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아비라기도를 하는 이유는?

通達無我法者 2008. 8. 25. 16:26

 

 

아비라기도를 하는 이유는?

글 : 일행 스님

 

아비라기도는 왜 하는 걸까?

다양한 기도법들 가운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왜 이런 방법으로 기도를 해야 할까?’ 라고 의문을 크게 갖지는 않는 것 같다.

업장소멸이라던가, 원하는 바가 성취될 수 있다는 등의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비라기도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을 강하게 갖는 것 같다.

아비라기도가 정말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단연코 장궤합장(長跪合掌) 자세 때문일 것이다.

편히 앉아서 해도 될 터인데 왜 장궤합장이라는 힘든 자세를 취하고서 법신진언을 불러야 하는지?

아비라기도가 일반적인 기도와 다른 것은 108배와 법신진언과 능엄주로 되어 있다는 구성의 독특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신진언을 할 때 평범한 자세가 아닌 고통이 수반(隨伴)되는 장궤합장 자세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해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이의(異議)를 달지 않을 것이다.

또 아비라기도를 하면 치열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치열(熾烈)이란 불이 타오르는 모양을 말한다.

불이 그냥 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성난 사람마냥 거세게 맹렬하게 집어 삼킬 듯이 타오르는 것을 두고 ‘치열(熾烈)’이라고 한다.

내 속의 공부에 대한 불길이 평상시에는 좀처럼 타오르질 않는다.

늘 되풀이 되는 일상의 것들 속에서는 더 이상 어떤 자극도 없다.

익숙해진 것들을 통해서는 풀어져 가는 나를 조일 수 있는 긴장(緊張)도 없게 된다.

그래서 공부(기도)를 할 때 나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 어떤 ‘조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 조임이 바로 장궤합장이라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장궤합장이라는 조임을 통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현재의 내 정신상태가 어떠한지 그 현주소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이 정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쩔쩔매는 나’라고 하는 자신의 의지나 인내력을 파악할 수가 있게 된다.

2. ‘이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나의 정신은 사방팔방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다니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 정신을 온전히 수습(收拾)하기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내 정신의 현재 상태라는 것이다. 내 정신이 고통이라는 긴장 속에서도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정신이 고통이라는 긴장 속에서도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평상시의 정신 상태에서는 얼마나 제멋대로 이겠는가?

 이렇게 극심한 상태에서도 내 정신은 제멋대로 노닐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궤합장을 하면서 법신진언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딴 곳으로 뛰어가려는 내 정신을 법신진언의 소리에 묶어 두려는 것이다.

장궤합장을 하고 호흡을 일정하게 하면서 내가 내는 법신진언의 소리 이 모든 것에 나의 정신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계속하여 집중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인 ‘나’를 강하게 인지하고 움켜쥐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의 주체의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다.

주체의식이 강해진다는 것은 내 삶이라는 장(場)에서 내가 주인(主人)으로서 중심(中心)을 잡고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하필 법신(法身) 진언(眞言)일까?

법신진언을 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기에 그런 것일까?

어느 진언치고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는 진언은 하나도 없다.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 일단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되건 말건 그건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소멸될 일이 있고 성취될 일이 있으면 관여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문제는 소멸이 될 수있게, 성취가 될 수 있게 만들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내 속에 깃들어져 있으면서도 제 역할을 100% 다하지 못하는 보물이 있다고 한다.

그 보물을 일컬어 법신(法身)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참 나’라고 하기도 하고, ‘주인공’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법신이 본래의 나라고 한다.

그런데 왜 참 나인 법신이 100%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랜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좋지 않는 습기(習氣), 즉 욕심을 비롯한 갖가지 번뇌 망상이 법신을 덮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좋지 않은 습기(習氣)들을 제거해 나갈 수 있다면 법신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主人)으로서 당당하게 모든 것과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장궤합장이라는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내 속의 법신을 때우기 위해 법신진언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 그것도 치열(熾烈)하게, 이것이 아비라기도의 주된 이유라고 본다.

법신진언의 파장(波長)을, 진동(振動)을 내 안에 가득 채워 내 속의 이 못된 습기(習氣)들을 떨쳐내고 본래의 나인 법신이 온전하게 회복(回復)되도록 하기 위해 그 힘든 장궤합장 자세를 하고 치열하게 집중해서 불러대는 것이다.

 몇 파트 해보고서는 도대체 왜 아비라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성철큰스님께서 하라고 하셨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우리 수준에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지라도 불자(佛子)들 애먹이시려고 일부러 힘든 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힘들고 고생 스럽더라도 참고 견디며 끝까지 해보길 권해본다.

 

불교는 믿음과 실천의 종교

흔히 종교가 무엇인지 질문할 때 “무슨 종교를 믿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종교란 곧 어떤 절대자를 믿는 것’이라는 의미가 짙게 깔려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인의 경우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곧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력적(自力的)실천이 강조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보는 참다운 종교적 삶이란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믿음에 부합하는 실천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경전인‘숫타파타’에는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精進)으로써 바다를 건넌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믿음을 갖는 것은 마치 거친 파도를 건널 수 있는 든든한 뗏목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바른 믿음을 선택하는 것은 종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른 믿음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해탈하거나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뗏목을 타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노를 저어서 고해(苦海)를 건너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숫타파타’는 믿음의 배를 타는 것에 머물지 말고 정진의 노를 저어 고해의 바다를 건너라고 설합니다.

이렇게 믿음 못지 않게 바른 실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믿고 받든다’라는 의미를 지닌‘신앙(信仰)이라는 말보다 ’믿고 실천한다‘는 의미를 가진 ’신행(信行)‘이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서재영(동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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