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7. 왜 그리고 언제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5:12
 

 

 

7. 왜 그리고 언제


이제 다음 질문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위해서 오취온에 대해서 명상하는가?' 또 시간적으로 '오취온에 대해서 언제 명상하는가? 사라질 때인가, 나타나기 전인가, 아니면 생길 때인가?'


무엇을 위하여 명상합니까? 세속적으로 부자가 되려고 오취온에 대해서 명상합니까? 병을 치료하기 위함입니까? 투시력을 얻기 위함입니까? 공중부양이나 신통력을 얻기 위함입니까? 위빠싸나 지혜는 이런 것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명상 수행의 결과로 위독한 병이 나은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부처님 시절에 위빠싸나 수행을 완성한 성인들은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현대인들도 수행을 완성하면 그런 능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을 갖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가 버린 과거의 현상에 대해서 명상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명상해야 할까요? 지금 현재의 현상에 대해서 명상해야 할까요? 아니면, 과거도 아니고, 미래나  현재도 아닌, 우리가 책에서 읽은 대로 상상하는 현상에 대해서 명상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명상하고,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명상한다.'


그렇습니다. 명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고 듣고 만지거나 알게 되는 순간 일어나는 마음과 물질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마음과 물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갈애로 집착합니다. 그들은 마음과 물질을 영원하고 행복하고 나 혹은 자아라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집착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명상합니다. 이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명상합니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나 혹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제적인 위빠싸나 수행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추론적으로 수행한다면, 과거나 미래나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명상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에는 실제적인 것과 추론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여, 무상 등의 고유한 특성이나 개별적 특성을 경유하여 얻은 지혜는 실제적인 위빠싸나 지혜입니다. 이런 실제적인 지혜로부터, 수행자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과거나 미래의 무상이나 고를 추론합니다. 이것이 추론적 위빠싸나 지혜입니다.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 두 가지 모두, 대상을 따라서 유사하게 결정된다.......'

[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 Magga)]


청정도론(淸淨道論)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따라서, 즉 보여진 대상을 뒤쫓아감에 의해,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 두 가지를, 보여진 것과 같은 고유한 본성이 있는 것으로 시각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해체된 복잡한 것은 미래에도 해체될 것이다.'

(청정도론, 786)


'보여진 대상'은 실제적 위빠싸나 지혜입니다. '보여진 대상을 뒤쫓아감에 의해,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 두 가지를, 보여진 것과 같은 고유한 본성이 있는 것으로 시각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해체된 복잡한 것은 미래에도 해체될 것이다.' - 이것은 추론적 위빠싸나 지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론적 위빠싸나 지혜는 실제적 위빠싸나 지혜를 얻은 다음에만 가능합니다. 우선 현재를 알지 못하면 추론할 수 없습니다. 논사(論事, Kathaavatthu)의 주석서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의도[行, formation]를 주시하여 무상을 보면,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것에 대해서도 '모든 의도는 무상하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 우리들은 과거나 미래의 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수행자가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게 하지 않고, 수행자를 번뇌로부터 정화시켜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전생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바로 직전의 전생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이번 생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대해서 명상한다면, 어떻게 사물의 특성과 기능을 통해서 실재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알 수 있겠습니까? 보다 가까운 과거의 일은 회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수행자는 과거를 회상할 때,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 때 본 것은 '나'였고, 지금 보는 것도 '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에게 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영원이나 행복에도 '나'의 개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이미 그것들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 집착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배우고 생각한 것을 총동원하여 그것들을 마음과 물질로 볼지라도, 수행자가 이미 '나'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나'라는 개념은 존속합니다. 수행자가 입으로는 '무상'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붙잡고 있습니다. 고통을 주시하지만, '행복'이라는 개념이 계속 나타납니다. 무아에 대해서 명상하지만, '나'라는 개념이 강력하고 확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과 갈등합니다. 결국에 가서는 수행자의 명상이 자신의 선입관에 굴복하고 맙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그 때에 가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 미리 명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순간에는 명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갈애와 잘못된 생각과 번뇌가 새로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생각으로 미래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은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를 잠재우는 방법도 아닙니다.


시간이 정해 있지 않은 것은 수행자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존재한 적이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존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과 생각으로 상상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목소리는 크고 지성적인 것 같지만, 숙고해 보면 단지 명칭과 간판과 형상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은 매순간 일어나고 매순간 사라진다'라고 명상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것은 무슨 물질입니까? 그것은 과거의 물질입니까, 현재의 물질입니까, 미래의 물질입니까? 자신의 물질입니까, 다른 사람의 물질입니까? 자신의 물질이라면, 그 물질은 머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몸, 팔다리, 눈, 귀, 어디의 물질입니까?' 수행자는 물질이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단순히 개념이라는 것, 명칭과 개념 등의 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정해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명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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