 계戒(sila)라고 한다. 맹서에 다른 행위 즉 계는 편안함을 낳기 때문에 청량淸?이라고도 하며, 그에 반한 행위를 막는다는 뜻에서 율의律儀(samvara)라고도 한다. 혹은 이 같은 힘으로 인해 여섯 감관을 능히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조복調伏(vinaya)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악의 집단이 아닌 이상 우리의 맹서는 대개 선善에 관한 것이므로 이를 다만 계(혹은 善戒) 또는 율의라 하고, 악과 관련된 맹서만을 악계惡戒 또한 불율의라고 한다. 그리고 맹서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선악의 행위는 선계도 아니고 악계도 아니기 때문에 비율의비불율의(혹은 處中)라고 한다.
사실상 유부에 있어 무표업은 바로 이 같은 율의의 지속을 해명하지 위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해명되지 않는 한 열반을 향한 수행의 의미 또한 상실되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 율의에는 그가 닦는 수행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욕계에서의 계 즉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을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라 하고, 색계 정려와 무루도를 닦을 때 생겨나는 그 같은 힘을 정려율의靜慮律儀(또는 定共戒)와 무루율의(혹은 道共戒)라고 한다.
별해탈율의(pratimoksa samvara, 혹은 波羅提本叉로도 음사함)란 수계受戒할 때 각각의 戒法에 대해 획득하는 무표로서, 각각의 계법에 따라 각기 별도의 해탈을 얻기 때문에 '별해탈'이라고 이름하였다. 예컨대 불살생계는 살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불투도계는 도둑질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여기에는 그가 소속된 집단의 유형이나 신체적 형태에 따라 8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출가남성이 수계하여 획득하는 비구니율의(혹은 비구계).
둘째, 출가여성이 수계하여 획득하는 비구니율의.
셋째, 비구니가 되기 위한 1년간의 시험기간 동안 획득하는 정학율의正學律儀(혹은 式叉摩那戒).
넷째, 20세의 비구가 되기 전까지 획득하는 근책율의勤策律儀(혹은 사미계)
다섯째, 20세의 비구니가 되기 전까지 획득하는 근책녀율의(혹은 사미니계)
여섯째, 재가남성이 획득하는 근사율의近事律儀(혹은 우바새계)
일곱째, 재가여성이 획득하는 근사녀율의(혹은 우바이계)
여덟째, 재가의 남녀가 단기 출가하여 하루 밤낮을 기한으로 하여 수지하는 近住律儀(혹은 우파바사계)
이 중의 앞의 5가지 율의는 일체의 악행과 성적性的 행위를 떠난 이의 율의이고, 근사와 근사녀율의는 악행만을 떠난 이의 율의이며, 근주율의는 악행과 욕행欲行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자의 율의이다. 그러나 8가지 율의는 출가·재가와 남녀의 신체적 형태에 따라 분류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비구와 근책과 근사 그리고 근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 네 가지는 다음의 행위를 떠날 때 획득된다.
첫째, 근사율의는 살생과,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사음과, 거짓말과, 술을 마시는 것 등의 5가지 일을 떠날 때 획득된다.
둘째, 근주율의는 살생과,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성적행위와, 거짓말과, 술을 마시는 것과,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과, 높고 넓으며 아름다운 평상이나 의자에서 자거나 앉는 것과,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 등의 8가지 일을 떠날 때 획득된다.
셋째, 근책율의는 앞의 근주율의 중 여섯 번째를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는 것'과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으로 나누고, 여기에 다시 금은 등의 보배를 받거나 축적하는 것 등의 10가지 일을 떠날 때 획득된다.
넷째, 비구율의는 마땅히 떠나야 할 일체의 세속적 신·어업을 떠날 때 획득된다.
이과 같은 율의는 맹서의 말을 발하여 계를 받는 순간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악업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별해탈'이라고 한 것이며, 그것은 의지에 의해 조작되어 발성된 것이기 때문에 표업이지만 다음 순간부터 그것을 버리기 전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오로지 '율의' 즉 무표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선계善戒의 획득을 막는 불율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성취되는가? 불율의란 항상 해코지하려는 마음(害心)을 갖는 것으로, 이를테면 양이나 닭 등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따위의 악업을 말한다. 이는, 불율의를 생업으로 삼는 집에 태어난 자가 처음으로 살생 등의 가행加行을 일으킬 때와 불율의를 생업으로 하지 않는 집에 때어난 이가 '나는 살생 등의 일로써 생계를 유지하리라'고 맹서할 때 획득된다.
그리고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무표는 다만 스스로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행해진 선·악업을 말하는 것으로, 예컨대 사원에 보시하거나 공양을 베푸는 일과 같은 비계율적인 선업이나 생활의 수단으로써나 맹세에 의한 것이 아닌 상황에 따른 악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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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악의 기준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렇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인 악인가? 이는 철학사에 있어 지극히 난해하고도 오래된 문제이다. 선이란 타율적인 것인가, 자율적인 것인가? 경험적인 것인가, 선험적인 것인가? 아비달마불교에서의 선은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며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선업(혹은 福業)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업을 불선업(혹은 비복업)이라고 한다. 또한 그것은 제법분별에 따른 존재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불교에 있어 최고의 선(이를 勝義善이라고 한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열반이다. 열반은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적멸된 최고의 안온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 무상 변천하지 않는 무위법이기 때문에 참된 의미의 선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열반은 선 중의 선이며 복 중의 복이다. 이에 반해 미혹의 유위세계는 생명 변천의 세계로서 어떠한 안온도 영원히 지속하지 않기에 본질적으로 불선(勝義不善)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덕 있는 자를 공경하고 자신의 죄과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탐욕이 없고 미워함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의 의식작용은 그 자체로서 선(自性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작용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그 밖의 마음과 그 작용도 역시 선(相應善)이며, 이것에 의해 일어난 신·어의 표업과 무표업 또한 선(等起善)이다. 비록 최고선인 열반의 경지에서 본다면 이 같은 유위법은 모두 불선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적인 과보에 따라 선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덕 있는 자를 공경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등의 의식작용은 그 자체로서 불선이며, 이와 상응하는 그 밖의 마음과 이에 따라 일어난 신·어의 표업과 무표업 또한 불선이다.
이 같은 선악의 분별은 제법분별에 따른 필연적인 것으로, 예컨대 열반이 병이 없는 상태라면, 그 자체로서 선인 무탐 등의 의식작용은 양약에, 이와 상응하는 마음과 그 작용은 양약이 섞인 물에, 이에 따라 일어난 표업과 무표업은 양약이 섞인 물을 마신 소의 젖에 비유된다. 혹은 반대로 유루의 유위세간이 고질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 자체로서 불선인 탐 등의 의식작용은 독약에, 이와 상응하는 마음과 그 작용은 독약이 섞인 물에, 이에 따라 일어난 신·어업은 독약이 섞인 물을 마신 소의 젖에 비유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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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업도業道와 그 과보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행위는 일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전후 찰나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이 같은 일련의 행위에 있어 어느 찰나를 행위의 본질이라고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어느 순간에 그 행위의 성격을 규정하는 무표업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 같은 물음에 따라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행위를 세 단계로 나눈다. 예컨대 소를 죽이는 행위의 경우, 최초로 살의를 일으켜 소를 끌고 와 몽둥이나 칼로 치고 베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업은 가행加行 즉 예비적 단계의 행위이며,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의 업은 근본업도根本業道 즉 본격적인 행위이며, 목숨이 끊어진 후 가죽을 벗기거나 살을 자르는 등의 업은 후기後起 즉 부수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그 같은 일련의 행위의 성격은 근본업도에 따라 결정되며, 이 때 살생의 무표업이 생겨난다. 물론 예비적 단계의 행위와 부수적인 행위에도 역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업도라고 할 수 있지만 가행은 근본을 위해, 후기는 근본에 의해 비로소 일어나며, 또한 가행과 후기는 근본에 비해 거칠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과실이 막중하지 않기 때문에 업도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행위는 결코 찰나적이거나 일회적이지 않으며, 중첩되어 일어난다. 행위는 그것이 초래하는 과보의 성질과 종류, 과보가 초래되는 시기나 세계 혹은 적용되는 범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분류도지만, 기본적으로 10악업도와 10업선도로 분류된다. 즉 앞서 언급한 선법에 의해 일어나는 신·어·의 3업은 지자智者가 찬탄하고 참으로 애호할만한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묘행妙行이라 하고, 불선법에 의해 일어나는 3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악행惡行이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같은 악행과 묘행 가운데 그 성격이 보다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다시 말해 그 결과(과실과 공덕)가 막중한 것을 10악업도와 10선업도로 분별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殺生)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며(不與取) 그릇된 방식으로 여인을 취하는 것(欲邪行)은 신체적인 악업도이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는 말(虛狂語, 구역에서는 妄語), 남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말(離間語, 구역에서는 兩舌), 남을 헐뜯기 위해 발하는 아름답지 못한 말(序惡語, 구역에서는 惡口), 진실이 아닌 온갖 더러운 말(雜穢語, 구역에서는 綺語)은 언어적인 악업도이며, 탐욕(貪)과 미워함(瞋)과 어리석음(邪見)은 의식적인 악업도이다. 그리고 이상의 악업도에서 떠나는 것이 선업도이다.
참고로 유부의 경우, 탐욕과 탐욕에서 떠나는 것(즉 무탐) 등의 악행과 묘행은 그 자체로서는 업이 아니지만 의업意業 즉 사思가 드러나는 통로(道)가 된다는 점에서 '업도'라고 하였다. 그 밖의 7가지는 그 자체 업이면서 '사'가 드러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업의 도 즉 업도이다.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10업도와 그 가행이 이루어지는 조건에 대해 상세하게 분별하고 있다. 이를테면 살생의 가행은 고기와 가죽을 얻고자 하는 등의 탐욕에 의해, 원수를 제거하려는 진에에 의해,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짐승을 희생犧牲 하려는 등의 어리석음에 의해 일어난다. 즉 이러한 3불선근에 의해 죽이려고 하는 의지를 일으키고, 다른 유정에 대해,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칼로 죽여야겠다는 등의 살생의 가행을 일으켜, 착오없이 그를 죽일 때 살생업도를 성취하게 된다.
