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16. 진전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5:22
 

 

 

16. 진전


성자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위빠싸나 길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빠싸나 길은 마음과 물질에 대한 분석적인 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수행자는 조건을 식별하는 지혜에 도달합니다. 그리고서 계속 노력하면 현상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획득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서 숙고하고 조사하는데, 많이 배운 사람들은 숙고하고 조사하는데 특히 오랜 시간을 소비합니다. 숙고하거나 조사하고 싶지 않다면 계속 명상해야 합니다. 이제 앎은 경쾌하고 재빠르게 됩니다. 수행자는 주시되는 사물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아주 분명하게 봅니다. 이제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쉽게 주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영, 기쁨, 평온이 나타납니다. 전에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을 경험함에 따라 수행자는 기쁨과 행복에 전율합니다. 수행 초기에 수행자는 마음을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게 하려고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망상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할 수 없었습니다. 주시는 좋아진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강한 신뢰와 확고한 의도 및 결심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주시는 쉽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시하기 좋고, 찬란한 빛도 나타납니다. 기쁨이 온몸을 휩싸고 일종의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아주 안락하게 느낍니다. 주시되어야 할 대상이 스스로 알아차려지는 것 같습니다. 알아차림의 입장에서는 알아차림이 스스로 대상에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주시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주시하기에 실패한다든지 잊어버리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만약 수행자가 어떤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숙고하려고만 하면 아주 쉽고도 간단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에 관해서 무상 고 무아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용이하게 식별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법문하고 싶어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대단히 훌륭한 법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육받지 않았다면 아주 형편없는 법사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문하고 싶어한다면 아주 말 많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자들이 경험하는 소위 '관념적인 닙바나(the ideal Nibbana)'입니다. 그것을 '유사 닙바나(imitation Nibbana)'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들의 부도덕함이다.'


명상 훈련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베이스 기지로부터 오르기 시작합니다. 얼마 안 가서 수행자는 지칩니다. 그때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라는 등의 말로 힘을 북돋아 줍니다. 지쳤지만, 수행자는 계속 올라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나무그늘 아래 휴식처에 도달합니다. 피로는 씻은 듯 사라집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수행자는 더 올라갈 만큼 원기가 회복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는 수행자가 더 높은 위빠싸나 지혜로 올라가게 하는 휴식처입니다.


아직 이 지혜의 단계까지 오르지 못한 수행자들은 희망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 위빠싸나의 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흔히 낙담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명상이 결국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선원을 떠납니다. 그들은 '수행자의 닙바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가르치는 사람들은 선원에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이 단계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어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계에 곧 도달하도록 노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충고에 따라 성공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의 격려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신념과 결단에 가득차서 최후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계속 노력합니다.


이 '수행자의 닙바나'는 가끔 비인간적 기쁨 또는 초인간적 환희(즉, 보통 인간의 기쁨을 초월하는 환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교육이나 재산이나 가족 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사건으로부터 많은 종류의 기쁨을 맛봅니다. '수행자의 닙바나'는 이 모든 종류의 기쁨을 능가합니다. 한번은 어떤 수행자가 나에게 자기는 모든 종류의 속세의 쾌락을 맛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명상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계속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자가 진전됨에 따라, 물질의 형상과 모양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언제나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타난 것은 무엇이든지 주목하는 순간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봄'을 주시하면 그것은 재빨리 사라집니다. '들음'을 주시하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구부림과 뻗음도 재빨리 사라집니다. 나타나는 대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앎'도 또한 대상과 함께 짝을 이루면서 연속하여 사라집니다. 이것이 사라짐의 지혜입니다.


