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무심(無心)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무심(無心)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안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무(無)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그리고 또다시 무(無)로 사라진다. 그대는 매일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나무에서 씨앗이 나온다. 그 씨앗을 잘라서 그 안을 들여다 보라. 거기에는 나무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고, 잎사귀 한 장도, 열매 한 알도 없다. 텅 비어 있어 그냥 무(無) 자체다.
그러나 씨앗에서부터, 그냥 무(無)에서부터 커다란 나무가 나온다. 많은 잎과 가지와 열매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거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수백만 개의 씨앗도 나온다. 그리고 그 각각의 씨앗에서 또 수백만 개의 씨앗이 나온다. 나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씨앗 하나로도 지구 전체를 푸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담겨 있다. 그대가 그것을 잘라 보아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무(無)에서 나와서 무(無)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무런 집착도 할 필요가 없다. 집착은 그저 불행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아침에 활짝 핀 꽃도 밤이 되면 시들어 버린다.
집착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대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꽃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이 있는 동안에 즐겨라. 그리고 그것은 무(無)에서 나와서 무(無)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것은 모든 것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대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 혹은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그들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매우 작은 씨앗에서부터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대는 그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대 역시 화장터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집착이 그대의 실체를 놓치게 만든다. 그대는 보이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것들은 그대의 깨어 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대는 수만 가지 것들에 둘러싸여 길을 잃을 것이다.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경전이 된다."
그때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전들이 쓸모 없게 된다. 그대는 거룩한 것 중에 가장 거룩한 것을 본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근원을 본 것이며, {베다}의 근본을 본 것이다. 그것들, 소위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본 것이다. 사람이 그 근원을 발견할 때 누가 껍데기에 집착하겠는가?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경전의 구절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이 오직 밝은 무심(無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는 그 무심(無心)에서 비롯된다. 그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다. 진정한 이해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침묵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궁극적인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 역시 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도(道)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은 꿈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꿈에 보물과 궁궐을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은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오직 순수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돈도 아니고 그대의 명예나 권력도 아니며, 집도 아니고 오직 순수한 의식임을 기억하는 한 그대는 죽음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다. 그때 죽음은 그대에게 어떤 작은 동요도 일으킬 수 없다.
죽음은 그대가 집착할 때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때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심리학의 기본 전제이다. 그것은 그대가 집착한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아내나 자식이나 권력과 부를 갖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대는 그것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대를 완전히 벌거벗긴다. 오직 순수한 의식만을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우빠니샤드}에는 내가 항상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야야티(Yayati)라는 한 위대한 왕이 있었다. 그의 나이는 백 살이나 되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한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의 사신이 야야티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이제 당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 나는 그대를 데려가야 한다."
죽음의 사신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생긴 전사의 모습이었다. 야야티는 두려움으로 몸이 떨려 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너무 일찍 왔다"
그러자 죽음의 사신은 말했다.
"일찍 왔다고? 너는 백 년이나 살았다. 이제 너의 자식들도 늙었고 너의 장자는 이미 80살이다. 그런데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가?"
야야티는 일백 명의 아내와 일 백 명의 자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사신에게 물었다.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십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에게는 백 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내 대신 데려가고 나를 백 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죽음의 사신은 말했다.
"그것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런데 누가 그대 대신 죽으려고 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자식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다."
그래서 즉시 야야티는 그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거기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장자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때 가장 어린 막내아들이 입을 열었다. 그는 겨우 열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신 역시 매우 안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신은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너무나 순진하구나. 99명이나 되는 너의 형들은 입을 다물고 있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80살이나 되었고 어떤 사람은 75살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더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 내가 너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그 소년이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멀쩡한 정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부왕께서 백 년이란 세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나 역시 더 살아봐야 무슨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99명이나 되는 나의 형들도 삶에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어도 아버지를 위해서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백 년을 더 살 수 있도록 내가 대신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내가 백 년을 산다 해도 나는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죽든 90년 뒤에 죽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십시오."
죽음의 사신은 그 소년을 데려갔다. 그리고 백 년 후에 다시 왔다. 야야티는 이번에도 이렇게 말했다.
"백 년은 너무 짧은 세월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내 아들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또 다른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전처럼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하여 야야티는 백 년을 더 살게 되었다. 그런데 매번 이런 식으로 해서 야야티는 천 년을 더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사신이 열 번째 왔을 때 야야티는 말했다.
"아무리 오래 살아봐도 당신이 처음 왔을 때처럼 나는 아무런 삶의 만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쳤습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제 천 년이 아니라 만 년을 살아도 똑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대는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이 그대를 찾아오면 그대는 두려워 떨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으면 죽음은 하나의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 그대는 떠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죽음은 빛을 잃는다. 죽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만은 위력을 잃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은 이미 불멸의 존재이다. 바로 부처인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해서 그 무엇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미혹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대는 헛되이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낀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대가 한번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 자유는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우주의 빛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가장 큰 축복이며 환희의 절정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초월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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