나아가 유부 인과론상에서 볼 때 이러한 업도는 결과와 동시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과를 제외한 이숙·등류·증상의 세 가지 과보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업도와 세 가지 과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예컨대 살생의 경우 가행의 단계에서 상대방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나는 이숙과를 받고, 그 후 숙세의 선업(이를테면 순후수업; 뒤에 설함)에 따라 인간으로 태어나는 등류과를 받을지라도 다른 이의 목숨을 끊은 업도로 말미암아 수명이 짧아지며, 후기에서 상대방의 위엄(이를테면 활동의 근원이 되는 정기)을 허물어트렸기 때문에 외적인 물자가 궁핍하게 되는 증상과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삶(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또한 그 내용을 규정하는 업은 찰나찰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일하지 않으며, 복합적이고도 중첩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한 유정의 생은 하나의 업에 의해 산출되는 것인가, 다수의 업에 의해 산출되는 것인가? 혹은 하나의 업에 의해 단지 한 번의 생만이 낳아지는 것인가, 여러 번의 생이 낳아지기도 하는 것인가?
유부 제법분별에 따르면 유정은 유정으로서의 보편성 즉 동분을 갖기 때문에 유정이라 불리는 것으로, 그 같은 동분을 획득할 때 비로소 유정의 생이 낳아지게 된다. 따라서 한 유정의 생을 현상시키는 보편적 동분(무차별동분)은 하나의 업에 의해 초래된다. 즉 유부의 이론상 후생後生을 초래하는 업은 이숙과와 그 시기가 결정된 정업定業인데, 만약 하나의 업이 여러 생을 초래한다면 그 과보는 어느 생에서 낳아지게 될 것인가 하는 혼란이 야기된다. 또한 하나의 업은 한 가지 결과만을 산출하기에 다수의 업이 한 번의 생을 낳는다고 한다면 한 번의 생에 몇 번의 생사生死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녀·빈부·귀천 등 어떤 한 생의 내용을 구성하는 개별적 동분(유차별동분)은 다수의 업에 의해 초래된다. 다시 말해 한번의 생이라는 보편적 동분은 하나의 업에 의해 초래되지만, 그의 다양한 삶의 내용인 개별적 동분은 다수의 업에 의해 산출된다.
이같이 일생 즉 하나의 동분을 인기引起하는 하나의 업을 인업引業(구역에서는 總報業)이라고 하며, 한 번의 생을 여러 내용의 성질로 원만하게 장엄하는 다수의 업을 滿業(구역에서는 別報業)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그림을 그릴 때 한가지 색으로 윤곽을 잡은 후 다수의 색을 칠하여 그림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동분을 포함한 제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에서는, 마치 씨앗이 상속 전변하면서 그 세력의 차별에 따라 싹 줄기 등의 온갖 형태로 나타나듯이 업은 그 세력에 따라 상속 전변하며 차별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듯이 업은 그 세력에 따라 상속 전변하며 차별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의 업에 의해 다수의 생이 낳아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논거로써 아나율존자가 그 옛날 수행자에게 한 번 먹을 것을 베푼 공덕으로 삼십삼천에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 전륜왕이 되었으며, 마침내 석가족으로 태어나 온갖 쾌락을 향수하게 되었다는 경설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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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보를 낳는 시기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렇다면 업은 언제 그 과보를 낳게 되는 것인가?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그것을 낳게 하는 인연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한 나무에 맺힌 씨앗이라 할지라도 견실하고 열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시간에 싹트지 않으며, 설사 그 같은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조건, 이를테면 습도나 온도에 따라 일찍 싹트기도 하고 늦게 싹트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아마는 심은 지 세 달 반이면 그 결실을 맺지만, 보리는 여섯 달이 지나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업도 그 성질에 따라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업에는 그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이를테면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에 의해 일어난 업, 즉 극악과 극선의 마음에 의해 조작된 업이나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 불·법·승이나 번뇌를 끊은 성자 등에 대해 일으킨 업, 그리고 부모를 해코지하는 등의 업이 정업이다. 그리고 부정업은 강력한 세력의 업이 아니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시기뿐만 아니라 이숙과의 내용도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이는 전적으로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유동적인 업이다.
정업에는 다시 그 과보가 현생에 바로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또는 順現業)과,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또는 順生業)과,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또는 順後業)의 세 가지가 있다. 이 같은 논의는 대개 그들 교학의 필연적 귀결이거나 전설상의 에피소드에 기초하여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성자(아라한과 불환과)가 욕계의 번뇌를 모두 끊어 더 이상 그곳에 태어나지 않을 경우, 이전에 지었던 업은 현생에 그 과보를 모두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비구가 대중스님들에 대해 여인이라는 말을 하여 모욕을 줌으로써 그는 바로 여인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는 전설과 성불구자가 거세되는 소를 구해줌으로써 남근을 회복하였다는 전설을 통해 볼 때 뛰어난 복전福田-이를테면 부처를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와 멸진정·무쟁정無諍定·자비정으로부터 출정出定한 유정과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성자-에 대해 행해진 업과 강력한 염원에 의해 지어진 업은 현생에 과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현법수업이 '생'의 동분을 낳는 인업引業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업은 한 가지 과보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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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와 12연기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처럼 아비달마불교에서의 업은 객관의 기세간과 주관의 유정세간을 조작하여 성립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가 전후의 찰나로 간단없이 상속하는 것은 사실상 업의 상속일 따름이다. 우리는 선행된 행위를 근거로 하여 새로이 행위하며, 그 행위를 근거로 하여 다시 행위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 개인의 삶의 조건인 동시에 한 시대, 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나아가 한 세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조건이 된다.
업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생의 원동력이 된다. 만약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하면 어제와 오늘, 전 찰나와 후 찰나의 인과적 관계 또한 인정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결국 허무주의 내지 찰나주의의 단견斷見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제는 다만 어제였고, 오늘은 다만 오늘일 뿐이 것인가? 그리고 양자 사이는 어떠한 인과적 관계도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우연의 소산일 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오늘과 내일, 현세와 내세는 무엇에 의해 상속되는가? 우리는 대개 '나'를 통해 세계의 연속성을 확인한다. 어제의 행복했던 삶도 나의 삶이었고, 오늘의 절망스러운 삶도 나의 삶이다. 그리고 이 때의 '나'는 그 같은 온갖 경험을 향수享受하는 토대로서, 사실상의 어제의의 기쁨과 오늘의 절망, 어제의 젊음과 오늘의 늙음, 어제의 태어남과 오늘의 죽음과는 관계없는 개별적인 실체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불생불멸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것에 덧씌워진 기쁨과 절망의 현실은 다만 꿈과도 같은 무지의 환상일 뿐이기에 궁극적으로 그 같은 현실을 인정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결국 초월주의 내지는 영속주의의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유정의 세계는 다만 업의 유전流轉 상속일 따름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같이 죽음과 탄생의 끊임없는 순환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우리는 그 순환을 통해 수많은 세계, 이를테면 3계 5취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같은 윤회의 세계는 양면성을 지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업을 통해 태어나는 객관의 세계일 수도 있고, 업(경험)에 의해 드러나는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또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초월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업설의 연장일 뿐이다. 우리는 현생과 내생을 윤회할 뿐만 아니라 이 생 안에서도 윤회한다. 천상과도 같았던 어제의 열락은 오늘 문득 절망의 나락(지옥)으로 뒤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윤회의 세계는 바로 미혹(번뇌)에서 비롯된 없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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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전의 네 단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의 경험은 태어나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동안 한정된다. 좀더 소급한다면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라고도 하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잉태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다만 정자와 난자라는 물질적 존재의 지극히 우연적인 결합일 뿐인가? 아니며 그것과는 별도의 자아(혹은 영혼)가 존재하여 필연적으로 그것에 의탁하게 됨으로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전자에 따를 경우, 인간의 정신현상은 결국 물질의 부산물일 것이며, 자아라고 하는 것 역시 지성의 속성을 더한 육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럴 경우 육신의 소멸과 더불어 자아라고 하는 것 또한 사라진다. 그러나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육6신의 탄생이나 죽음과는 관계 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전자가 유물론적 경향의 단멸론斷滅論이라면, 후자는 영속적인 자아가 5화火 2도道에 걸쳐 윤회한다는 ≪우파니샤드≫의 상주론常住論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유정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이라는 네 자지 물질적 요소에서 생겨났기에 죽으며 지의 요소는 땅으로, 수의 요소는 물로, 화의 요소는 불로, 풍의 요소는 바람으로 돌아가며, 모든 감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죽어 상여에 싣고 화장터에 이르러 화장하면 한줌의 재만 남을 뿐이다.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죽으면 모두 괴멸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마치 풀벌레가 풀잎 끝에 다다르면 문득 다른 풀잎으로 옮겨가듯이, 아트만(자아)도 무명을 지닌 채로 이 육신을 떠나 다른 육신으로 옮겨간다. 마치 대장장이가 금붙이를 가지고서 이러저러한 온갖 장신구를 만들어내듯이 아트만도 무명을 지닌 채 온갖 존재의 모습을 취한다.