주시할 때마다 그것들은 재빨리 사라집니다. 오랫동안 이를 지켜보면 수행자는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두려움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이 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들의 결함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불행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러면서도 명상을 계속하면 그것들을 혐오하게 됩니다. 그것이 혐오감에 대한 지혜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그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M. i, 137; S. iii, 68)


수행자의 물질인 몸은 전에는 유쾌한 것이었습니다. 앉거나 서거나, 가거나 오거나, 구부리거나 뻗거나, 말하거나 일하거나 무엇을 하든 아주 좋은 것 같았습니다. 수행자는 내 소유인 이 물질적인 몸이 의지할만하고 유쾌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몸에 대하여 명상하여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몸을 의지할만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무디고 성가신(dull and tiresome) 것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몸과 정신적 기쁨의 두 가지 쾌락을 즐겨 왔습니다. '나는 즐기고 있다. 나는 행복을 느낀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이런 느낌들은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그것들도 또한 주목하면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그것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지각을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주목하면 사라집니다. 지각도 마찬가지로 혐오합니다.


의도는 수행자의 모든 몸과 생각과 언어적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 '내가 앉고, 서고, 가고, 행동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 의도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그것들도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수행자는 그것들에 대해서도 혐오합니다.


수행자는 생각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초보자가 선원에 왔을 때,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주시하기만 해야 한다고 하면, 그들은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이제 수행자는 생각이나 관념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에, 그것들에 대해서도 지겨워합니다.


감각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육문에 나타나는 것은 이제는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입니다. 어떤 것은 지극히 혐오스럽고, 어떤 것은 상당히 혐오스럽습니다.


그러면 그들 모두를 제거하려는 욕망이 생깁니다. 일단 그것들에 대해서 지겨워하게 되면, 물론 그것들을 제거하고 싶겠죠. '그것들은 끊임없이 왔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멈추면 좋겠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멈춘 곳'이 닙바나입니다. 그들로부터 해탈하려는 욕망이 닙바나에 대한 열망입니다. 닙바나를 원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명상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살펴보는 지혜인데,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이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도록 더욱 노력하는 것입니다. 특히 고통을 더 명백히 봅니다.


다시 살펴본 다음에,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에 도달합니다. 이제 수행자는 아주 편안합니다. 수행자가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부드럽고도 아주 잘 주시됩니다. 수행자가 앉아서 명상하기 시작해서 초기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 마치 시계 태엽을 한 번만 감아주면 저 혼자서 째깍째깍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자기가 할 일을 계속합니다.


이 지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장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들리는 소리로 향하기 때문에 방해받을 지도 모릅니다. 망상 때문에 명상이 방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루함이나 뜨거움이나 통증이나 가려움이나 기침 등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나타나서 수행자를 괴롭힙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잘 됩니다. 더 이상의 장애는 없습니다.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수행자는 그걸 무시하고 계속 주시합니다. 그 무엇이 나타나더라고 방해받지 않고 주시합니다. 더 이상의 망상도 없습니다. 기분 좋은 대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수행자 안에서 기쁨이나 쾌락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쾌한 대상을 만납니다. 그래도 불쾌감이나 두려움을 못 느낍니다. 피곤함이나 뜨거움이나 통증 같은 고통스런 느낌이 가끔 나타납니다. 그것들이 나타나면, 그들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시가 그것들을 치료합니다. 일단 이 지혜를 얻으면 가려움과 통증과 기침은 치료됩니다. 어떤 사람은 중병이 낫기도 합니다. 병이 완전히 낫지는 않더라도 열심히 주시하는 동안에는 상당히 완화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시간 정도는 주시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없게 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두세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고 계속 명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몸에서 혐오감을 못 느낍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들은 '아직 얼마 안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이 지혜를 얻으면 아주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찌는 듯한 더위에 신음하고 있는 동안 이 지혜에 도달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는 더위를 전혀 못 느낍니다.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게 흘러갑니다. 그것은 참으로 매우 훌륭한 위빠싸나 지혜이지만, 아직도 지나친 걱정이나 야심이나 혹은 집착 같은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일단 그것들이 제거되면 성자의 길로 들어가는 지혜가 체험될 것입니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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