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가 말했다.
"안 됩니다. 당신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내 생각이 틀렸겠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높은 차원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서 다른 절을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절은 가난합니다. 당신은 벌서 우리 절에서 제일 좋은 불상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당신을 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나는 그대가 이제야 올바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대는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눈에서 이해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그대 속에 있다."
2년 뒤에 그 주지는 선사에게 사과를 드리러 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절에 있던 나머지 세 개의 불상도 갖고 와서는 선사에게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이것마저 태우셔도 좋습니다. 나는 어젯밤 드디어 이해했습니다. 그때까지 사실 한순간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우아한 자태, 당신의 평화, 그리고 당신의 침묵과 그 노력들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내가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밤에 당신을 밖으로 내쫓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음날 아침까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제 나는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절 앞에 있는 바위나 법당 안에 있는 불상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말입니다."
처음 인도에 영국 정부가 들어와서 길을 닦고 이정표를 세울 때, 그들은 이정표를 붉은 색으로 칠했다. 붉은 색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특히 푸른 숲과 들판과 대조해서 붉은 색은 다른 색보다 훨씬 눈에 선뜻 들어왔다.
영국 기술자들은 공사를 하다가 매우 놀랐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정표로 세운 돌에다 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누만(Hanuman)의 석상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들은 매우 난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단지 이정표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들은 당신들에게는 이정표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매우 아름답고 신성하게 보인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예배한다고 해서 당신들에게 무슨 해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그것들을 예배할 것이다."
영국 기술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당신들에게는 이정표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누만의 석상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인도인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달마의 대답은 여기에 나온 그 제자의 말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는 오직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불성을 기억하라. 그것을 각성하라. 그러면 그대는 무심(無心)이 되어 부처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예배해야 한다. 그대가 사원이며 그대가 예배자이며, 그대가 예배를 받는 자이다."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그대의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그 부처도 도(道)이다. 도는 바로 선(禪)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단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뿐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젠(zen: 禪)'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것의 어원이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말은 디야나(dhyana)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는 당시 그의 제자들에게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것은 팔리어로 쟌(zh'an)이었다. 그리고 쟌은 중국에 와서 찬(ch'an)으로 변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젠(zen)이 되었다.
그래서 젠은 본래 일본어가 아니다. 찬 역시 중국어가 아니다. 그래서 젠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겠지만 그것의 어원을 알게 되면 간단히 알게 된다. 그 말의 어원인 디야나는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면 간단히 알게 된다. 그 말의 어원인 디야나는 마음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념의 흐름을 넘어선다'는 뜻이며, '완전한 침묵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 침묵은 어떤 것도 방해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허공이다. 바로 이 공간이 젠이며 명상이다.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어리둥절해질 필요가 없다. 젠, 즉 선의 본래 뜻은 바로 이곳 인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인도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그 뿌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디야나'라는 꽃은 일본에서 그 궁극의 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불행하게도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도 정부는 세계 각 국의 인도 대사관에다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라도 인도에 명상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광 비자도 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명상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정치가들은 명상가가 될 수 없다. 명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욕심이나 야심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려고 하지 않는 마음에서 바로 명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정치가는 명상가가 될 수 없다. 인도는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나라이지만, 인도의 대학은 명상을 가르치는 학파가 하나도 없다. 인도에 와서 명상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인도 대사관에 의해서 제재를 받았다. 그들은 단지 타지마할(TajiMahal)이나 카주라호(Khajuraho)를 구경하러 간다고 말해야 비자를 내주었다. 혹은 카슈미르로 밀월여행을 떠난다거나 어떤 바보같은 이유로 인도를 간다고 해야지 명상을 배우러 간다고 말하면 절대로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일어난 가장 불행한 사건 중의 하나다. 인도는 가장 위대한 명상가들을 배출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인도로부터 명상을 배웠다. 그것들은 여전히 일본이나 한국의 사원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더 이상 어떤 발전도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명상에 대해서는 알파벳도 모르는 형편인 것이다. 그들은 긴장되고 걱정이 가득 찬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단지 다리만 꼬고 앉아서는 교활함과 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권력을 잡는 것에만 있다.
명상은 이런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겸손해지는 길이며 단순한 가슴을 갖는 길이다. 그것은 이슬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사라지듯이 자신의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는 경전들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베다(Vada)}를 알 수도 있고, {우빠니샤드(Upani shad)}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대는 {바이블}나 {꾸란(Koran)}을 혹은 {기타(Gita)}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그대의 가르침은 앵무새가 떠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불과하다. 아니 앵무새가 그대들의 성직자보다 더 지성적일 것이다.
나는 한 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두 마리의 앵무새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기도문을 외우도록 수년 간 훈련을 시켰다. 그는 앵무새들에게 완두콩을 먹이로 주곤 했는데, 앵무새들은 완두콩을 받을 때마다 기도문을 외웠다. 그래서 그곳에 온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그 앵무새들은 기도문을 너무나 완벽하게 외웠기 때문에 마치 성자처럼 보였다.
결국 그 주교는 앵무새를 잘 훈련시켰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앵무새를 한 마리 더 사서 훈련시키려고 했다. 그는 새로 사온 앵무새를 두 성자의 우리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다음날 주교가 방에 들어오자 새로 온 앵무새가 먼저 있던 앵무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조지, 이제 완두콩을 받을 시간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 우리를 사랑하는 이가 우리에게 완두콩을 주도록 하옵소서."
그 앵무새는 암놈이었고 다른 두 마리보다 더 지성적인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이 경전을 남에게 가르칠 때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학문으로는 진정한 종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이다. 그리고 경전을 따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자만이 도를 찾을 수 있다. 그가 한 구절의 경전도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부처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무심(無心)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동작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道)는 본래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에 그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의 맛은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을 뿐 이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그대는 아주 조금만 깨어 있다. 그대의 전존재를 수치로 계산할 수 있다면 그대는 십분의 일만 깨어 있고 나머지 10분의 9가 어둠 속에,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너무나 표면적인 것이어서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욕한다면, 그대는 겸손의 미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즉시 분노하게 된다. 갑자기 그대의 야만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그대 속에 있는 맹수의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그대가 문명인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것은 마치 옷과 같다. 그대는 한순간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다. 그대가 아는 종교, 문화, 그리고 그대가 항상 말하는 위대한 자질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대의 의식은 그만큼 부분적이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그것은 깨어 있는 자의 높이만큼 이르게 할 수 없다. 부처가 계속 오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가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라면 그대는 어두운 골짜기와 같다. 그가 말하는 것이 그대에게 도달한다해도 그것은 이미 같은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저 골짜기의 메아리만 들을 뿐이다. 그것 중 일부가 그대에게 도달하고 그대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그것을 해석한다.
어느 날 밤 석가모니 부처는 그의 설법을 끝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시간이 되었다. 그대들은 가서 마지막 필요한 일을 하라. 결코 그것을 잠들기 전에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은 잠들기 전에 하는 명상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한 도둑과 창녀가 그곳에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가 "자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가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을 하라."고 하는 말을 했을 때 그 창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크!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부터 일 할 시간인데 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겠다."
그 도둑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도둑인지 안다. 잠들기 전에 그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빨리 도망을 쳐야 하겠다. 지금쯤은 일을 마칠 시간인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 잠은 다 잤다."
수천 명의 산야신(sannyasin, 힌두교의 고행자)들이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창녀는 시장으로 나갔고, 그 도둑은 일을 할 곳을 찾아갔다. 부처는 한 가지를 말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제각기 달리 해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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