이 같은 문제는 생명현상의 시작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오늘날 새로운 윤리적 문제로 떠오른 낙태나 인공수정의 문제,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상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따른 안락사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유부아비달마에서 생명현상은 '목숨'을 의미하는 이른바 명근命根이라고 하는 불상응행법이 현상함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은 의식과 체온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어떤 유정이 일생 동안 유정으로서 보편성(즉 동분)을 지니게 하는 힘이다. 곧 인간의 보편성은 잉태되는 순간 획득되기 때문에 생명현상도 잉태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나(자아)'도 '나의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할 뿐이며, 전생에 지어진 업(즉 引業)에 따라 구체적 존재(사람 혹은 개의 동분)의 생명으로 현상한다.
유부에서는 유정의 생사유전의 사이클을 네 가지 단계로 분류하였다. 즉 생명이 현상하는 첫 순간을 생유生有라고 하였고, 현생의 최후순간을 사유死有, 그 사이를 본유本有, 그리고 사유와 생유의 중간을 중유中有 혹은 중간유中間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중유일 것이다. 중유란 어떠한 존재인가?


중유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의성意成이라고도 하며, 항상 생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구생求生, 향을 먹고 생존하기 때문에 식향신食香身(혹은 尋香, 혹은 간달바 gandharva)이라고도 하는데, 유부 비바사사들은 죽음과 새로운 잉태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로서 이 같은 존재를 요청하였고, 경전상에 설해진 사례를 논거로 삼아 그들 자신의 교학체계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가을에 죽은 식물은 씨앗에 의해 상속되어 봄에 다시 발아하듯이, 유정 역시 이 생에서 죽은 후 다음 생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중간에 어떤 존재에 의해 찰나에 걸쳐 상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유이다. 그리고 경전상에서도 중유를 5취유趣有·업유業有와 더불어 7유有의 하나로 설하고 있으며, 또한 부모의 교합과 어머니의 정수精水와 더불어 잉태의 한 조건으로, 또한 5종불환不還의 하나로, 5종불환을 다시 세 종류 일곱 갈래로 분류한 7선사취善士趣의 하나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유는 미래에 태어날 본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그 형상은 본유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으며, 그들의 눈과 천안天眼에 의해서만 보인다. 또한 업의 힘이 매우 강성하여 세존이라 하더라도 능히 그 행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태생과 난생의 경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지라도 미래 자신이 태어날 곳에서 부모가 교합하는 것을 보고는 전도된 마음을 일으켜 바로 달려갈 수 있다.


