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13. 무상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5:20
 

 

 

13. 무상


닙바나를 제외한 실재인 마음과 물질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원인이 발생할 때마다 존재 속으로 들어옵니다. 존재 속으로 들어온 다음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들 마음과 물질이라는 실재는 무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봄'을 예로 들어 봅시다. 처음에는 '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건강하고, 대상이 나타나고, 빛이 있고, 그 대상에 주목한다면, 만약 이 네 가지 원인이 동시에 발생한다면, '봄'이 있게 됩니다. 일단 '봄'이 나타난 다음에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봄'이 없습니다. 그래서 '봄'은 무상하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봄'이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쉽지는 않습니다. '들음'은 보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들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가 건강하고, 소리가 나타나고, 장애물이 없으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만약 이 네 가지 요인들이 동시에 발생한다면, '들음'이 있게 됩니다. '들음'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들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들음'은 무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의 소리를 들은 다음에 다음 소리를 듣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들은 다음에 소리는 사라집니다. 자, '소리, 소리, 소리'를 들으셨지요? 내가 '소'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소'를 듣고, 그 다음에 더 이상 '소'는 없습니다. 내가 '리'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리'를 듣고, 그 다음에 '리'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이 어떻게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심리-물리학적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왔다가는 사라집니다. 봄, 들음, 냄새 맡음, 맛봄, 감촉함, 생각함, 구부림, 뻗음, 움직임 - 모두 나타났다는 사라집니다. 그것들이 계속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합니다.


이들 중 의식의 사라짐은 아주 명백합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마음이 망상한다면, 망상을 주시하십시오. 주시하면 망상하는 마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망상은 바로 그 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시되자마자 바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무상하다고 합니다.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도 명백합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 꺼짐을 계속 주시하고 있을 때, 몸 어디에선가 피로나 뜨거움이나 통증이 나타납니다. 수행자가 그것에 집중하여 '피로함, 피로함' 등을 주시하면,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고, 때로는 적어도 주시하고 있는 동안만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수행자는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주시하기 때문에 그것의 무상한 특성을 체험합니다.


이 사물의 무상한 본성을 체험하는 것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경험으로부터 옵니다. 개인적인 체험 없이 단순한 숙고에 의해 아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닙니다. 명상하지 않고는 무엇이 생겨났다가 무엇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책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덕행(meritorious deed)은 될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위빠싸나 지혜는 아닙니다.


진정한 위빠싸나 지혜는 사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명상함에 의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중 많은 수행자들이 이 지혜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 제자 40명 혹은 50명만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수백 명이 경험했습니다. 초보자는 아직 그런 명백한 지혜를 획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가르쳐 준 대로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여러분들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습니다. 학위나 명예나 명성도 모두 열심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위빠싸나 지혜도 열심히 노력해야 얻어집니다.


집중력이 날카로워짐에 따라, 수행자는 팔다리를 굽히거나 뻗는 단 한 번의 동작에서도 여러 개의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구부리거나 뻗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여러 개의 생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한 번 깜빡일 때에도 수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수행자는 이 모든 무상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단지 '알고 있음(aware), 알고 있음'을 주시하십시오. 수행자가 '알고 있음'을 주시할 때마다 넷, 다섯 혹은 열 개의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앎(awareness)이  충분히 민첩하게 되면 '알고 있음'이라는 말조차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단지 그 생각들을 지성(intellect)으로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지금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고, 지금 마음이 그것을 압니다. 지금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지켜보는 의식이 그것을 압니다. 그것은 '밥 한 숟갈에 반찬 한 젓가락'이라는 속담과 같습니다. 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아는 지켜보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 때, 이러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수행자에게 분명히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보고 있을 때 일어나는 망상하는 마음은 지켜보는 의식에 감지됩니다. 이는 마치 동물이 덫에 걸리는 것과 같고, 정확하게 겨냥되어 날아간 돌에 목표물이 맞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수행자가 망상하는 것을 알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마치 그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압니다. 수행자는 그렇게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압니다.


피로함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피로함을 주시하면 사라집니다. 다시 나타나면 다시 주시하고 다시 사라집니다. 이런 종류의 사라짐이 더 높은 상태의 위빠싸나에서 더욱더 명백해 집니다. 피로하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피로하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하나씩하나씩 사라집니다. 하나의 피로와 다음 피로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통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아프고 주시하고 사라집니다. 매 주시마다 각 통증이 사라집니다. 하나의 통증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습니다. 각 통증은 다른 것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통사람에게는 피로나 통증이 지속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피로나 통증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오랫동안 지속되는 피로나 통증은 없습니다. 하나의 피로와 다음의 피로, 하나의 통증과 다음의 통증, 단지 아주 짧은 조각들, 아주 분리된 것들입니다. 수행자는 주시함에 따라 이것을 보게 됩니다.


수행자가 배가 일어남을 주시할 때, 일어남이 서서히 나타나고, 서서히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꺼짐을 주시할 때, 꺼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보통사람들은 일어남과 꺼짐을 배의 우수꽝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수행자들도 또한 우수꽝스러운 배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효과에 대해서 트집을 잡기도 합니다. 추측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해 보고 스스로 느껴보라고 경고합시다. 충분히 열심히 노력한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가 구부림을 주시하면, 어떻게 움직이고 사라지는가, 움직이고 사라지는가, 하나가 움직이고 다른 하나가 움직이는지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제 '마음과 물질이라는 실재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경전에서 말한 것을 이해합니다. 보통사람들은 구부리기 전의 팔과 같은 팔이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같은 팔이 안 쪽에서 바깥 쪽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바뀌지 않는 팔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이 연속하여 발생하는 방식인 사물의 연속성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통찰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상은 지속성 뒤에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명상하지 않기 때문에 숨어 있습니다. 청정도론은 말합니다.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의 특성은, 연속성 뒤에 숨어 있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

(Vis., xxi, Path of Purity, 781)


수행자가 일어나는 것마다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것들은 그에게 분리되어서, 분리되지 않은 전체가 아니라 부서진 조각들로 나타납니다. 여러 마리의 개미가 가는 것을 멀리서 보면 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사물을 부서진 조각들로 보기 때문에 연속성이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무상한 특성이 수행자 앞에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는 더 이상 환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어남과 꺼짐이 터득되고 연속성이 파괴되었을 때, 무상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같은 책)


이것이 명상하여 무상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명상하지 않는 단순한 숙고는 이 지혜를 생기게 하지 못합니다. 일단 이 지혜를 얻게 되면 고통과 무아의 지혜도 따라 옵니다.


'메기야여(Meghiya), 무상을 안 사람에게는 무아에 대한 지각도 확립된다.'

(A. iii, 169)


수행자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잘 아는 것을, 어떻게 자기자신이며 에고이고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일생동안 계속해서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집착합니다. 일단 자신의 경험으로 인생이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해 지면, 자기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이 경이 메기야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보디(Sambodhi)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무상을 지각한 사람은 무아에 대한 지각도 확립된다.'

(A. iii, 165)


나아가서, 무상을 체험한 사람은 고통도 체험합니다. 어떻게 사물이 생겼다가 사라지는지를 체험한 수행자는, 이 두 사건, 일어남과 사라짐이 어떻게 자신을 짓눌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보디 경의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상의 특성을 알게 되면, 무아의 특성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 고 무아 중의 한 가지를 알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의 특성 하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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