즉 남성의 중유라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욕을, 아버지에 대해서는 진에를 일으켜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 미워하는 이의 그것을 자신의 존재로 여기고 기뻐한다. 이 때가 바로 중유가 몰하고 생유가 일어나는 잉태(이를 結生이라 함)의 순간인데, 이에 따르는 한 부모의 정혈精血은 다만 생유의 조건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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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아론과 윤회상속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처럼 유정은 네 단계의 사이클을 통해 끝없이 윤회 전생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생으로의 출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삼세실유 법체향유'라는 유부의 교학을 글자 뜻대로만 이해하여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실재하며, 그 사이로 제법이 관통하여 유전 상속한다고 생각하듯이, 윤회 또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자아(혹은 영혼)는 계속 존재하여 이전 생에 쌓은 업에 따라 지옥에서 천계에 이르는 3계 5취를 관통하며 유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누이 언급하였듯이 초기불교 이래 무아의 이론은 무상의 이론과 함께 교학의 전제였다. 실체로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자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찰나에 생성 소멸하는 5온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5온의 변화가 시간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며, 그 같은 존재를 다만 자아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할 때 다시금 소박하게 이같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실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으며,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어머니의 탯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나아가 누가 행위하며, 누가 그 과보를 받는 것인가? 마땅히 그 같은 생사윤회의 주체로서, 행위하고 향수하는 주체로서 영속적인 자아가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5온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불교에 있어 윤회란, 마치 풀벌레가 이 풀에서 저 풀로 옮겨가듯이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5온이 찰나 생성 소멸함으로써 전이轉移 하는 현상을 말한다.
앞(2장 5절 '제법의 삼세실유')에서 비유한 것처럼 스크린에 비친 영상의 변화는 한 장의 필름이 전이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필름(1초에 24장)이 찰나 찰나에 걸쳐 생성 소멸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일련의 현상에 대해 하나의 제목, 이를테면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고 이름 짓지만 사실상 그 어떠한 필름에서도 그 같은 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다만 그 모든 필름들에 대해 일시 설정한 제목일 따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윤회는 자아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5온 자체가 전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5온은 찰나에 소멸하기 때문에 후세에 이를 수 없다. 전 찰나의 5온을 상속하며 후 찰나의 5온이 일어나고, 다시 이를 상속하며 새로운 5온이 일어난다. 이같이 각각의 5온이 찰나에 생성 소멸함으로써 이 생에서 저 생으로의 일련의 전이가 이루어지며, 자아란 그 같은 5온에 대해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라 일시 칭명한 것에 불고하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의 5온에도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사론≫에서는 등불의 예를 들고 있다. 등불의 불꽃은 단일하며 또한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찰나찰나에 소멸과 생성을 되풀이하며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다. 혹은 이 등불에서 저 등불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러나 등불의 불꽃이 그렇게 상속 전이하는 것은 '등불'이라는 영속적인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불꽃의 타오름을 다만 등불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불꽃과는 다른 별도의 등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강은 단일하고 지속적이지만-예컨대 진주의 남강은 5백년 전 논개가 몸을 던질 때에도 남강이었고 지금도 남강이지만-현실에서의 강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강은 찰나찰나에 걸친 강물의 흐름일 뿐이고, 그 같은 흐름을 배제한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등불이나 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꽃의 타오름을 가능하게 하고, 강물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영속적이고도 실체적인 존재로서의 그것을 부정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생의 흐름(5온의 상속)을 떠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 일컬어지는 ≪아함≫의 한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업과 그 과보는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온이 멸하고 다른 온이 상속할 뿐이니, 일시 개념적으로 칭명된 자아는 예외로 한다.:
세친世親은 ≪구사론≫ <파아품破我品>에서 유아론자인 승론勝論(Vaisesika)학파의 논사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대론對論하고 있다.

  승론: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업을 짓는 것인가?
  세친: 내가 응당 고락苦樂의 과보를 향수하기 때문이다.
  승론: 그 때 '나(我)'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친 :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아관념 즉 아집我執의 대상일 뿐이다.
  승론: 무엇을 자아관념의 대상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세친: 이를테면 제온諸蘊의 상속이다.
  승론: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세친: '나'라고 하는 관념은 제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희다'는 등의 지각과 더불어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에서 '나는 희다' '나는 검다' '나는 늙었다' '나는 젊었다' '나는 야위었다' '나는 뚱뚱하다'고 말한다. 즉 현실적으로 '희다'는 등의 지각과 자아관념은 동일한 공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자아 또한 결코 지각과 차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아관념은 다만 제온을 조건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중략)
  승론: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고 하는 관념은 누구의 것인가?
  세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즉 이 때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은, 이를테면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소'라고 하듯이 다만 관념을 부리는(일어나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관념을 낳는 원인(즉 제법)이 관념의 주인이라고 할 것인가?


자아란 다면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서, 그 같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란 다만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비록 무아이지만 번뇌와 업의 의해 중유의 제온이 상속하여 어머니 탯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타는 것이 아니라 타는 그것을 일컬어 불이라 하며, 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을 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응당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아의 경우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문제이고, 기나긴 윤회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기성에 따른 탐욕과 집착, 그리고 언어적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리한 통찰과 그에 다른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사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다만 개념적 이해일 뿐 그에 따른 삶의 질적 변화는 초래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우리 범부들을 대개 드러난 현실만을 알며, 거기에 묶여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금의 나의 생각과 사랑을 나의 모든 것이라 여긴다.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진실하다고 여긴다. 또한 세친의 예리한 분석대로 여기서 '나'란 그 같은 생각과 사랑을 일으키는 원인의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사랑을 일으키는 원인은 '나'인가? 우리는 차마 생각하기 싫은 것도 생각하며, 사랑하고 싶어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기도 한다. 왜일까? 그것은 생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사랑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과 사랑은 수많은 조건 즉 제법諸法의 산물이다.

파구나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랑(愛)하는 자에 대해 설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사랑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면 그대는 마땅히 '누가 사랑하는가?'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조건(인연)으로 하여 사랑이 있게 된 것인가?'라고 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응당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사랑이 있으며, 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집착(取)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생각과 사랑에 실체성은 없으며, 나의 생각도 나의 사랑도 아니다. 또한 영속적이지도 않으며 단일하지도 않다. 어제의 행복하였던 마음은 오늘 절망의 마음으로 변하기도 하며, 어제의 사랑은 오늘 미움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생각, 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거기에 집착하고 도한 절망한다. 그리고 그에 다른 또 다른 번뇌와 업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또 다른 세계로 윤회한다.
세친은 ≪구사론≫ <파아품> 첫머리에서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유아론有我論에 따르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한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끝없이 유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와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고 있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자는 대아大我이며, 후자는 소아小我라고, 혹은 전자는 보편적인 자아이고 후자는 개별적인 자아라고, 그렇다면 이같이 모순된 두 자아가 어떻게 서로 양립될 수 있을 것인가? '존재론과 윤리학은 양립된 수 없는 것인가?'-고래로 철학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왔지만, 그러나 적어도 불타에 의하는 한 그것은 희론이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영속 단일 보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보편성(同分) 내지 언어(名)라고 하는 개별적 존재(즉 법)가 관계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비롯한 그 같은 보편의 존재는 다만 미망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중생)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작자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생겨났으며, 죽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바로 악마의 견해
  그것은 다만 몇 가지 허망한 요소의 집합일 뿐, 거기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여러 부품이 화합한 것, 세간에서는 그것을 일컬어 수레라고 하듯이
  온갖 온이 인연에 따라 화합한 것, 그것을 이시 인간이라 이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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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리적 과정으로서의 유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렇다면 자아로 일컬어지는 5온의 상속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생·노·병·사로 규정하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생유·본유·사유·중유의 4유로 규정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일반 범부들의 삶은 사실상 사회제도를 통해 규정된다.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의 과정을 거친 다음 대학에 진학한다. 오늘날 대학은 어떤 한 사람의 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러나 찰나찰나에 행해지는 모든 업은 그 사람의 생을 결정짓는 조건이 된다. 한 찰나의 생각이, 한편의 비디오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며, 이후 생의 대부분을 경제적 활동으로 영위하다가 은퇴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년을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 같은 각각의 과정을 거치면서 행과 불행, 고통과 즐거움을 경험하며, 그것을 통해 미래의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그러한 생의 과정을 생리적 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물론 경설經說에 따른 것으로, 단계의 첫 번째는 잉태로부터 시작한다. 즉 모태 속에서는 잉태 후 첫 7일간의 응혈의 단계(?邏藍, kalalam, 凝滑), 그것이 엉키기 시작하는 두 번째 7일간의 단계( 部曇, arbuda, 胞), 피와 살이 응키게 되는 세 번째 7일간의 단계(閉尸, pesi, 血肉), 살이 굳어지는 네 번째 7일간의 단계(鍵南, ghana, 堅肉), 사지의 마디가 형성되는 다섯 번째 7일부터 38번째 7일까지의 단계(鉢羅奢 , prasakha, 支節)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태내胎內 5위位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후에는 6세까지의 어린이(孀孩)의 단계, 15세까지의 청소년(童子), 30세까지의 젊은이(少年), 40세까지의 중년(盛年), 그리고 41세 이후의 늙은이(老年)라는 다섯 단계로 상속 증장하는데, 이를 태외胎外 5위하고 한다.
이 같은 유전의 과정은 물론 당시 의학적인 상식과 사회적 관례에 따른 분류이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같이 변화 상속하는 과정상에서 그에 따른 번뇌와 업을 일으켜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쳐오면서 쌓아온 업력으로 인해 범부로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유전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같은 생의 과정을 통해 산출한 번뇌와 업에 따라 또 다른 생이 낳아지고, 그 생에서 다시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끝없는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번뇌와 업을 소멸하지 않는 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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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연기의 유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그런데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불타의 12연기설 역시 이 같은 5온 상속의 한 형태로 이해하였다. 즉 그들은 12연기를 앞서 언급한 4유설과 태내胎內 태외胎外의 5위설과 결부시켜 번뇌와 업에 따라 과거 생으로부터 현재 생을 거쳐 미래 생에 이르는 윤회의 과정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기緣起는 불타 깨달음의 본질로 설해지고 있다.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계에 상주하는 것으로, 여래는 그것을 깨달아 정등각正等覺을 이루었다.'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자 연기를 보는자이다.' 혹은 여래는 12연기의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을 관찰하여 정등각을 성취하였다고도 하며, 정등각을 성취하고 나서 법락을 즐기며 이를 관찰하였다고도 한다.
연기(pratitya samutpada)란 '∼을 연緣으로 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일체의 세계는 다양한 원인과 조건을 인연으로 하여 성립한다는 말이다. 인간존재나 그를 둘러싼 세계는 다같이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하여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 곧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6처處가 있으며, 6처를 조건으로 하여 촉觸이 있으며, 촉을 조건으로 하여 수受가 있으며, 수를 조건으로 하여 애愛가 있으며, 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取가 있으며, 취를 조건으로 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를 조건으로 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老死가 있으며, 나아가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이 있다.

이것이 초기경전상에서 설해지는 12연기의 기본형식이다. 혹은 때에 따라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가 있으며, 유를 조건으로 하여 생이 있으며, 나아가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이 있다'는 식으로 현실사태의 조건을 소급해 올라가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같은 12연기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각각의 지분支分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어떠한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중차대한 의미가 있기에 이를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 같은 의문은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12인연법을 널리 설하고 나자 아난다가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비구니들을 위하여 깊고도 깊은 인연법을 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건대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12인연은 너무나도 깊고도 깊어 일상의 인간들로서는 능히 밝게 깨달아 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연법이 깊지 않다고 하는 것은 비단 오늘의 너뿐만이 아니다. 옛날 수염須焰이라고 이름하는 아수라의 왕이 있어 저 바다 밖으로 나아가 해와 달을 붙잡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변화시켜 바다로 들어가니 물이 허리에 찼다. 그것을 본 그의 아들 구나라拘那羅도 함께 따라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바다에 들어오려 하지 마라. 이 바다는 너무나도 깊고도 깊어 너는 결코 목욕할 수 없다. 바다에서 목욕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그렇다. 그 때의 왕은 바로 나였고, 아들은 너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12인연의 깊고도 깊은 법을 그렇지 않다고 하는구나! 결국 중생이 생사윤회에 빠져 허덕이는 것은 12인연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것은 너무나 깊고도 깊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능히 선창宣暢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아난다여, 그 깊이를 능히 잘 헤아려 12인연법을 받들어 지녀라.(필자초역)

흔히'심심甚深'으로 번역되는 gambhira는 이를테면 투명한 호수의 깊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다처럼 깊고도 깊지만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바닥이 손에 닿을 듯이 떠올라 보이고 그래서 얕게 보이는 것이다. 대저 진리란 투명한 것이며, 그러기에 또한 참으로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원리의 법설法說에 대해 의설義設로 일컬어지는 각 지분의 뜻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경전상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무명'은 과거·현재·미래, 내외, 업과 그 과보, 불·법·승의 3보, 고·집·멸·도의 4제, 원인과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법, 그리고 선·불선 등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다.
'행'은 신身·어語·의意의 3업이다.
'식'은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의 6식신識身이다.
'명색'의 경우, 색은 색온을, '명'은 그 밖의 4온을 말한다.
'6처'는 안眼 내지 의意의 6내입처이다.
'촉'은 근·경·식의 화합으로, 안촉 내지 의촉의 6촉신觸身을 말한다.
'수'는 고苦·락樂·불고불락不苦不樂의 3수이다.
'애'란 욕애欲愛·색애色愛·무색애無色愛의 3애이다.
'취'는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어취我語取의 4취이다.
'유'는 욕유欲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의 3유이다.
'생'이란 5온이나 명근 등을 획득하는 것이다.
'노사'는 늙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뜻을 지닌 12가지의 연기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무명이 있으므로 행 즉 행위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망과 그에 따른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뭔가 행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다'는 것이나 '식이 있으므로 명색의 5온이 있다', '명색이 있으므로 6처가 있다', 나아가 '유有 즉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의식이 있기 때문에 행위하는 것이고, 의식은 6처(감관)와 명색(대상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다. 앞서 누누이 언급한 대로 불교에 있어 의식은 결코 그 자체로서는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감관과 대상에 근거하여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존재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12연기를 시간적인 계기繼起의 관계가 아니라 논리적인 상관관계의 귀결로서 파악하기도 한다. 예컨대 2장 2절에서 인용한 경문에서처럼 "안근과 색경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는데, 이 세 가지의 화합이 '촉'이며, 이와 동시에 수·상·사가 함께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식·명색·6처·촉·수는 원인과 결과로서의 시간적 계기관계가 아니라 상호 조건이 되는 동시적 관계라는 것이다.
혹은 연기설은 12지支 뿐만 아니라 '애'에서 시작하는 5지支 연기, '6처'에서 시작하는 8지 연기, '식'에서 시작하는 10지 연기 혹은 '행'에서 시작하는 11가지 연기가 있기 때문에 12연기를 다만 연기의 완성형태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할지라도 '애' 내지 '행'은 무엇에 의해 생겨나며, 나아가 '무명'은 다시 무엇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가? 초기 불교의 연기설이 다만 모든 존재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체 유정이 경험하는 생과 노사의 근거를 밝힌 것이라고 하는 이상 이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되며, 아울러 불교가 단멸론이 아닌 이상 노사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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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연기의 유전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이상과 같은 어려움에 따라 아비달마불교에서는 12연기를 찰나刹那·원속遠續·연박連縛·분위分位라는 네 가지 형태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찰나연기란 일 찰나중 이러한 12지가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탐욕에 의해 살생을 하였다고 할 때, 업을 발동시키려는 어리석음이 '무명'이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작용이 '행'이며, 온갖 대상에 대해 인식 식별하는 것이 '식'이며, 식과 동시에 생겨나는 상·행온과 색온이 '명색'이며, 명색이 머무는 감각기관이 '6처이며, 6처가 그 대상과 그에 따른 식과 화합하는 것이 '촉'이며, 촉을 지각하는 것이 '수'이며, 수에 대한 탐욕이 '애'이며, 이와 상응하는 온갖 번뇌(무참·무괴·악작·睡 ·도거·혼침·忿·覆·嫉·?의 10纏)가 '취'이며, 취에 의해 일어나는 신身·어語의 표업과 무표업이 '유'이며, 이와 같은 제법의 생기가 '생'이며, 변이와 괴멸이 '노사'로서, 이러한 모든 법은 시간적인 전후 관계로서가 아니라 동시찰나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원속연기란 이러한 12지는 여러 생에 걸쳐 시간을 건너뛰어 상속한다는 것으로, 아득히 면 과거의 무명과 '행'에 의해 '식' 등의 현생의 결과가 초래되고, 현생의 '유'에 의해 아득히 먼 미래세의 생과 노사가 초래된다는 순후수업順後受業의 연기를 말한다. 이에 반해 연박연기란 12찰나에 걸쳐 동류同類와 이류異類의 인과로서 연이어 상속 계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분위연기란 이러한 12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에 걸쳐 무간에 5온이 상속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지는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지만 두드러진 상태(分位)에 근거하여 각각의 지분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무명이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무명'이라 하고, 노사가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노사'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유부에서는 이 중에서 분위연기설을 불타의 정설로 취하였고,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였다. 곧 세존께서는 '과거·현재·미래세에 나는 존재하는가?(혹은 존재하였던가? 혹은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존재,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유정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12연기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한 온갖 형태의 연기설은 유정의 근기에 따른 것으로, 아비달마에서는 삼세에 걸쳐 인과 상속하는 유정의 존재본성을 밝히기 때문에 오로지 12연기만을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분위연기설에 따를 경우 12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무명이란 과거 생에서 일어난 온갖 번뇌로서, 중유의 최후찰나를 거쳐 현생의 의식으로 잉태되기 전까지의 5온을 말한다. 죽 일체의 번뇌는 무명과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과거 생에서의 온갖 번뇌를 '무명'이라 이름한 것이다.


행行이란 과거 생에서 지은 선악의 온갖 업으로서, 현생에 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의 5온을 말한다. 그러나 현생의 업은 아직 결과를 완전히 낳지 않았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두 가지 원인이다.


식識이란 모태 중에 잉태되는 찰나의 5온으로, 이 순간에는 5온 중에 '식'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 연기의 한 갈래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명색이란 잉태 이후 6처가 생겨나기 전까지의 5온으로, 갈라람·알부담·폐시·건남과, 발사라가의 일부인 태내의 5위를 말한다.
6처란 안근 등이 생겨나면서부터 근·경·식이 화합하기 전까지의 5온으로, 잉태 중의 다섯 번째 단계인 발라사가를 말한다.


촉觸이란 근·경·식이 화합하고 있을 지라도 아직 괴로움이나 즐거움의 지각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의 5온으로, 이러한 상태는 말하자면 태어나서부터 3∼4세까지의 단계이다.


수受란 괴로움 등의 지각은 생겨났으나 아직 애탐을 일으키기 않은 상태의 5온으로, 5∼7세로부터 14∼15까지의 단계를 말한다. 그리고 '식'으로부터 '수'에 이르는 5지支는 과거 생에 지은 두 가지 원인(즉 '무명'과 '행')에 의해 초래되는 현재 생에서의 결과일 따름이다.


애愛란 의복 등의 물자와 이성異性에 대한 애탐이 생겨났지만 아직 널리 추구하지 않는 상태의 5온으로, 16세 이후로부터 성년기에 이르기 전까지의 단계를 말한다.


취取란 애탐이 증가하여 애호하는 온갖 물자와 이성을 추구하는 상태의 5온으로, 이는 성년기에 해당한다. 앞의 '애'가 처음 일어난 탐이라면 '취'는 그것이 강력해진 것으로, 여기에는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어취我語取 네 가지가 있다. 따라서 '애'와 '취'는 번뇌로서, 사실상 과거 생에서의 '무명'과 동일한 것이다.


유有란, '취'에 따라 미래존재(이를 當有라고 한다)를 낳게 되는 업을 조작하는데, 이러한 업이 집적된 상태의 5온을 말한다. 즉 이것에 의해 '생'이라고 하는 미래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유'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은 과거 생에서의 '행'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


생生이란 전생의 업 즉 유有에 의해 초래되는 미래 생의 첫 찰나의 5온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사실상 현재 생에서의 '식'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를 '식'이라 하지 않고 '생'이라고 이름한 것은 미래세의 과보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미래세 중에서는 '태어나다'고 하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생에서는 의식의 작용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생'이라고 하지 않고 '식'이라고 하였다.


노사란 태어남과 더불어 이전 생에서 지은 업(즉 '유')에 의해 수동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로, 그런 점에서 현재 생에서의 명색·6처·촉·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를 다만 '노사'라고 이름한 것은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심의 마음을 낳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12지支의 관계를 다시 요약하며,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재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이상 과거·현재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재 생에서 짓는 미래 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재·미래의 인과). 이처럼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12연기설을 삼세에 걸친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삼세에 걸친 인과적 관계를 떠나 실제적인 작용관계로 본다면 '애'와 '취'는 번뇌이기 때문에 '무명'에 해당하고, '유'는 업이기 때문에 '행'에 해당하며, 미래 생의 첫 찰나 5온인 '생'은 '식'에, '노사'는 '명색'에서 '수'에 이르는 4지支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록 12지만을 설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없는 생사의 윤환적輪環的 과정은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끝없는 생사의 윤환적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12가지를 각기 번뇌(惑)와 업業과 괴로움의 현실(事)로 분별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괴로움으로 표상되는 생멸의 세계는 업에 의해 초래되며, 업은 번뇌로부터 비롯된다. 즉 현재 생의 원인이 되는 '무명'과 미래 생의 원인이 되는 '애'와 '취'는 번뇌를 본질로 하고, 현재 생의 원인이 되는 '행'과 미래 생의 원인이 되는 '유'는 업을 본질로 하며, 현재 생의 식·명색·6처·촉·수와 매래 생의 '생'과 '노사'는 괴로움을 현실 즉 결과이다. 따라서 과거 생의 번뇌와 업인 '무명'과 '행에 의해 연재 생의 '식' 등의 5과果가 생기며, 현재 생의 번뇌와 업인 애·취와 유有에 의해 미래의 생의 '생'과 '노사'가 생기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무명'의 원인은 무엇이고, '노사'는 또한 무엇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 분위연기설에 따라 '무명'은 번뇌이고, '노사'는 괴로움의 현실이라고 설명한 이상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현재 생에서 '식' 등의 5과를 근거로 하여 '애'와 '취'의 번뇌가 낳아진다고 하였기 때문에 '노사'는 또 다른 번뇌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번뇌로부터 번뇌(이를테면 애→취)와 업(취→유, 무명→행)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현실의 괴로움(행→식, 유→생)이 생겨나며, 현실의 괴로움으로부터 다시 현실의 괴로움(식→명색 내지 촉→수, 생→노사)과 번뇌(수→애)가 생겨나기 때문에 번뇌인 '무명'은 현실의 괴로움(노사)과 번뇌를 원인으로 하며, 현실의 괴로움인 '노사'는 현실의 괴로움과 번뇌(무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의 원인과 '노사'의 결과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더라도, 이 같은 12지 만으로도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상속하는 윤회의 세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원인(2)............................ 현재의 원인(3)

원인

惑(3)

 ①無明........................................ ⑧愛 → ⑨取 → ①무명

業(2)

 ②行............................................... ↑..... ⑩有

결과

事(7)

 ③識 → ④名色 → ⑤6處 → ⑥觸 → ⑦受.... ⑪生 → ⑫老死

 

 

 ...현재의 결과(5) ......................................미래의 결과(2)

인도의 어떠한 철학 종교사상에 있어서도 윤회 전생하는 인간의 괴로운 삶을 규정짓는 일차적 근거는 어떤 선험적 원죄가 아니라 자신의 업이다. 그리고 그 같은 업을 낳게 하는 다시 말해 인간의 괴로운 삶을 규정짓는 이차적 근거는 바로 번뇌(혹은 무지와 욕망)로서, 이는 인도 철학의 기본적인 논의의 패턴이다.
아비달마불교의 경우에도 예컨대 '종자로부터 싹과 앞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로부터 업과 현실의 괴로움이 생겨나며, 용이 못을 지키면 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 것처럼 번뇌가 업을 지키면 생은 끝없이 상속하며, 잡초는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베어도 베어도 다시 돋아나는 것처럼, 번뇌도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며 생의 싹은 다시 생겨나게 된다.

 

 또한 나무의 줄기로부터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로부터 번뇌와 업과 현실의 괴로움이 자꾸자꾸 생겨나며, 겨가 벼를 싸고 있어 능히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처럼 번뇌가 업을 싸고 있어 또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현생의 괴로움과 업과 번뇌, 이 세 가지는 상호 윤환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업의 근거는 번뇌이며, 그 결과가 괴로움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다시 번뇌를 일으키고, 이를 원인으로 하여 업이 낳아지며, 이것에 의해 다시 괴로움의 세계가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번뇌와 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현실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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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연기와 유자성有自性

 

아비달마불교/권오민 저/민족사/2003.3.25

 

12연기를 삼세 양중의 인과설로 해석한 이 같은 논의는 전통적으로 '삼세인과'의 중요한 논거가 되었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다만 상의상관성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라거나(字井伯壽), 혹은 찰나생멸의 법칙 (木村太賢)으로서 12연기의 범주가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세인과의 결정적 경증經證인 '식識의 수태설受胎說'마저 근기에 따른 통속적인 방편설 내지는 후세 부가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 같은 주장은, 인식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근대의 철학적 입장에 기초한 것이지만, 사실상 일체개공一切皆空을 해석하는 대승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공간적인 동시 병존의 관계로,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시간적인 계기관계라고 하여 절충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친에 따르면,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유고피생此生故彼生'의 양 구는 12연기의 각 지분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헌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는 앞의 구절에 기초한 법문이고 '무명을 떠나 행은 있을 수 없다'는 뒤의 구절에 기초한 법문이라는 것이다.


용수龍樹에 의해 대성된 대승의 공사상은 연기를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서 연기는 철저하게 일체 제법의 상의상관성을 말한다. 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감각과 언어적 개념을 통해 세계를 분별함으로써 어떤 한 사물에 대해 다른 것과는 차별되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집착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분별을 통해 그렇게 드러난 것일 뿐, 실상은 어떠한 차별도 없다. 인간의 사유분별에 의해 차별된 일체의 세계는 마치 눈병이 난 이에게 보여지는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실상이 아니다. 예컨대 눈병이 없는 이는 환상이 존재한다는 판단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것이 없다는 의식마저 초월하듯이, 세계의 실상은 유무를 초월하는 것으로, 일체는 무차별이며, 공空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분별의 대상이 되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혹은 밝음과 어두움, 열반과 생사, 출가와 재가는 각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밝음이란 말하자면 어두움이 해소된 상태이며, 어두움이란 밝음이 결여된 상태이다. 따라서 어두움을 전제로 하지 않은 밝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밝음이 배제된 어두움은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속을 떠나 열반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근거로 삼기 때문에, 다시 말해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며, 따라서 공이다.


이른바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드러나는 이 같은 대승의 진리관에서 본다면, 앞서 분별하였던 5온도, 12처도, 18계도, 12연기의 유전과 환멸도, 나아가 세속의 고苦와 열반의 고멸苦滅을 설한 4성제도 허망한 것일 따름으로, 이는 바로 우리가 주문과도 같이 외우는 270자 ≪반야심경≫의 내용이기도 하다.


용수에 의하는 한 어두움(無明)이 해소된 상태가 밝음(明)이며, 밝음이 결여된 상태가 어두움이기 때문에 양자는 상의상대相依相待의 연기적 존재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을 갖지 않는다. 세속과 열반의 경우 역시 그러하며, 공이라고 하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친구(mitra)와 대립하는 원수(amitra, 친구 아닌 이)가 친구 이외 다른 모든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 아닌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듯이, 진리의 말씀을 '진실'이라 할 때 이와 반대되는 거짓의 말(虛狂語)을 '비진실'이라고 하지만, 이는 진실 이와의 일체의 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의 부재도 아니듯이, 무명 또한 명이 아닌 것도, 명의 성질이 결여된 것도 아닌 명에 반대되는 실유의 개념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잇다'고 하였을 때, '이것'에 의해 드러나는 '저것' 역시 실유로서, 이는 세간상식에 속한다. 즉 실재하는 어떤 것이 타자를 인연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그럴 때 타자는 다만 생기의 조건일 뿐 존재 자체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일체는 타자의 근거하여 생겨났기에 무자성 공이라고 한다면, 일체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무無인가? 그럴 경우 무인론無因論에 떨어지고 만다.
나아가 자아뿐만 아니라 객관의 모든 존재(法) 또한 공이라고 한다면, 공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실상 일체는 비존재로서, 어떠한 우열의 차별도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예컨대 '석녀(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들이 용감하다'고 할 수 없듯이 열반 또한 청정하다고도 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불타가 그것을 설하였다면 그는 다만 중생을 현혹하는 자일 따름이다.
유부에 있어12연기 각각의 지분支分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그것은 오로지 유정이 경험하는 생사윤회의 조건, 즉 번뇌와 업의 인과상속을 해명하는 양식이었다. 불타는 무아를 설하였지만 결코 업 부정론자(akriya vadins)가 아니었으며, 무상의 찰나멸을 설하였으나 결코 단멸론자(uccheda vadins)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과거 생으로부터 현재 생으로, 현재 생에서 다시 미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작자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생겨났으며, 죽어 어디로 갈 것인가?' 12연기는 바로 이에 대한 해명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부에 의하는 한, 불타는 '과거·현재·미래세에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유정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12연기를 설하였다. 곧 그들은 유정의 존재근거를 자아가 아닌 삼세에 걸친 5온의 인과상속으로 이해하였고, 12연기 역시 이에 따른 분위연기설로 해석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12연기설은 결국 무아설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를 이체 제법의 상호관계성으로 해석하여 자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무자성 공을 주장하든, 다만 유정의 조건인 5온의 인과상속으로 해석하여 자아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같이 각각의 지분이 두드러진 상태인 5온만은 실재한다고 주장하든 그것들은 모두 불타 깨달음에 기초한 후세 해석의 한 갈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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